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에서 잃어버린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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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15:25-32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 신약 성경 122페이지 입니다. 다 찾으신 줄 알고 교독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5:25–32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설교 제목: 품에서 잃어버린 아들
서론
우리에게 탕자의 비유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본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많이 읽으셨고,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께서 죄인인 둘째 아들을 향해 달려오시며, 보이시는 그 사랑을 볼 때, 나 같은 죄인도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방탕한 생활을 멈추고 하나님께 돌아가게 합니다.
저도 이 탕자에 대해서 수 없이 들었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앞부분에 비해, 뒷 부분은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첫째 아들의 이야기 안에 담겨 있습니다. 저도 이 본문을 통해서 복음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오해하던 부분들이 있었던 부분들을 정리하고,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간 함께 이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며, 그 은혜들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에 해당합니다. 비유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확확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이 말씀이 어느 맥락 속에 들어있는지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그리고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논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에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여기서 등장하는 바리새인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하고자 하는데요. 우리에게 있어서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우리들에게 있어서 썩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차례의 설교들을 통해서 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며, 외식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고, 후에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리새인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오해를 벗겨내고자 합니다. 기본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단어는 ‘분리된 자’, ‘구별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세심하게 지켰으며, 그러기 위해서 불결한 것들과 부정한 자들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엄격한 율법 준수와 신앙적 모범은 유대인들에게 큰 신망과 존경을 받았으며, 회당 조직을 통해 전 유대 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죠.
이러한 율법적 열심을 가진 바리새인이 보고 있는데, 지금 말씀을 듣고자,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죠. 그 때 당시에 세리들은 로마를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징수하던 사람들이었죠. 그렇기에 정치적으로 방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혈통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끊어졌다 평가 받는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세리였던 마태를 제자로 받아드리십니다.
그리고 죄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신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며,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들이었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장면을 보면 그 때 당시에 온 이스라엘은 혼혈 민족이었던 사마리아인들을 만나지 않고자 그 지역을 돌아갔었죠. 심지어 그 여인은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이었죠. 또한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만지셨고, 가난한 자들, 사회적 추방자들을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그들을 친구로 받아드리셨습니다.
그들을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부정해졌기에 그들을 피하고, 그들을 멸시하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립니다. “예수라는 그 사람은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교제하는가, 죄인들과 함께 있으면 어떻게 거룩할 수 있는가!” 그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3가지 비유로 이야기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3절 입니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그 3가지 비유 중 마지막 비유가 오늘 우리가 읽은 ‘잃어버린 아들 비유’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아버지를 소개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었죠. 아버지를 떠나 지멋대로 자유를 찾다가 쫄닥 망해서 다시 돌아오는 둘째 아들 그리고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첫째 아들이죠.
그런데 헨리 나우웬은 이 이야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집에 떠난 둘째 아들이 길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집에 머물렀던 첫째 아들도 길을 잃어버렸다” 즉 아버지의 두 아들 모두 아버지를 거부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아들은 어떠했나요?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했죠. 이것은 왜 아버지께서 아직까지 살아계시냐는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떠나 자신이 살고 싶은대로 방탕하게 살아갑니다. 이것은 명확하게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죄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가치를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하나님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없다” 이야기 합니다. 또는 “하나님의 계심은 알겠으나, 나는 그 하나님을 믿지 않겠노라, 나는 그 하나님이 싫다”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한가요?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되어서 살아가면, 진정한 자유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떠합니까. 둘째 아들의 모습을 통해서 볼 수 있죠. 결국 파산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조차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맙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훔쳐 먹으며 “아..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차라리 아버지 집에 있을걸” 이라는 탄식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 자유를 얻고자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마지막은 “아.. 내 힘으로는 할 수 없구나. 하나님 아니면 소망이 없구나”라며, 탄식을 뱉게 됩니다. 길을 잃고 이제는 어디로 돌아와야 하는지 깨달은 둘째 아들의 모습이죠.
그런데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이 별 쇼를 하면서 아버지를 떠날 그 때에도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했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심지어 염소 한마리로 잔치 벌이지 않을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길을 잃었나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의 핵심은 둘째 아들의 돌아온 사건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환영하는 아버지와 첫째 아들의 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길을 잃은 첫째 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 복귀 환영파티에 들어가자는 아버지의 말을 거부합니다. 왜 거부하죠?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말씀을 다 지켰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이러한 염소 한 마리 주신 적 있으십니까? 그런데 저 둘째 자식은 뭘했다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반지를 주고, 그를 위한 환영 파티를 열고 있냐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주장합니다. “내가 아버지를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이러시면 안되죠.” “내가 얼마나 순종했습니까? 그렇다면 나에게 상을 주셔야지 왜 죄 지은 저 자식에게 상을 주십니까?”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런데요.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선한 행동을 통해서 아버지를 이용하고자 합니다.
제가 청소년때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중에 히든카드라는 설교가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도저히 안 될 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과거의 우리가 행한 선한 행동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으시겠느냐, 그렇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고등학생일 때 열심을 가져라!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는 당연히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선을 행하였으니, 그 선을 기억하셔서 나에게 이렇게 복 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뇨.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행하셔야할 이유가 있으실까요?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됩니다.
오늘 앞서 이야기했던 첫째 아들이 가진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이 아버지께 순종했는데, 나에게 복을 주셔야지, 왜 죄 지은 저 아들에게 잔치를 베푸십니까.
이 첫째 아들의 단순한 투정으로 보이는 이 내용 안에는 ‘율법주의’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우상인 것이죠. 내가 율법을 행함으로, 내가 선행을 행함으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합니다. 내 힘이면 되니까요.
만약에 첫째 아들이 순종하면서도 아버지를 거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바로 집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를 환영했을 것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그리워하며 기다리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동생을 기뻐함으로 받아드렸을 것입니다. 동생을 싫어하더라도,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그를 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부하고 있죠.
이것을 통해서 아버지의 두 아들 모두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둘째 아들을 아버지 집을 뛰쳐 나오므로 아버지를 거부했지만, 첫째 아들은 아버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아버지에게서 도망쳤습니다. 그렇게 둘 다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두 명의 아들들은 각각 앞서 설명한 죄인과 바리새인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죄인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였던 세리와 죄인들이죠. 첫째 아들은 바리새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거부하였던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서 죄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며,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꾸짖고 계시며, 요청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조롱하고 있는 이 죄인들은 하나님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겠냐. 진짜 너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며, 비난하는게 아니라 기뻐해야만 한다! 그러니 이제라도 너희가 선행에서 돌이켜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이러한 첫째 아들의 모습이 있으십니까?
제가 놀랐던 저의 모습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최근에 SNS를 통해서 한 친구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막 다른 친구 놀리고, 싸우고, 괴롭히고 누가봐도 악한 사람처럼 보이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성경 말씀을 공유하고 있었고, 신앙으로 인해 변화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근데 제가 진짜로 눈을 비비고, 수차례 확인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변화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꽤나 모범적으로 살아왔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엄청 교만하죠. 그런데 그러한 저의 순종이 구원을 이해하는 방식에, 복음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죠. 제가 그 친구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아주 작은 순종이 어느샌가 하나님과 저와의 관계를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왔을 때 기쁨으로 반응하는게 아니라, 비웃음으로 반응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속으로 하나님을 믿을 만한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을 구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우리 안에, 특히 교회 안에 가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제 믿기 시작한 사람보다, 신앙의 연차가 오래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에 대한 오해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독선적인 태도를 갖게 합니다.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피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돌이켜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돌이켜야 할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둘째 아들과 같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따라 살고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것을 점검해야겠죠. 오히려 이 영역은 쉬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두신 양심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뜻에 순종하고 있다면 그 선행의 동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의 동기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회개해야만 합니다. 바리새인들도 정기적으로 금식하며,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합니다. 하지만 잘하고 있는 선행의 동기를 점검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기를 점검해야만 합니다.
결론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인 우리에게 선행과 순종이 필요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거하지 않고, 나의 힘으로 한다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겉 보기에는 교회 안에 거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선행을 행하면 똑같아 보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올바른 동기 위에 세워진 행위가 따라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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