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3장

새벽기도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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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와 함께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나 살았도다.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기독교는 역설의 종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절망가운데서 희망을, 고난가운데서 구원을. 죽음가운데서, 부활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열왕기하1장 말씀을 보면나오는데. 아합의 아들 아하시아가 낙산 합병증으로 눕게 되었고, 오늘 3장에서 사망했습니다. 죽을때 후계자가 없었던거 같습니다. 아들이 없어서 형제 여호람이 왕이 됬습니다. 아마 동생일 확율이 높습니다. 근데 이 여호람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상당히 에메하고 안타깝습니다. 2절 3절을 잘보면, 읽음. 이게 나쁜건지 좋은건지 애매합니다. 그러나가 두번나오는데, 악을 행하였다. 그러나 바알을 주상을 깨뜨렸다. 그러나 죄의 길을 계속 걸었다.
반전이 두번있기때문에, 헷갈리지만, 이런것입니다. 반쯤은 순종하고 반쯤은 불순종했다. 상당히 애매한데 왜이렇게 애매한 형태가 나왔냐면, 여호람은 자신의 형이 어떻게죽었는지 알고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죽게되었기에 하나님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바알을 주상을 없앤것이죠. 그런데 동시에, 당시에 왕으로 등극해서 집권을 제대로 하려면, 당시에 이미 세력을 이루고 있는 보수적인 원로들. 수구세력들이죠.
그런 신하들의 눈치도 봐야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전통적인 정신도 버릴수가 없는것이죠. 지금 5대째내려오는 게 초대왕인 여로보암의 길인것입니다. 사실 여러보암의 길은 이미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화로 자리잡한 죄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형이 죽은이유, 하나님의 눈치도 봐야하고, 동시에 바알숭배문화의 눈치도 봄으로. 이 둘사이에 마치 신앙의 회색지대를 살아가게 된것입니다.
신앙의 회색지대를 가게된 여러보암의 길이란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에 이스라엘 12지파중에 10지파를 때어주셨죠. 그렇게 북이스라엘이 형성되게 되는데 그 강대한 북이스라엘에게 약점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성전이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초대왕 여로보암은 어떤 불안함에 두려웠냐면. 백성들이 매년 세번씩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하는데 그때마다. 이스라엘 성전에 갔다가. 왜 우리동네는 이런거 없냐고 마음을 빼앗길까봐. 그래서 북이스라엘에 대한 충성심이 떨어질까봐. 두려웠던 것이죠. 그래서 백성들을 놓치지않기 위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야 했던것입니다.
마음을 훔치려하니까 꼼수가 생긴것이고. 그 꼼수가 무엇입니까? 여기도 예배의 처소를 만들자 인 것이였습니다. 남쪽 보다 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성결과 거룩을 요구하는 빡빡한 하나님 대신에 축복과 부요함을 약속하는 하나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여러보함의 달콤한 말로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던 것이죠. 달콤한 말에 넘어가는게 어리석어보이지만, 백성들의 욕구와 그 욕구를 충족시켜줄만한 말이 합쳐져서. 쉽게 넘어가게 되었고. 바알숭배 하나님의 이상한 문화가 형성된것이였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백성이라면, 다 떠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옳은것을 행하겠다는 단호만 마음이 있어야되죠. 물론 자기 확신에만 차서 잘못가는것은 위험하지만,
정말 하나님 앞에서 무릎꿇고 받은 확신이라면 그길을 단호하게 가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모으려고 하지 않아도, 그 결단에 합한 사람을 모으셔서. 수만의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라. 천명이라도 정예군을 주시는것이죠.
세상은 숫자로 바껴왔던게 아니잖아요? 한명으로도 바뀌는것이 세상인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정직한 믿음보다. 현실이라고하는 두려움에 삼켜져서. 이상한 문화를 만들고. 또 오늘 말씀보면 여호람이 어떤 대외정책을 펴게 됩니까?
5절에 보면 모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했다고 하는데, 당시 속국인 모압이 상당한 공물을 마치고 있었는데, 그들이 등을 돌리고 자신들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자. 경제가 실추될것에 두려웠고. 그의 명예가 망가질까봐 두려웠습니다. 그 두려움이. 모압응징 정책을 펴게됩니다. 연합군으로 응징하러 가게된것이죠.
그런데 연합군으로 같이 가게된 남쪽에 여호사밧이라는 인물은, 많은 왕들중에서도 신앙 개혁적인 인물들 몇 사람중에 한명으로 꼽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남유다의 기본을 반바알로 잡은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신실한 사람이 왜 북이스라엘을 따르고 같이 사업도하고, 별다른 힘을 내지못했느냐면,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 하는것은 당시의 남유자의 전력이 북이스라엘의 속국정도였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힘이 없어서 시키는데로 했던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은 신앙개혁운동을 포기하지않았습니다. 그리고 역대하 19장을 보면, 그의 신앙개혁운동이 남유다를 넘어 북이스라엘 에브라임산지까지 넓혀지는데, 아마도 신앙개혁운동이 문제없지 진행되길 바래서 순수히 여호람의 의견에 따랏을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여호사밧이 전쟁에 동참하면서 북이스라엘에게 제안을 합니다. 모압의 뒷길로 가자고. 모압으로 바로들어가면 방비가 강하니까. 뒤로가자. 그리고 에돔도 함께해서 속전속결로 끝내자고 하는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만반의 준비가 되고 곧 승리를 얻을거 같았습니다. 그런데 뭔가 해볼만 하면, 또 뭔가 일이 될거 같을데 의외의 복병이 생기는데. 9절과 10절입니다.
여러분 의외의 복병이 우리의 근간, 우리의 계획을 흔드는 고난이 될수있지만, 이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그간 나를 이끌어온 힘이 무엇이었던가를 다시금 정확하게 분별할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로 자만. 하게 하는 환경은 우리를 아주 무감각하게 만들죠. 그리고 고난으로 그 자만을 돌이키는 기회가 되기도합니다. 그런데 여호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위기가 닥치니까 도리어 하나님께 책임을 돌립니다. 이상하죠. 여러분 여호람은 하나님께 묻지않고 시작했다가, 문제가 생기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위기와 고난으로 무너지는게 아니라, 여호람과 우리속에 있는 자만과 좌절로 무너지게 된것이죠. 여러분 우리가 자만과 좌절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나를 자만하게끔 하는 환경보다 더큰 현실이 있어야 하고, 나를 좌절시키는 문제보다. 더큰 존재가 있어야 하죠.그런사람이 자만과 좌절에 빠지지않을수 있고. 그런사람이 오늘 여호사밧이였습니다.
12절에 보면, 읽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것입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자만할만한 환경. 좌절할만한 환경에 빠질수 있습니다. 오늘 지금도. 그런환경에 빠질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것에 좌절하지 않으려면 필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 이였던거죠.
알 듯이 고대는 신들의 전쟁이였기에, 선지자들이 동행했는데, 이때 동행한 선지자가 엘리사죠. 엘리사는 3명의 왕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고, 또 그가 지시한 거문고. 는 전쟁터에서 흐르게 됩니다. 여러분 전쟁터와 거문고는 너무나 안맞죠. 하지만 거문고가 전쟁터를 지배합니다. 저는 전쟁같은 우리의 삶을 지배할수 있는게 바로 찬양 이라고 고백됩니다. 우리가 찬양부를수 있는 환경이기에 찬양을 부르는 것이 아니죠. 찬양이 주시는 평안과 위로가 무엇인지 알기에 우리의 삶에 찬양을 초대. 하는것이죠.
여러분 이러한 말씀의 초대, 찬양의 초대로. 이들에게 물이 옵니다. 예배와 함께 물이 오게된것입니다. 예배와 함께 물이 오게 되지만, 우리는 물을 얻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면 안됩니다. 왜냐면 물을 얻기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물을 예배한 것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여러분 우리에게는 고난이라는 복병이 역설적이게도 필요합니다. 나는 물을 예배하는 사람이였는지, 말씀과 찬양이 나의 삶의 근간임을 고백하는 사람인지. 고백하는 시간인 것이죠. 그래서 이 고난이 내가 어떤 예배자였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는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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