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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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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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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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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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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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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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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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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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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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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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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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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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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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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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2교구 새벽예배 시간을 통해서 십자가의 복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제는 참신앙과 거짓신앙 사이의 영적 전쟁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가 율법주의 신앙을 버리고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 오직 성령, 오직 믿음으로 사는 참 신앙으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8단원 2과의 내용을 토대로 참신앙과 거짓 신앙체계의 특징과 그 의미를 살펴보며, 우리 신앙이 가야할 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코로나 팬더믹 이후 한국교회의 심각한 침체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우리는 교회 회복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 회복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교회로 다시 나오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 회복의 열매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교회 회복은 아닙니다.
교회 회복은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진정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가 회복되는 일들을 말합니다.
반대로, 교회가 아무리 성장하고 있고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고 있다고 해도 교회 안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어떠한 하나님의 생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 움직여야 하는 교회가 실상은 죽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심각한 것은 교회가 거짓 신앙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처참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잘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도 실은 극심한 침체로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 참신앙과 거짓신앙 체계의 특징들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 중 몇가지를 오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율법주의 신앙에는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에 온전히 서있지 않으면, 진정한 성령의 역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인식하며, 교회 회복을 외치고, 작정기도를 하고 아무리 애쓴다고 하더라도,
만약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에 온전히 서있지 않으면 진정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에 온전히 서있지 못한다는 말은 거짓신앙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주의 신앙과 참 신앙 사이의 중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육신을 조금만 의지해도 그것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40일 금식 작정기도를 드리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이정도로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 이제 좀 우리를 회복시켜주겠지 라고 생각하는 율법주의 신앙 가운데 빠져있으면 하나님의 진정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삶을 보면서 이를 잘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종교적인 헌신이 뛰어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성령의 역사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의 복음의 터 위에 있는 교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역사는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는 율법주의 신앙, 거짓 신앙에는 함께 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기 위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내가 이렇게 철저히 율법을 지키고, 열심히 헌신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지지하시고, 내 삶이 평탄하겠지 라는 식의 율법주의 신앙에 심각하게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과 외부적인 순종에는 힘을 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겉모습은 경건해보일지 모르나 그들의 속은 탐심과 방탕이 가득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최근 선교적 교회에 대해 배우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전시 백성으로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착한 행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외적인 순종을 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우리가 율법의 목적을 나누면서 순서가 중요한 것을 나누었습니다.
가장 먼저가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내 스스로가 얼마나 죄 가운데 있는지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렇게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자가 십자가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러한 순서에서는 내가 어떻게든 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노력이 빠집니다.
내가 안간힘 쓴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저 주님께로 나아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내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하시겠지’라며 방관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안되니까 내가 하는 노력을 그치고 애통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에 성령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자세가 없었기에 결국 자신들의 육신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겉 모습은 이긴 것 같을지 모르나 그 속은 누구보다도 더러웠습니다.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있는 그들은 육신을 이길 수 없었으며, 그렇기에 결국 그들의 삶에는 참된 자유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며, 죄를 벗어버리려고 할 때, 백이면 백 실패하게 됩니다.
스스로 애써봤자 죄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깊은 죄책감에 빠지거나, 잠시 잠깐 율법의 요구를 잘 따른다고 생각하면 금방 영적 우월감에 빠져버립니다.
율법주의의 대표적인 열매이지요.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애쓰고 있는데 예수님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는 그들은 제아무리 그들 생각에 율법의 요구를 잘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자신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지켜야만 하는 부담과 억눌림 속에 살게 됩니다.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순종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순종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몇가지 말씀에 임의대로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에게 하나님의 참다운 생명이 끊기고, 침체가 계속됩니다.
거짓 신앙의 뿌리깊게 박힙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이 생각보다 이 땅의 교회에 팽배합니다.
이런식 입니다.
열성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내가 이렇게 까지 하나님 찾았으니까, 혹은 내가 하루에 몇시간씩 하나님을 찾았으니 하나님이 이제 내게 함께하시겠지.
나를 지지하시겠지.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했는데 하나님께서 내가 섬기는 일들에 함께 해주시겠지,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함께 하시겠지 같은 식의 내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합니다.
모양은 좋아보일지 모르나 내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무엇인가 기대하는 그 자체가 잘못된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입니다.
나의 선함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하시기에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 주님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그곳에 우리의 개인적인 기대나 탐심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인도하시기에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모든 동기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도 이 가치관의 전환을 예배를 인도하면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설 때, 저의 자세를 많이 다루셨습니다.
제가 저도 모르게 저의 공로를 의지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경우가 정말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제가 한주간 제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잘 찾고, 큰 문제 없이 주님을 잘 따른 것 같으면,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설 때, 이 안에 든든한 느낌이 듭니다.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이렇게 좋았는데,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 시간에 함께 하시겠지.’라는
마음이 쑥 올라옵니다.
반대로, 한주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살지 못한 것 같고, 하나님도 잘 찾지 않은 것 같으면, 이런 마음이 막 올라옵니다.
‘이런 내가 예배를 인도할 자격이 있나?’, ‘오늘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지 않으시겠지.’
완전히 제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이것이 잘못된 자세인 것을 가르치면서 저를 다루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제가 완전히 잘못된 자세로 주님께 나아간 것을 주님이 깨닫게 하시며, 제 자세와 가치관을 변화시키셨습니다.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았던 상관 없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설 때, 오직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을 의지하여 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며, 주님께 내 온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기로 선택합니다.
때로는 애통한 마음으로 저의 처지를 주님께 아뢰며 나아갑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아버지 앞에 믿음으로 나오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나오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공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예수님 내게 오셔서 나를 통치하시며, 나의 삶을 인도하시며, 나를 붙드십시오!
내게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당신을 바라봅니다” 고백할 뿐입니다.
자신을 내어던지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그 자에게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약속이 임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이 자세가 교회 회복의 시작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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