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

킹덤스토리 해설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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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용사 되셔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것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신실했는가 하는지에 이야기 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고 하나님은 이 신실하지 않은 백성들에게 또 다른 기적을 베푸셔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1. 하나님의 백성은 원망 대신 기도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의 백성은 원망 대신에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나서 두 달 반 정도가 지났습니다. 2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이 나옵니다. 3절에 왜 원망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는 내용이 충격적입니다. 애굽땅에서처럼 살지 못한 것을 가지고 원망합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할 때는 그래도 먹을 것이 있었는데 광야에 나오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당시 애굽은 노예들을 위해 비교적 풍족한 식량을 제공했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된 흔적 중에 피라미드를 짓는 노동자의 숙소에서 제빵 기구와 물고기 아가미와 뼈가 발견되기도 하고 피라미드 근처에서 가축의 뼈가 발견되었습니다. 고기가마 곁에 있다는 것은 과장이겠지만 노예로 있을 때 적어도 먹을 거리가 빈약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노예로 살더라도 이런 세상적인 풍요로움이 좋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2절을 살펴보면 이 원망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나온 원망은 히브리어 전치사 ‘알’과 연결되어서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대항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2절에 나온 회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상에서 그 어원이 선택하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특별한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이 공동체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스데반도 사도행전 7장 38절에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교회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역사를 통해서 이런 교회 공동체를 만드셨는데 먹을 것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키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이 출애굽을 한지 두 달 반밖에 안되었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애굽의 우상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을 억압하던 체계를 무너뜨리고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이 복음을 두 달 반 만에 잊어버렸습니다. 두 달 반이라는 이 시간 동안 복음이 먹을거리만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을 경험하기 전에 노예로 살면서 세상적인 풍요를 누리는 것이 더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음에 이상한 말을 섞어 복음을 혼탁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인데, 3절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내서 온 회중이 주려서 죽게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도 아닐뿐더러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가축들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실은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가축의 고기나 우유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가 가진 가축이 아까웠는지, 아니면 그걸 아껴서 가나안 땅에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절체절명의 위기정돈 아니었습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풍족하지 않은 생활을 해야 하고 광야라는 불편한 환경에 계속해서 노출되다보니 구원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어느 복음의 가치를 세상적인 가치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키는 상황에까지 갔습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고작 애굽의 고기가마와 떡을 배불리 먹는 것보다 못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던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불행해졌다고 하고 하나님께 왜 구원했냐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적용) 사실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이런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믿고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삶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저렇게 고기가마 곁에 있고 떡을 배불리 먹는데 나는 왜 광야 생활을 하며 하나님이 가라는 대로 하나님이 멈추는 대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죄인의 본성입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은혜를 자꾸 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보다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 때, 세상의 삶의 방식이 좋아 보일 때 복음을 묵상해야 합니다. 내가 교회라는 특별하고 선택받은 공동체에 소속되어서 구원 받은 이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 가운데 죄에 얽매여서 복음의 비밀을 모른채 아무런 소망 없이 심판만 기다리며 사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생각해야 하빈다. 우리가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복음을 생각하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광야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교회의 성도는 다 광야 같이 살아갑니다. 스데반이 말했듯이 광야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삶을 살면 당연히 불편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럴 때 원망의 언어가 기도의 언어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우리가 교회에 소속된 것과 신자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원망하지 않고 무엇이 부족한지 불편한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 되길 바랍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가 구원 받아서 불행한건지 당장의 필요가 없어서 불편한 것인지 잘 생각해서 기도로 풀어내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언어는 원망이 아니라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은 백성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은 그 백성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부정하고 세상이 더 좋았더라 이렇게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책망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참으셨습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가 뭔가 열심히 일을 했을 때 그것을 가지고 혹평을 하고 사실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일 괜히 했다고 하면 힘이 빠지거나 화가 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우리를 왜 구원하셨습니까? 그냥 노예로 살게 내버려두지 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것을 참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한 번 더 보여주셨습니다. 백성들이 원하는 필요를 채워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라는 특별한 음식과 메추라기로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이전에 애굽에서 떡을 배불리 먹은 것을 그리워했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그리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광야에서 만나라는 떡을 내리시고 메추라기를 통해 광야를 고기가마처럼 만드셨습니다.
만나는 광야 생활하던 시기에만 먹은 특별한 음식인데 만나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만나는 첫 번째로 초자연적인 음식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만나를 자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했습니다. 깍지 진디나 식물 기생충들이 작은 능수버들이나 관목의 수액을 먹고 가지에 분비물을 남기는데 이것이 아마 만나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처럼 양식을 내려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만약 진디의 분비물이라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전에 이 만나를 계속 먹었을 텐데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 만나는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역사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음식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초자연적인 떡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육신의 필요로 만나를 필요로 했지만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만나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하늘의 떡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만나는 매일 거두어야 합니다. 산더미처럼 내려주셔가지고 그걸 갖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필요한 만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 땅에서 대박을 터뜨려서 소유를 왕창 가지고 그 소유가 주는 평안을 누리며 사는 백성이 아닙니다. 모든 소유의 참 소유자 되신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매일의 삶 가운데 그 날 그 날 하나님께서 채워주심을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계좌에 잔고가 많지 않아도 평생 불로소득으로 살 수 있는 부동산이 없어도 만유의 주인 되신 분이 필요한 만큼 채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서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기도문은 그 주제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백성들은 매일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매일 채워주시니까 이 땅이 마치 하나님의 나라와도 같습니다. 민수기 11장 7절에 이 만나를 진주 같다고 합니다. 여기 나오는 진주는 창세기 2장 12절에 나오는 베델리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비손이라는 강이 둘러싼 땅에 있는 보석입니다. 베델리엄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단어가 아닙니다. 딱 두 번 나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베델리엄 그리고 광야에 내린 만나를 표현할 때 성경에 딱 두 번 나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모세가 창세기부터 신명기를 다 쓰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보기에 하나님께서 광야에 만나를 내리실 때 마치 광야 한 가운데 베델리엄이 깔리면서 마치 이 광야가 하나님의 은혜로 에덴동산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는 듯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의 필요를 매일 매일 채워주시니까 마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것처럼, 에덴동산을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 하시고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일들이 있고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 받은 후 논 게 아니라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 그 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울 사명을 받은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룰 사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우리가 풍족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통장 잔고가 부족할 수 있고 전세에 살 수도 있습니다. 내 명의의 건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손에 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땅에 파송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되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수 밖에 없습니다. 이미 하늘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나머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갈 때 필요한 것은 당연히 아끼지 않고 채워주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일시불이 아니라 할부로 채워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시불로 채워주시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든 것을 믿을 것입니다. 나는 안 그럴텐데 그냥 많이 왕창 주시면 내가 알아서 잘 쓸텐데 이런 생각이 들지만 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는 생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많은 물질이 들어오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물질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자가 천국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필요한 것을 공급받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불편해 보이지만 이렇게 살아가는 삶은 마치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광야에 깔린 베델리엄 같이 생긴 만나 때문에 광야가 마치 에덴동산처럼 보이듯이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채워주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는 곳에, 우리의 기도가 있는 곳이 마치 하나님의 나라처럼되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갑니다. 가정에서 필요한 걸 채워주셔서, 직장에서 필요한 게 생겨서 가는 곳 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나는 광야를 가고 있는데 베델리엄 같은 광야가 내려서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3. 하나님 나라 백성은 말씀대로 순종한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은 말씀대로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것에 불평하던 백성들에게 왜 먹을 것을 채워주셨는가 하는 목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순종하는 백성으로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매일 양식을 내리는데, 여섯째 날에는 갑절로 거두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원래 이 만나라는 음식은 하루가 지나면 썩는 음식이라 매일 거두어야 하지만 여섯째 날에 거둔 것은 그다음 날도 썩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안식일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처소에서 나오지 않고 쉬게 됩니다.
만나를 내려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매일 거두되 6일 째에는 두 배를 거둬 안식일에는 쉬도록 하는 것입니다. 6일 째 두배를 거둬서 7일째 쉬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면 하기 힘든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습니까? 애굽 땅에서 노예로 노동하면서 살 때 일주일 내도록 일했을 것입니다. 안식일 같은 것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손을 움직여서 노동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먹을 것은 자신의 힘으로 노동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갈 사명을 감당할 뿐입니다. 이 사명이 있는 이상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십니다.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하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분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훈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여섯째 날에 만나를 두배로 거두게 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게 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볼 때 울컥했습니다. 이 때까지 이스라엘이 쉬라는 명령을 들어본 적이 있겠습니까? 바로 왕 밑에 있을 때는 바로가 극한의 극한까지 몰아넣어서 노동력을 쥐어짜고 모세가 심기를 건드리자 노동의 강도를 더 올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백성을 명령하셔서 쉬게하셨습니다. 그냥 쉬게 하신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안식일을 허락하셔서 이 날에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부터 순종하는 훈련을 시켜서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문제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적용) 우리도 순종을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칠일 내내 자신의 힘을 쥐어짜야 살아갈 수 있는 백성이 아니듯이 우리도 우리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게 굴복해서 나의 노동력을 쥐어짜서 갖다 바치는 삶을 사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겉보기엔 불신자와 같이 세상 일을 하며 먹고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일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 나갑니다. 이 사명 감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필요한 것 다 줄테니 그렇게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세상 가운데서 의롭게 선하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알고 보면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예민해있습니다. 오죽하면 몇 년 전에 먹고사니즘이라는 신조어도 생겼습니다. 리얼리즘도 아니고 로맨티시즘도 아니고 모더니즘도 아니고 페미니즘도 아니고 먹고사니즘입니다. 먹고 살고 보자는 주의입니다. 중고등부 아이들이 학교 성적과 모의고사 성적에 예민한 것도 이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적이 잘 나와서 목표한 학교에 들어가지 않으면 취업에 문제가 생기고 성인이 되었을 때 제대로 독립하지 못할 것을 염려합니다. 청년들도 그렇습니다. 학점을 잘 관리하고 자격증과 공모전 같은 것을 잘 준비해야 소위 말하는 ‘밥 값’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에 예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주일이 유혹이 됩니다. 교회를 통해 안식을 얻지 못하면 자신이 이루고 있는 일로 안식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다가는 먹고사는 문제에 타격이 온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 순간 세상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인 분들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실 거다. 나도 너희처럼 말씀 따라 살고 주일 다 지키며 살면 못 먹고 살까봐 걱정 많이 했는데 결국 하나님이 채워주셔서 이렇게 너희들 잘 키울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며 살자”하고 위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이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 믿고 먹고사는 문제가 걸려도 주일 지키고 말씀 지키며 살지 않으셨습니까? 여기 계신 신앙의 선배분들이 살아오신 삶으로 우리 다음 세대를 위로할 때 우리 다음 세대가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것 믿고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다음 세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이 없어서 원망의 마음이 생길 때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필요한 만큼 공급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이 필요를 공급하시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다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남은 한 주도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께 원망대신 필요를 구하며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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