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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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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9:19–23 NKRV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문화에 대한 이해

(영상)
대중문화의 유해성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너무 많이 경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음악, 영화, 드라마, 기타 영상, SNS 게시물, 웹툰 등등 수많은 매체들을 통해 성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지요. 사탄이 대중문화를 통해 인간의 정신세계를 잠식해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화 속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자신의 콘텐츠를 통해 “무엇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가?”, “세상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는가?”,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이것에 답하는데요, 대중문화는 이렇게 속삭입니다. “Money, Power, Sex가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이에 대해 비판하고 제한하는 기존의 질서가 문제이다. 기존의 질서로부터 자유로워져라!”
이런 비기독교적이고 심지어는 반기독교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지난 주일 세속적인 문화가 교회 안으로까지 새어 들어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을 나누었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매체들이나 콘텐츠들과는 담을 쌓은 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으며 세상과 고립된 채로 말입니다.
타락한 인간으로부터 타락한 문화가 발생합니다. 타락한 문화를 통해 더 많은 인간들이 더욱 빠르게 죄악에 물들어가는 것도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화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컨텐츠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수단이 되는 것들, 예를 들어서 TV나 책, 스마트폰과 테블릿을 향해 어떻게 악하다 하며 타락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컨텐츠를 담아내는 도구인 음악, 영상, 글, 그림을 향해서도 어떻게 악하다 하며 타락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타락한 것은 인간이며 그런 인간들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되기 때문에 대중문화가 악한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의 문제이지 문화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타락한 실상에 대해 끊임없이 지적하며 드러냅니다. 특히 로마서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지요.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람을 유대인과 헬라인과 이방인으로 구분을 하는데요, 이들 모두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며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모든 이가 죄인이며, 우상을 숭배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타락한 자라는 것이 성경이 선포하는 인간에 대한 분명한 진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며, 모든 인간은 그 내면에 하나님에 대한 타고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롬 2:14-15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러한 개념을 ‘일반 계시’이라고 하는데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게 되는 것과는 차이가 크지만, 그래도 모든 인간에게는 아주 일부분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진리가 늘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인간을 말할 때에는 두 가지를 함께 말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과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말입니다. 하나로 줄이면 인간은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인간 속에는 진리와 비진리가, 아름다움과 더러움이, 선함과 악함이 늘 뒤엉켜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인간이 완전히 타락한 게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이 선포하듯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남아있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희미한 진리가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일하심 덕분입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만물에 보여지고 알려졌다고 말하는데요, 여기 쓰인 동사의 헬라어는 둘다 현재형이며 수동태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동작이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수동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수동적인 의미입니다. 이것을 계속되는 의미를 살리고 또 능동태로 바꾸면 이렇게 문장을 쓸 수 있겠지요.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창조하신 만물에 분명히 보이시고 계시며, 알리시고 계신다.”
하나님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인간을 위해 일하시고 계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할 수 있도록, 인간의 문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과 성품을 반영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계시지요. 이것을 흔히 ‘일반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문화를 말할 때에도 두 가지를 함께 말해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들에 의해 타락한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들에 의해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반영한 문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문화 속에는 진리와 비진리, 아름다움과 더러움, 선함과 악함이 늘 혼재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팀 켈러 목사는 이런 인간과 문화의 이중성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문화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문화에 대한 기여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지 못하고, 세상의 문화와 담을 쌓고 고립된 채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다 넓은 문화 속에 은혜롭게 나누어 주신 지혜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비그리스도인들이 종종 도덕의 실천이나 지혜, 기술에 있어서 더 뛰어난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세상의 문화와 담을 쌓고 지내는 것은 문화에 대한 바른 관점이 아님에 분명합니다. 오히려 경계할 것은 경계하며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하나님이 사람들의 창작을 통해 나타내시는 진리, 아름다움, 선함과 같은 것들에 감사하며 누리는 것이 바로 문화에 대한 바른 관점입니다.
디모데전서 4:4–5 (NKRV)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음악, 영상, 글, 그림은 아무 문제가 없다. TV나 책, 스마트폰과 테블릿이 타락한 것이 아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선하게 사용하며 누리면 될 일이다. 문제는 그 안에 무슨 내용을 넣어두었는가이며, 분별이 필요한 것이다.

One Step More!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문화에 대해 바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해 경계할 것은 경계하며 비판할 것은 비판하되, 문화를 통해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전부라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말씀하고 계시지요. 이제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며 그 내용을 나눠보도록 합시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이 구절에 앞서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이자 사도이지만, 생계비를 지원받을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아무런 “보수”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무런 보수도 받지 못할지라도 그저 일하며 섬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자가 누구입니까? 종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가 지금껏 행한 모든 사역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서 행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섬긴 그 누구에게도 종이 되어서 섬겨야 할 빚이나 책임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에 빚진 자였기 때문에 스스로 자처하여 사람들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가 섬기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함이었고, 그리스도 예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이런 선한 소원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였다고 합니까? 20절부터 23절까지를 한 번 주목해봅시다. 고전 9:20-23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경의 기록들을 통해 동선을 그려보면 바울은 선교여행 동안 대략 2만km의 거리를 이동했을 것이라 여겨지는데, 이는 지구 둘레의 절반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거리입니다. 이토록 긴 여정 동안 바울은 분명 각양각색의 사람을 두루 만났는데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가 만난 사람들을 세 가지 부류로 구분합니다. 유대인, 율법 없는 자, 약한 자가 차례로 나오지요. 여기서 율법 없는 자는 유대인들과 대조되는 이방인들을 말하고, 약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뜻합니다.
바울은 지금 사람들을 복음으로 얻기 위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을 만났을 때에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이방인들을 만났을 때에는 이방인과 같이 되었고, 믿음이 약한 자를 만났을 때에는 믿음이 약한 자 같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요새 한류가 전세계에 열풍입니다. 한국인 같이 되기 원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는데요, 그들이 한국인 같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 한국인처럼 먹고, 한국인처럼 마시며, 한국인처럼 입고, 한국인처럼 말하려고 노력합니다. 즉, 한국인의 문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처음 접하는 문화 속에 분명 어색하고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지만, 한국인 같이 되기 원하여서 기꺼이 한국인의 문화에 동참합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을 만나면 유대인과 같이 되기 위해 유대인의 문화에 참여하고, 이방인을 만나면 이방인과 같이 되기 위해 이방인의 문화에 참여하며, 믿음이 약한 자를 만나면 믿음이 약한 자와 같이 되기 위해 그들 나름의 문화에 참여하였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복음으로 얻기 위해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이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드러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방의 문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문화라는 옷을 입고 전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분명히 어제나 오늘이나 앞으로도 변함이 없는 영원한 것입니다만, 결코 무시간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용서와 회복과 같은 것들이 복음의 내용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악에 빠진 모든 인간에게 복음을 전하시려 구체적인 시간과 구체적인 공간 속으로 임하셨습니다. 2000여 년 전, 로마 제국의 한 변방이었던 이스라엘로 임하셨지요.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으로 나셔서 당시 이스라엘의 문화를 배우고 경험하시며 자라나셨습니다. 농촌 문화였으며, 헤브라이즘 문화였고, 또한 헬레니즘 문화였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시 대중적이던 문화를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19세기 중국내지선교회의 창시자인 허드슨 테일러는 이러한 전도와 선교의 원칙을 깨달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의 중국인들처럼 머리를 길게 길러서 땋았으며, 현지인들이 입는 옷을 입고 그들이 먹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많은 동료 선교사들이 그를 조롱했지만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인과 같이 되기 위해 중국인의 문화에 참여하는 것을 고집하였지요. 허드슨 테일러는 점차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문화의 옷을 입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역의 결과 영적으로 황무지와도 같았던 중국 땅에서 놀라운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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