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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된다는 것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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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된다는 것 (요 17:20-26)
행복합시다..! 아멘,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하나가 된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늘을 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쉽게 말해 비행기타는 것이 무섭습니다. 그 큰 것이, 사람을 태우고 뜨는 것 자체가 무섭습니다. “잘 날다가 떨어지면 어떻하지..?” 늘 비행기를 보면 그런 생각을 자주 하곤 합니다.
얼마전, 뉴스에서 보니까, 대한항공 비행기가 터키에서 인천공항으로 이륙 2시간도 못되어서 엔진 이상으로 비상착륙을 했다는 기사를 보고, 더더욱이나 긴장이 됩니다 하..곧 저희 중고등부 수련회로 제주도를 가는데, 사실 좀 무섭습니다. 비행기 타는 건 항상 무섭습니다.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닌데, 아무튼 기도 많이 해주십시오..
그 기사를 보니까, 사람들이 대부분 비행기 안에서 그 공포의 2시간 동안 유서를 썼답니다. 가족들끼리 탄 사람들은 손을 잡고 기도를 했답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에 가장 해야 될 말, 꼭 하고 싶었던 말들을 하곤 합니다. 그 대부분의 말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그동안 미안했다. 정말 사랑한다..’입니다...
여러분 만약 오늘이 우리 생애의 마지막 날이라면, 과연 우리는 누구에게 또 어떤 말을 남기겠습니까? 먼저 살아있는 남은 가족들에게,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참 미안했다. 최선을 다해보려 했는데, 부족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랑한다. 고맙다라는 말..하지 않겠습니까? (“다..너 때문이었다. 이 왠수야..”라고 말하는 분들은 거의 못본 것 같습니다.)
자 어쨌듯,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직전에 앞두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남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당부,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기도에 마치 마지막 당부, 유언과도 같은. 즉 그들에게 꼭 있어야 할 것들에 대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하시기전에 요한복음 13장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기 전, 친히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친히 모범을 보여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14-15절에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요한복음 15장으로 와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다, 그러므로 마치 가지가 나무에 붙어서 열매를 맺듯이 너희도 나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나의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열매를 맺을 것이다..라고 말씀 하신 후에,
다시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다시 15장 12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그래서 이것으로 우리가 알게되는 바,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하는 것, 그 목적은 그분의 계명,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안에 거할 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 그 계명을 지킬 수 있다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ppt)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이 사람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주목해보면, “나를 보내신 것..”
“보내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단순히 보내는 것이 아닌, “파견하다..”라는 원어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목적이 있어서 보냄을 받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분명한 목적과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가 새생명을 얻는, 즉 조건없는 구원의 선물을 주심을 위해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라고 말하기엔 부족합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다시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ppt)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렸으며, 앞으로도 알리겠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구원의 의미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 임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우리 안에 있게 하려는 것..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좀 되십니까?
“예수님께 임한 그 사랑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게 하려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요, 그분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바로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 어떻게 우리 안에 있게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너희가 하나됨에 달려있다. 무엇으로 하나될 것인가? 내게 임한 그 아버지의 사랑이 동일하게 너희 속에 있어 너희가 그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벌써 결론에 이르러서 설교를 끝내야 할 것 같은데,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예수를 믿는 자들은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다..이러한 교리를 모르는 성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는 것하고,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껏 말씀을 좀 정리해보자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 상에서 죽음을 맞이하시기 전, 남아있는 제자들에게, 마치 유언과도 같은 중요한 당부 그것이 곧 기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 저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된다는 것일까?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하나가 된다.? one team, 마치 스포츠 경기를 하는 어떠한 팀의 팀워크, 직장 내의 같은 부서 그러한 유기적이고 탁월한 팀워크를 말하는 것일까..? 예 물론 그러한 요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하나됨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계신가? 성경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계신가..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서 23절 (PPT)을 잘 살펴보면, 먼저로는 밑줄친 문장을 보아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하나됨을 얼마나 강조하시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PPT)
21절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또 22절에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
또 23절에,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보시면, 바로 이러한 문장이 우리 눈에 들어옵니다. 자주 자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강조)
또 21절에 “우리 안에..”라는 말, 22절에 바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이를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됨을 말씀하실 때, 우리, 즉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와 비교하여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사용하는 그 이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세례를 받는 것, 바로
일한 하나의 본질을 지니신 한 하나님이 삼위,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삶 공부를 통해 삼위일체에 대해 공부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직 못하신 분들도 계실 것 같아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좀 하겠습니다.
우리 먼저 마가복음 1장 10-1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예수께서 물 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먼저 본문에 성자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때, 또 하나의 위격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예수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바로 이 본문으로써, 삼위의 하나님께서 동시에 나타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머리가 세 개 달린 하나님이 아니구요, 한 하나님이 세 개로 쪼개져서 부분을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창조를 하시고 성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은 오늘날 우리 안에 계신다. 이처럼, 이 세분을 어떤 사역의 의미로 구분지을 수 있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이 세분은 언제나, 언제나 “동일한 본질, 하나의 본질 안에 세 위격으로” 항상 함께 연합해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 각각이 완벽히 개별성을 띄지만 그 세 위격의 하나님이 곧 동일한, 단순한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심으로, 완벽한 연합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표정들이..안좋으신데,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본질의 한 하나님한 의지, 한 사랑, 한 행동을 하시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요점입니다. 사실 한번에 잘 이해가 안되지요?
이것은 사실은 인간의 측면에서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 세 위격의 하나님께서는요 갈등, 차별, 분리가 없습니다. 쉽게 비교해부자면, 베드로, 요한, 야고보 이 세 사람은 각각이 다른 사람들이라, 기질, 속성이 다르기에, 갈등이 있을 수 있고, 분리가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이와 비교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 세 위격의 하나님은 그냥 “하나”이십니다. 어떠한 차이로 구분지을 수 없고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한 의지, 한 사랑, 한 행동으로 함께 완벽한 연합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성부라고 해서 성자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들의 언어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 성자는 성부에서 나셨다라고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성자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영원하신 성부와 동일한 하나님 이십니다. 성령은 바로 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십니다. (바로 예수께서 내가 떠나가면 보혜사를 보내시리니..라는 말이 그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 역시 영원하신 동일한 하나님 이십니다.
즉 크고 작음, 먼저되고 나중 됨이 전혀 없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지혜는 동일하고 동등합니다. 그저 처음부터 영원히 함께 계신 분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의 본질이신 유일한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본질을 공유한 세 위격이 계시다.
그렇다면, 이 삼위일체를 아는 것이 오늘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지? 그거 신학생들이나 배우는거 아니야?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항상 이것을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늘 의문을 지니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신비를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유익은, 즉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인격적이신 하나님”에 대해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2번 강조)
과거에 흔히 옛날 사역자들이 이런 말들을 쉽게 들 하곤 했습니다. 참, 낯부끄러운 말입니다만... 마치 자신이 자신이 예수님이라도 되는 마냥, 손을 들고 던지면서, “성령 받아라..” 마치 자신이 무엇을 부리듯이 말입니다. 예수님도 안그러셨을 것입니다.
(저 예전에 청년때, 조그만 방에서 갑자기 함께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누가 “FIRE..!”라고 막 소리를 지르는 것이에요, 난 또 어디 불난줄 알고..그래서 기도하다 놀래가꼬 눈을 뜨고 쳐다보니까..어떤 형님이..영어로 “FIRE..!! 막 소리를 지르는 것이에요..” 양손을 막 쳐들과 한국어도 아니고 막 영어로..fIRE!! 하는 것이에요..) 참..
그러던 형님이 어느날 교회에 대해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나드라구요..참..FIRE를 찾으러 갔는지..
여러분 이러한 잘못된 성령론이, 이것이 성령의 인격성, 즉 하나님의 인격성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시키는 말인지 그들은 안타깝게도 무지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4장 32절에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말씀 없이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의 모든 순서를 통해 말씀을 듣고, 성례를 행하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배의 모든 순서가 그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찬양만으로 은혜를 받는다? 말씀이 없이 성례가 없이 은혜를 받는다? 회개 없이 은혜를 받는다? 그 모든 것이 다 사이비입니다. 분명하게 말하는데, 가짜입니다. 성령은 절대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 이시기에 “힘과 능력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에너지 따위가 아닙니다.” (그런 에너지는 귀신도 흉내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 그 “한 본질 안에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홀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의 죄 씻음과 거룩함을 추구하게끔 인도하십니다.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은사나 힘, 에너지가 아닙니다. 그것이 열매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그것이 본질이 아닌 것입니다.
자꾸 성령 하나님을 어떤 개별적인 사역, 즉 능력과 힘으로, 에너지로 비인격적으로 다루니까, 이상한 신학 사상들이 나오고 이단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이십니다.
이 삼위일체의 관계만 제대로 묵상해도 우리가 하나님이 얼마나 인격적이신 분이실까..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영원히 한 본질의 하나님으로 함께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1) 제 요지는 이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역시도 철저한 ‘관계성’, ‘관계 가운데’ 계심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바로 그 분의 ‘인격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자주 자주 강조하시는 것,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다? 바로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한번은 김태훈 집사님께서, 제가 예배를 마칠 무렵 나가면서 인사를 드렸더니, ‘특유의 그 호탕함으로, 허허허, 전도사님, 하시면서 악수를 청하시는 것입니다.’
참 기분이 감사하고 좋더랍니다. 그분이 그냥 한창 나이도 어린 전도사인 저를 인격적으로 대우해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저 역시 더 성도분들을 소중히, 귀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디 집사님 뿐이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누군가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것은 곧 우리 역시 그 대상에게 깊은 감사와 존중으로 바로 인격적으로 대우할 수 있는 은혜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서를 읽다보면, 이 삼위의 하나님께서 얼마나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시는 지를 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묻고,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라고 말입니다.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과 존중의 그러한 관계성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2) 더 나아가,

세 위격의 하나님이 완벽한 연합으로, 인격적은 관계 가운데 영원히 함께 하신다는 것은 곧 그 본질을 공유하신다, 즉 본질이 서로 같으시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예수님 생각하면 ‘아..모든 것을 용납하시는 분,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신분..’으로만 생각하고 그분을 인간적인, 심리적인 그런 존재로 치우쳐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분명히 말하건데,
여러분, 예수님처럼 ‘지옥’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신 분이 성경에 없습니다. 그분처럼 율법을 많이 말씀하신 분이 없습니다.
또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탄식하고 계신다..? 그것은 곧 성령이 성부 하나님과 같이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게 죄를 싫어하시는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 분이 다 죄를 혐오하시고, 그것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의 해결책을 동일하게 쥐고 계신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 삼위의 하나님께서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이 세 위격의 하나님이 하나의 본질을 영원히 공유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하나님은 이러쿵, 신약의 예수님은 이러쿵, 성령은 이러쿵..이라고 절대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한 무신론자가 어느날 구약 성경을 읽다 이렇게 말합니다. “뭐 이렇게 더러운 책이 다 있냐..근친상간에 애를 낳지 않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하지 않나..남의 여자를 가로챈것도 모자라서 남편까지 죽이질 않나, 뭐 이래?”
과연 우리가 구약의 나타나신 그 하나님을 무지막지한, 자신의 백성의 죄를 질책하시고 때리기만 하시는 그런 폭군과도 같은 하나님으로 오해해도 되는 것입니까?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변론합니다. 신명기 1장 31-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ppt)
“또한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돌보는 것과 같이, 당신들이 이 곳에 이를 때까지 걸어온 모든 길에서 줄곧 당신들을 돌보아 주시는 것을, 광야에서 직접 보았소. 그런데도 당신들은 아직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마치 아들을 돌보는 것과 같이, 개역개정에서는 더 멋진 표현으로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따뜻하고,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는 아버지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셨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힘드셨어요, 오죽했으면, 이사야서 말씀 그대로, ‘제발 이제 지겹다. 그 마음에도 없는 짐승 그만좀 잡아라. 역겹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너희가 나에 대해서 좀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죄인의 본능으로 사는 인간들을 끊임없이 용서하고 함께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껬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그래서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삼위의 하나님이 하나의 본질을 공유하신다..라는 것은 바로 이와같이 우리에게 큰 깨닳음을 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하다 조금 멀리 돌아온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삼위일체에 대해 오랜 시간을 강론하였을까, 21절에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바로 오늘 본문이 우리라는 존재에 대해 말씀하실 때, 우리의 하나됨이라는 것에 대해 말씀하실 때, 바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한 관계성, 그 인격적인 관계가운데 거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함인가? 에 대한 고찰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 17장 23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 완전하다, 즉 완성되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그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온전한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그 온전한 하나됨을 통해 세상이 우리의 존재에 대해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다라는 것, 그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우리가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당연히 완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열매를 맺는다, 너희 스스로는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 주님 나 하나 살기도 벅찹니다. 또 누굴 섬기라고 하는것입니까? 누굴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때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분의 친구이자 그분의 종입니다.
종은 주인의 음성을 청종해야 될 줄 믿습니다. 아멘입니까? 20절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이유..”에 대해 명확하게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ppt)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 사랑이 우리에게 베풀어진 것은 절대 나 혼자 만의 누림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누군가가 복음을 듣고 그분을 믿게 하려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순전히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그분의 참된 자녀일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는 바, 만약 우리가 복음을 바르게 깨닳았다면, 우리 멋대로 사는 삶, 나만을 위한 제 멋대로의 이기적인 삶을 살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죄송하지만, 본래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반드시 이타적인 삶으로 흐르게 되어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바르게 깨닳았다면 말입니다..누군가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섬김의 마음이 생길 것이고, 무엇이라도 나누고픈,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애타는 마음들이 우리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깨닳았다면..아멘입니까?
그래서 목사님께서, “사랑은 동사다, 참 사랑은 섬김의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1절에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아멘.
삼위일체의 그 인격적인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음으로, 세상이 예수님을 알게 해주십시오. 이 세상이 예수님을 믿게 하옵소서..바로 우리의 기도가 이와 같아야 될줄 믿습니다. 아멘.
결론맺자면,
그리스도인의 하나됨은 무엇인가? 어떻게 가능한가?
먼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그것은 곧 “삼위일체로 관계맺으시는 그 인격적인 하나님을 바르게 깨닫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온전히 적용될 때, 우리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연합하는 복음으로 하나되는, 사랑으로 하나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랍기는 이 빛나는 교회가, 참으로 한 성도 한 성도를 인격적으로 대하며 사랑으로 품어나가는 사랑의 지체들로 하나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말씀을 맺으려합니다.
주님이 왜 그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제자로 살아가다보면, 반드시 핍박을 받을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기에..내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다..”
“너희가 마치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너희도 서로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며 사랑으로 하나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힘,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교회 공동체에 있어야 함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교회의 존재목적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본질을 회복할 때, 세상이 우리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으로 서로 하나되는 것, 바로 이 본질을 회복할 때 말입니다.
이번주 분가식 때, 참 많이들 우시더라구요, 그래서 목사님께서 ‘아 저 눈물의 의미가 무엇일까..’참 궁금하다 그러셨는데, 저도 참 궁금하더라구요.
그러면서 한번 생각해보았는데, 제 딴에는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아..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자신 없는데..”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 아닐까..그 두렵고 떨림이 감격과 눈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싶습니다.
“주님 사실 정말 자신 없는데, 순종해 봅니다, 제가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능력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에 주님이 기쁘시다면 저도 기쁘기에 그저 순종해봅니다..” 아멘..너무 감격스러운 헌신들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신다라는 것, 즉 하나님의 그 인격적인 사랑의 총체적 그 행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바 되었습니다.
이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 방법이 없으셔서, 능력이 없어서 성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까?
바로 예수를 통해, 우리 인간을 이해하신 것이고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죄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스스로는 어찌해 볼 수 그 딜레마를 해결하시기 위한 그분의 인격적인 선택인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선택을 받은 자들이고 그 놀라운 은혜를 입은자들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너무나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순종의 주님을 닮아, 더욱 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서로 사랑의 띠로 하나되는 제자 공동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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