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6장

박솔
새벽기도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17 views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View more →

제가 결혼하고 느낀게 있는데, 즐거운일을 함께 나는 기쁨도 있지만, 힘든일을 같이 버티는 위로도 참 크다라고 생각이 됩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는 다는 말이있죠. 모든 사람과의 관계도 어려움을 겪고나면 훨씬 더 단단해지는 법입니다. 뜨겁게 사랑하다가, 그 사랑이 어떤 계기를 거쳐서 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그 위기가 시간을 거쳐, 슬기롭게 두 사람이 극복합니다.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하게 되면, 이후에 그 관계는 이전의 처음의 사랑보다 훨씬 더 깊어지고 훨씬 더 두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가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보통의 사람과의 관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 나오는,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관계도, 이제는 두 사람의 관계가 큰 위기를 거쳐서, 훨씬 더 깊어지고 단단해져 있음을,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은 서로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는지 예배당이지만 설레임을 느낄 정도로, 두 사람은 아주 깊은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꿈속에라도 사랑하는 신랑을 찾고 또 찾았던 술람미 여인은 그 꿈속의 사랑을 이제 현실로 이루고 난 이후에 그들은 이제 그만 위기를 겪게되죠. 5장에서. 왠지 모르지만, 차갑게 식어버린 여인의 마음 때문에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왕을 한순간 놓치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뜨겁게 사랑했던 그 마음으로, 다시 왕을 찾아 나섭니다. 신랑을 찾아나서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다가 신랑을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두 사람이 서로 다시 뜨겁게 만나는 장면이죠. 이제 여인은 신랑을 만나고 난 이후에 다시는 이 사람을 놓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잘 살펴보면, 여인의 사랑의 고백이 이전과는 훨씬 더 깊어져있고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여러분, 이 고백은 아가서 전체를 통해서 굉장히 중요한 분깃점이 되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이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고백을 2장에서 했기 때문입니다. 2장 16절을 찾아보겠습니다. 함께 읽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구나"
2장 16절과 6장 3절의 결정적인 차이가 뭘까요? 순서가, 바뀌어 있습니다. 2장 16절은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이 말을 먼저 하고 있으나 6장 3절은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는 말을 먼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고백이 서로 앞뒤가 바뀌어져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서로 바뀌어져 나타나고 있는 이 고백, 그러니까 이 여인은 사랑은, 서로 소유하는 관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사랑의 위기를 겪고 나서, 그 위기가 극복되고 난 이후에, 여인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다.
처음에 이 여인은 사랑을 자기가 소유하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자기가 소유하는 그 사람, 여러분 그 사랑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실제로 이 여인은, 자신의 꿈대로 결혼이라는 합법적인 관계를 통해서, 남자를 소유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어제 봤던것처럼, 여인은 사랑을 소유하게 되니, 왠지 모르게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그 사랑을 되찾으려고 다니며서 큰 위기를 겪고난 이후에. 여인은 다시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에 첫번째 사랑의 고백이 6장 3절의 고백입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여러분, 우리 신앙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처음에 우리가 신앙을 가질 때 나는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도 내가 나에게 속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보여주신게 많고, 내가 자랑 할만한 놀라운 일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나는 하나님과 좀 특별한 관계라고, 예수님도 내 마음대로 부리고 그래서 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내 인생의 욕구 충족의 도구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함부로 소유하고 생각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기도를 들어줘야만 하는 분으로 대하게 되죠.
하지만 사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불신앙인데, 이 단계를 거치고 넘어가고 이제 믿음이 성숙하게 되면 그 다음에 무슨 고백을 하게 되죠?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 나를 창조하시고 나는 하나님에게 속하였다고 이제 우리는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속했습니다. 라고 우리가 고백을 많이 하지만 이게 쉬운게 아닙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잘 따라다닌다고 여겼지만, 요한복음 16장의 베드로는, 주님이 수난예고를 할 때 그때 주님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결코 이런 일이 주님께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불같이 화를 내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사탄이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니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 말씀 앞에 여전히 베드로는 겸손하지 한체 자신의 확신에 차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다른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결단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고백하죠.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을 만났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같은 질문을 3번 반복하지않습니까?.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한다고 했죠. 근데, 세 번째 질문에 베드로가 근심합니다. 왜 근심합니까?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죽어도 안버릴거예요. 진짜 사랑하거든요.라고 말한 다음에 배신했한게 생각났기에 근심한거죠. 예전에도 진짜 주님을 사랑합니다. 버릴수 없습니다. 한게 진짜 백퍼센트거든요. 근데 지나고 나니 진짜 사랑한게 아니였어요. 그러니까 내 확신이 얼마나 믿을수 없는건지 알았기에, 이제 모든 앎의 근거를 갖지못한다는 깨닫고, 말하죠. 내 마음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을 하는거죠. 모든걸 아는 주님께서 대답도 하십니다.
우리는 어느쯤 서 있습니까? 믿음이 깊어질수록 신앙의 연수가 날이 가고 오래 될수록 우리는 스스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속하였다. 요한복음 15장에서도 예수님께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안에 내가 너 안에 있어야, 너는 열매를 많이 맺는 존재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 속해 있을 때, 여전히 행복한 자가 될 것이고,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함께 매여서, 내 생각도, 내 판단도, 나의 고백도, 주님께 메인 존재가 되는게, 우리의 신앙의 길입니다.
이런 여인의 고백을 듣고 이제 솔로몬 왕은 그녀를 그냥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안아주고 맞아줍니다. 8절과 9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습니다.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이 왕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여인이 자신의 변덕으로 말미암아 이슬을 맞고 문 밖에 서있는 왕을 박대하고 신랑을 문을 열어주지 않고 맞아주지 않았다 할지라도 신랑은 여전히 동산 가운데에서 양떼를 치고 있었고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온 여인에게 여전히 여인의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수많은 왕비와 후궁과 시녀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나에게 의미있는 이는 여전히 너 하나뿐이라고 사랑의 고백을 신랑은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변하지 않고 어디 가시지 않고 여전히 나와 함께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변덕스러워서 이곳으로 갔다가 저곳으로 갔다가 오늘은 여기를 기웃거리고 내일은 저기를 기웃거릴 뿐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떼를 치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동서남북을 헤매고 다니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전히 주님은 그 자리에 계셔서 수많은 백성들 가운데 오로지 나에게 의미있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랑의 고백이 이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신랑은 이전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너는 가시나무 가운데 피어있는 유일한 백합화라고 말했던것 처럼 오늘 여기에서도 여전히 나에게 의미있는 이는 너 하나뿐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디 가시지 않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돌아와보면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고 계시고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고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고백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신 하나님 앞에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주와 함께 동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