역대상 13장

새벽기도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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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설교하다가, 막 뭐얘기할 때, 왜이렇게 열심히 안듣는다고 잔소리할수 있죠. 목회자가 예배를목회를. 자기 이득을 위해서 하면 추한거죠. 성도가 예배를신앙을 자기 이득을위해서 하면 추한거예요.
여러분 우리는, 통제받는것 보다는 통제하는것을 좋아합니다. 내 생활영역에 누군가가 cctv를 달려고 하면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반대로 내가 관찰하고 싶고 내가 보기를 원하는 곳에 cctv를 다는것에 대해서는 대체로 관대한 편이기도 하지요 어린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두고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어떤일이 일어나는지 cctv를 달아놓고 스마트폰으로 아이들을 관찰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품 안에 자식이라는 말이있는데 통제가능한 자식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자식이 이제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서 스스로 통제받기 싫어하는 사춘기라던가, 이런 상황이 오게되면 '아, 자식이 내맘과 다르구나, 내 영역에서 벗어나는구나..'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 이 또한 우리 인간이 통제하고 싶은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죠.
​사람은 누구나 내 생활영역속에 들어오는 것, 또 나와 함께 관계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를 보고싶고 알고 싶고 통제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런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 통제의 본성, 욕망이 하나님에게까지 옮겨지게 되면 그 때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우리 인생에 초래됩니다.
많은 무속 신앙인들은 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적 몇 장으로, 또 굿 한번으로 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것이 무속인들의 특징이지요. ​그런데 이 무속인들의 특징뿐만이 아니라, 이 문제가 무속주의 기독교에도 들어와 있다는것이 문제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헌금을 많이 드리면, 내가 하나님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착각하기 쉽죠. 또, 봉사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내 믿음의 여부와 상관없이 내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오해하는 분들도 꽤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통제를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관찰의 날개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우리가 내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무속주의 기독교에 빠져있는 사람들의 특징인 것이죠. 그렇게 될 때 우리 신앙은 병든 신앙이 되고, 우리 믿음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길로 막다른 길로 치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웃사의 비극이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언약궤에 관련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빼앗긴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내용이냐면 다윗이 즉위하기 7~80년전에. 홉니와 비느하스, 이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전쟁에 나간적이 있었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냐면. 언약궤를 앞장세우고 나가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죠. 결국 언약궤를 들고 나갔는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쟁은 지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고 그 소식을 들었던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서 죽게 되었던 것이죠. 한 가정의 비극이요, 온 나라의 비극이 되었던 언약궤에 얽힌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빼앗긴 언약궤는 블레셋으로 가져갔고, 블레셋 사람들은 숙적인 이스라엘의 신앙의 상징인 언약궤를 빼앗아 와서 그들은 전과를 올리게 되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인해서 블레셋을 심판하시고 치시게 되는데, 온 블레셋에 독종과 종기가 나기 시작합니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것이죠. 결국 블레셋 사람들이 견딜 수 없어서 언약궤를 다시 반환했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중심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게 되죠. 다윗은 이를 굉장히 가슴 아프게 여겼는데, 왜냐면, 첫번째 왕 사울왕 시절에도 하나님의 언약궤는 성전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 이후에 이 궤를 다시 모셔오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그런말을 했던것이죠.
​물론, 사람들은 다 좋아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모셔올 것인가? 원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언약궤는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그 궤를 메어 오도록 되어 있었는데요. 그런데 그들은 잘 하려고 하다가 궤를 메어오지 않고. 수레를 만들게됩니다. 그런데, 수레를 만들어 싣고 오는 것 부터가 이미 문제였던것이죠..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 수레를 몰고 있던 웃사입니다. 웃사라는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냐며느, 자기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늘 모시고 있었고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관리하다가 보니 스스로도 하나님을 관리한다고 착각했던것 같습니다.
​소들이 뛰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자기도 모르게 소들이 뛰어서 궤가 떨어질까봐 그 하나님의 궤를 손으로 붙들었습니다. 원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의 궤는 만지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웃사를 치므로 웃사가 그자리에서 죽었다는 이야깁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웃사가 과연 이 율법을 모르고 그랬을까? 저는 몰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몰랐다기보다도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오랫동안 하나님의 궤를 관리하다보니 하나님의 말씀도 내가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고말자 그는 하나님의 궤를 붙들고 말았습니다. 익숙해져 있는 사람의 잘못된 모습이 오늘 여기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너무 익숙해지면 신앙생활이 너무 익숙해지면 초신자시절을 지나서 십년이 지나고 이십년이 지나고 수 십년동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로는 예배당 문을 들어설 때의 설렘과 두려움과 옷깃을 여미는 그 뜨거운 마음이 이제는 점점 사라져 가게 됩니다. 익숙해진 나머지 내가 교회를 관리할 수 있다고 믿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다보니 이제는 하나님까지 내 마음대로 통제하고 관리한다고 믿는 것, 그것은 타락된 믿음이요, 잘못된 신앙입니다.
​자기 집에 하나님의 궤가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이 내 생활의 한 부분이고 내 삶의 한 영역이 되어서 내가 함부로 관리하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웃사의 착각이 결국 죽음을 불러 온 것입니다.
​신앙을 처음 가지는 초신자들은 예배당에 들어올 때 두려운 마음을 가집니다. 아, 이곳에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이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하는구나. 내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래서 내가 어떻게하면 예배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모습을 보일까? 처음 신앙을 가지고 처음 하나님을 믿는 분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집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마음은 점점 옅어져 가고 나중에 시간이 더 많이 경과하면 내가 관리자가 되어서 함부로 내 마음대로 관리하고 급기야는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집니다. 그러면 복은 커녕 웃사처럼 죽임을 당하게 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반면 오늘 이 본문에서는 오벧에돔의 집을 소개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윗은 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기 궁전으로 예루살렘으로 모셔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이 궤를 다시 메어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 13절,14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다윗이 궤를 옮겨 자기가 있는 다윗 성으로 메어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니라 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의 가족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오벧에돔의 집에서는 하나님의 궤가 석달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는 하나님이 큰 복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아비나답의 집 웃사의 집에는 더 오랜 시간동안 십 여년이 넘는 더 긴 시간동안 머물러 있었지만 그러나 그 집에는 하나님의 복은 커녕 웃사의 죽음만 남겼을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어떤 의미입니까?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그것이 곧 복이 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건 마치 오늘 믿었던것처럼 마치 오늘 내가 주님을 영접한 바로 첫 날인것처럼 두려운 마음, 떨리는 마음, 기쁜 마음, 행복한 마음으로 오늘도 첫 사랑의 감격으로 오늘 하루를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 주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실때도 마치 내가 주를 만난 그 첫 기쁨을 가지고 늘 설레는 마음으로 주의 전을 출입하시고 성경을 읽으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쁨으로 오늘 하루 이번 한 주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 되셔서 오벧에돔의 집에 내리셨던 큰 복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특정한 공간에 가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욕망을 팔아서 욕망을 체우려고했던 흐름이 파괴되었어요.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공간을 부수고 나와서,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삶속으로 스며드는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성전은, 나를 위해 누군가와 경쟁하고 누군가의 피를 흘려야 하는 세상속으로 들어왔어요. 나를 위해 피흘리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속으로 흘러들어왔어요. 참성전인 예수님이 이땅으로 오시고 우리는 또 다른 성전으로 이땅에서 살게됩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쌓고 있는 가짜성전들, 우성들을 밀어내면서, 각자의 자리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서있는 그곳이 성전되게 하는 삶을 살게 하실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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