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4편

새벽기도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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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 세상에는 가해자가 많을까요? 피해자가 많을까요? 세상에는 가해자 보다는 피해자가 더 많습니다. 왜냐면 대부분 본인이 가해자라고 생각하지않기 때문에, 피해자가 훨씬많죠. 우리는 의외이지만 상처를 꾀 많이 좋아하죠. 누가 상처를 주면, 우리는 잘받습니다. 안받으면 되는데. 잘 받죠. 그리고 또, 상처를 주려고 하기만 해도 받죠. 아직 주지않았는데 주기전에 받고 상처를 계속 묵상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면 그에따른 반응은 뭐냐면? 첫째는 복수의 칼을 듭니다. 우리속에 있는 분노를 쏟아내는것이 칼을 드는거죠. 그런데 그런 칼을 들었을 때 우리가 이길수 있는가?하면 성경은 이길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길수 없을뿐더러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만큼이 안되는것이죠. 더 과도한 복수를 힙니다. 상대방의 눈을 뽑죠.
다양한 복수의 칼들이 있습니다. 뒤에서 이야기를 하는것부터 따돌림까지 여러종류가 있습니다. 여러분 기생충이라는 영화다 보셨겠지만, 마지막에 송강호가 이선균을 칼로찔러 죽이죠. 그 이유가 뭐죠? 계속 냄새난다2 계속듣다보니 그런거죠. 그런데 그 영화를 보면 송강호의 죄보다, 왠지 그에게 짠한 마음을 느끼게됩니다. 여러분 칼을 드는건 절대로 건강한 방식이 아니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의 저자도 복수를 이야기 하며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과격한 언어로, 우리가 흔히 잘 쓰지 않는 언어로 하나님께 감정를 토로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추어 주소서"
여러분, 복수라는 말은 사실 입에 우리가 잘 담지 않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언어에서도 복수라는 말을 떠올리기는 일은 흔하지않은데, 우리가 복수라는 말은 마음으로는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까지 복수하시는 하나님, 그것도 두 번이나 거듭해서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기는 사실상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얼마나 이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했기에. 얼마나 이 사람 인생에 원수 같은 자가 이 사람의 인생을 갈아먹고 있기에, 하나님 복수해 주십시오!2 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먼저 이 부분을 잘 생각해야 되는데, 하나님께 복수해 달라라고 하는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은 도리어 믿음이 좋다라고도 볼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수의 칼날을 맘속으로 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경우는, 이런, 자신의 인생을 갈아먹고, 괴롭게 하는 원수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내가 내 손으로 너를 반드시 복수하겠다. 생각하고 마음으로 깊이 상대방을 미워하겠죠. 그리고 이 복수를 반드시 내 손으로 이루어내겠다며. 내가 칼자루를 쥔체 자신의 마음속에 미움을, 분노를 채우고 살아갈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기자는 이 문제를 내가 해결하겠다. 내가 복수하겠다. 생각하지 않고. 또 복수를 계획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은 참 훌륭한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복수의 문제를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감정적인것까지 하나님께 맡길수 있는 것은 엄청난 믿음이지요. 우리의 내면을 보면 아직 하나님께 맡기지못한 나의 오랜 미움, 시기, 분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 내가 복수할 수 있을 만큼 힘을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하시는 하나님, 복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풀어주십시오! 이 문제를 맡겨드립니다!라고 칼자루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믿음있는 자의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하나님께 기대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붙들고 기대합니다. 그 성품이 어떻다고 이야기 합니까? 9절에서 10절입니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지금 이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이런 원수들을 반드시, 징벌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하나님이 이 원수를 징벌하실 거라고 확신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듣고 계시고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하나님은 알고 계시니까 반드시 징벌하실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귀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눈이 있을까요? 지금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보고. 하나님이 듣고.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근거를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보고 그 근거를 붙들고 있습니다. 이건 굉장히 탁월하고, 놀라운 발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지 않습니까? 인간을 보니깐,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이 시인은 깨달았습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도 그런 형상을 갖고 계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귀를 지으셨으니 하나님은 듣고 계실 것이고, 인간의 눈을 지으셨으니, 하나님은 보고 계실 것이고, 이해할 수 있는 머리를 지으셨으니,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실 것이다.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귀를 지으신 이가 저 악인이 저렇게 함부로 떠들고 있는 걸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실 것이고 인간의 눈을 지으신 이가 저 악한 사람이 하는 악행도 다 보고 계실 것이고 인간의 머리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도 저 인간이 악하다는 것은 다 알고 계실 것이다. 확신했던 것이죠.
여러분 이 시편기자의 기도는 복수로 부터 시작했습니다. 한 악인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도하다보니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까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에 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고 기도하다보면,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달아 가는것이죠. 사실은 원수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아뢰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깨닫게 되고, 나와 하나님과의 더 깊은 친밀한 관계까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기도는 이런 유익을 우리 인생에게 주는 것이죠. 내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했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성품까지 깨닫게 되는 놀라운 은혜.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이 새벽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숨겨진 성품까지,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것 까지 이해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숨겨진 성품을 깨닫고 난 시인은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는데 하나님의 소유된 나 자신을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시고 외면하지 아니하실 것이다. 나의 억울함과 나의 이 갈한 마음을 하나님이 반드시 해결하실 것이다. 그래서 내가 걱정하고 고민하고 있는 원수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갚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하지면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이유는 원수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수를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생하기 위해서 요셨습니다. 왜그럴까요? 그게 이땅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복수와 증오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릴길은 오직 사랑이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셨고. 보여주셨고, 희생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죽기위해서 오신 그분이 우리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식. 너희도 죽길바란다. 이런뜻이죠. 예수님은 우리를 희생자로 부르셨습니다. 희생자. 그러니 우리가 희생자가 됨으로 세상을 살리고. 그 살린 세상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나는 놀라운 신비로 살아가게 하신거죠. 아버지의 방식은 물론 쉽지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이미 받을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인 우리를 위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만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실만큼 위대한 사랑을 받은거죠. 그래서 그 사랑의 성품으로 우리는 복수를 내려두고. 사랑할수 있는겁니다.
나보다 약한사람을 예수님의 사랑받는사람으로 받아들일수 있고, 나보다 훨씬 잘난사람에게 열등감느끼지않고, 똑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그를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힘이 생기는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안에서 자유함과 부요함을 느끼게 되는겁니다.
이번 한주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성품을 더욱 알아가고, 그 성품을 더욱 닮아가는 우리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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