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6장

새벽기도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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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의 시작은 엘리사 공동체의 공간이 좁음을 이야기 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좁아진 이유는 제자들의 숫자가 증가했기 때문이겠죠. 지속적으로 제자들의 수가 증가한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어둠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심각한 영적 궁핍의 시대에는, 진리에 굶주린 사람들이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엘리사 같은 사람을 중심으로 쏠리게 되어 있는것이죠. 그래서 영적인 쏠림은 사실은 슬픈 일입니다. 영적인 빈곤함이 그 땅을 덮었다는 증거기이게 굉장히 안타까운 상황인데. 그때 요단으로 가서 새로운 거처를 마련한 이후의 이야기가 진행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영적인 위기가 왔는데, 예상밖에 외부 즉 아람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람 왕이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사건인데요. 당시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아람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든지 영토의 점령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정보를 모으고 그들의 취약점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계속 실패를 하는것입니다. 마치 그들의 비밀회의를 빤히 들여다 보기라도 하듯이. 이스라엘의 취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그곳에 가보면 군대가 있고. 방비가 되어있는 것을 보고 계쏙해서 이런일이 일어나니까. 뭔가 이상하다~, 배신자나 첩자가 있는게 분명하다~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측할수있듯이, 나아만이 아람의 군대장관이였지않았습니까. 그 나아만이 엘리사에 의해서 고침받았기 때문에. 그 이후로 엘리사는 아람의 왕실에서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엘리사에 대한 소문이 확산되고, 과장되고. 첨가되었던거 같습니다. 소문이란 그런거죠. 그에 따라 한 신복이 어떻게 보고를 하냐면, 12절을 보면. 읽음, 분명 맞는말인데, 과장된거죠. 침상에서 하는말을 들은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가 뭔가 알고있는거 같다고 이야기를 하면 되는데, 두려움때문였는지 상당히 과장된 표현을 합니다.
여러분 이 부분을 잠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을 지키시기 위해서 엘리사에게 어떤 통찰력을 허락하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기도하다. 어느지역이 좀 걱정되고, 부담이 느껴질수 있었을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엘리사의 능력은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임시적으로 부어주신 하나님의 능력이였어요. 생각해보세요. 이런능력이 임시적이 아닌, 엘리사의 능력이였다면, 그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 시간문제였을 것입니다. 능력이란 상당히 무서운것이죠.
이전에 태조왕건을 봤을 때, 궁예가 눈은 하나 없지만, 마음을 읽는 독심술이라는 능력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심술이 의심으로 변했고, 관계가 틀어지고 자신을 파멸에 빠뜨리는. 능력이 되었단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이 엘리사의 능력은, 하나님과의 그 친밀함속에서 유지되는 임시적인 능력이여야만 하는것이죠.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누군가의 이야기가 다 들린다. 지금 대학부의 마을장이 계속해서 새벽기도 나오고 있느데, 마음속에 말들이 다들린다. 미칠지도
오늘 말씀은 이런 능력보다 훨씬더 중요한게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이제 아람왕은 자신의 최우선의 목표를 엘리사 제거에 두고, 한밤중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해서 엘리사가 머물고있는 도단 성을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의 이야기. 바로 역전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것이죠. 지금까지는 어떠한 상황이였냐면, 아람군대가 오는곳마다 방비가 되어있고, 방어진이 잡혀있어서 아람입장에서는 공략이 힘들었는데, 이제는 어떻습니까? 방비가 없이, 너무나도 쉽게 오게된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상하죠. 뭔가 있는겁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어떻죠? 엘리사가 아람의 군대를 유인한게 된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람과 군대가 주도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엘리사가 아람군대를 이스라엘로 끌어들여서 아람왕과 아람군대에게 어떤 결정적인 메시지를 주려고 하는 그런, 상황이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야기이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너무나도 생각이 났습니다. 무기력하게 잡히고 맞고, 고문당하고 벗겨지고 완전히 초라하게, 죽으셨는데. 그게 곧 승리였잖아요? 사단이 예수님을 못박아 죽이는 순간,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죽음으로서 사단의 패배가 결정된 순간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겉으로는 고난인데, 속으로는 축복이고, 죽는거 같은데, 살고, 버림받는거같은 존귀함을 받는. 모든 것을 잃는거 같은데, 모든 것을 얻는, 그러니까 핵심은. 내가 하나님앞에서 제대로 서있으려고 하는가. 이것만 기억한다면. 여러분 죽는거 같은데~. 죽지않습니다. 망하는거 같은데~, 망하는게 아니예요.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있으려고 한다면.
그게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6장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의 특징이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있서어 이런 기쁨을 누리기 소망합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엘리사의 사환은 그러질 못했어요. 아침에 나갔다가 말과 병거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이러죠. 여러분 우리가 이 청년의 반응을 보고 비웃으면 안되고, 사실은 이게 우리의 반응입니다. 우리의 반응, 놀라고, 불안하고, 조급하고 서두릅니다. 이게 우리들의 일상이죠.
여러분 이 반응이 이해는되지만, 중요한 것은 이해할수 있다고 해서 그런 당연한 반응이 할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있는그대로 느끼고 반응하는게 아니라, 이 현실을 뚫고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전부가 아니다 라는 것을 보는 우리의 영적인 눈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사환의 두려움을 막고 현실을 넘어를 보도록 요청하죠. 16절에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말라는 것은 엘리사는 우리와 함께있는 군대가 아람군대보다. 훨씬더 많은 것을 보고있었기 때문이예요. 사환이 못보고있는 것을 엘리사는 봤습니다. 결국은 현실이 아니라. 이제 눈의 문제. 보는자와~ 보지못하는자의 차이입니다.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자와. 하나님을 통해서 문제를 보는자의 차이인 것이죠
그에따라 엘리사는 자기 사환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17절. 읽음. 여러분 상황은 그대로지만 뭐가 바꼇죠? 눈이 바뀌게 된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현실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현실이 쉽지않습니다. 현실이 너무 많이 힘들죠. 하지만, 현실도 문제지만, 사실은 눈이 더 문제인 것이죠.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 이건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내가 처한 현실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 의 문제는 결국. 무엇을 통해서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내 경험의 눈, 내 지식의 눈, 내 감정의 눈, 아니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통해서 보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순서의 문제로갑니다.. 나, 문제, 하나님. 내가 문제랑 딱 달라붙어서 그 문제를 끓어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느냐. 나 하나님. 문제냐의 순서. 결국 순서의 문제로 가게됩니다. 청년은 문제를 끌어않고 봤던 눈에서 하나님을 통한눈으로 바뀐거예요.
반면에, 아람의 눈은 도리어 어두워 지게됩니다. 물론 이들이 눈이 감겼던 이유는, 엘리사가 기도해서 생겼다기보다는,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할때마다 있었던 방비책이. 이번에는 왜 통했지?를 놓치는 것 자체가 자만심인것이죠.
그들이 나중에 눈을 뜨게 되었을때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에워싸러온 존재가 에워쌓임을 당하고, 에워쌓임을 당해야 했던자가 에워싸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를 다루는 엘리아의 최종적인 처신이 굉장히 인상적인데, 놀랍게 예수님을 느끼게 합니다. 지금 애워싸임을 당한, 그들을 치리이까 2하는 이스라엘 왕에게, 그러지 말라~ 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지금 자신의 적을, 손님으로 대하고있어요. 자기 죽이러 온사람들인데, 손님으로 됩니다. 공격당한 약자가, 공격한 강자에게 너그러움을 베풉니다. 결정적인 피해자가, 자만심 가득한 자에게 용서를 배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있을수 없는 얘기죠. 우린 못합니다. 용서못하죠. 내가 피해받았는데, 어떻게 가해자를 용서하고 그들에게 너그러움을 베풉니까.! 이런식으로 말하는게 우리인데.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시며 우리를 건지신분이 예수님이시고. 우리를 주님의 은혜로 이곳에 불러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에는. 역전과 반전이. 항상 숨겨져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의 눈의 문제와도 직결됩니다. 절망 가운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떡을 떼어줬을대. 그들은 눈이 띄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눈이 밝으면 온몸이 밝을 것이라 하셨는데. 여러분 눈이 밝다라는 것은. 이것저것 보는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뜻은,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하나님만을 통해서 바라본다는 뜻인것이죠. 근심과 걱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보는눈으로. 그 밝음의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우리의 눈을 열어주옵소서. 우리의 어두워진 눈으로는 어떤 능력도 파멸이라는 것을 알게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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