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헤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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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룻기 1:7-14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 구약 성경 401페이지 입니다. 다 찾으신 줄 알고 교독하겠습니다.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설교 제목: 하나님의 헤세드
오늘 7절에 보면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모압 지방에서 나와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한글 성경에 생략되어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거기에”라는 단어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일반적인 장소를 표현하는 것이죠. 모압이라고 구체적 지명을 언급하면 후대의 독자들은 모압에 살고 있지 않기에 이 본문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힘들다. 그러나 일반 적인 징소인 “거기'’ 있던 곳에서라고 하면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이 된다. 그렇다면 7절 앞부분을 다시 표현해보겠습니다. “그녀가 거기 있던 곳에서부터” 나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나오미 뿐 아니라, 누구든지 텅 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 돌아오길 원하는 자들이 누구든지 “있던 그곳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대흥교회 성도님들, 룻기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텐데요. 우리 삶 가운데서 돌이켜 나와야 할 부분이 있다면, 우리가 룻기를 통해서 배워야 할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을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8절을 보면 오늘 나오미가 룻기에서 처음으로 입을 엽니다. 이야기에서 등장인물이 하는 첫 대사는 그 사람의 성격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중요한데요.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나와 꽤 많이 나오미가 함께 걷고 있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얘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나오미의 발언을 통해서 어떻게 이방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느냐, 하나님을 버리도록 했다며 질책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발언을 잘 살펴보면,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8절과 9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먼저 유다 땅으로 가고 있던 나오미는 두 며니리에게 자신들의 고향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신앙의 이름으로 며느리들의 삶을 강요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나오미는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면했습니다. 보통 과부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왜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을까요? 성경에서 어머니의 집은 결혼에 관련된 논의와 결혼을 짜는 장소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두 며느리들이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결혼하라는 것이죠. 그래서 9절 후반부에 남편의 집에서 위로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각자 어머니의 집으로 가라고 권면하면서 놀랍게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룻 1:8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며느리들이 죽은 자들 자신을, 즉 자신의 아들들과 자신을 선대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선대라는 단어는 착한 일을 하다, 좋은 일을 하다는 뜻이죠. 그런데 나오미가 하나님께 구하는 선대는 다른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한글에는 같은 단어로 표현하지만 이 단어는 “헤세드” 입니다. 이 헤세드는 ‘‘약한 자가 곤궁에 처해 있을 때 강한 자가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언약적 충성”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전혀 그래야 할 의무가 없으시지만, 이 연약한 두 며느리들이 곤궁에 처해 있는데, 이들을 돌봐주십쇼, 이들에게 인애를 주십쇼! 라고 축복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는 건 나오미가 두 며느리를 향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오미가 신앙이 없어서 이들에게 하나님이 아닌, 모압 땅으로 돌아가라는 발언이 아닙니다. 과부된 시어머니를 따라서 그 먼 이스라엘 땅에 가서 사는 것이 그 며느리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운명일 수 있다는 것이죠.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인들의 정체성은 남편과 자녀들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사회보장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때 남편과 자녀가 없는 미망인은 창기 노릇을 하거나 구걸을 하는 것 외에 생계를 유지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오미가 같이 떠났다가 길 도중에 이 두 며느리들이 준 사랑을 다시 생각하니, 그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던 것이죠. 그래서 베들레헴에 다시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이스라엘 땅에 양식을 주셔야만 하는 의무가 없으시지만, 자발적으로 헤세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믿음을 가지고, 두 며느리에게 헤세드를 베풀어 남편을 만나고 집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이고, 며느리를 향한 자신의 배려였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쇼.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여인의 정체성은 남편과 자녀들에게 달려 있는데,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죽고, 나오미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오직 2명의 며느리 밖에 없습니다. 유일한 의지 대상이죠. 심지어 두명의 며느리(오르바와 룻)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여성인 나오미가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 두 며느리가 나오미를 봉양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조차 없는 상황인 것이죠. 그런데 그 상황 속에서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모압 땅으로 돌려보내고자 하는 것이죠.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두 며느리의 앞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두 며느리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죠.
지금 나오미가 보여주는 모습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면,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요? 네 그쵸. 이게 헤세드 인 것입니다. 자신을 깨뜨리면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사랑을 베푸는 것이죠. 이것은 단순히 내가 여유가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가지고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에요. 없고 힘들지만 상대방을 사랑하기에 나누는 것, 베푸는 것이죠.
제가 20살에 대학교에서 한 동아리를 들어갔습니다. 그 동아리는 미자립교회를 돕겠다고 해서 일주일에 2번씩 모였습니다. 한번은 모여서 함께 예배 드리고, 한번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회의했죠. 이렇게 매주 모이니까 밥을 먹어야 하고, 카페도 가야하고 돈이 남아나질 않는 거에요. 그런데 그 때 항상 선배들이 사주시고, 먹였습니다. 또 조금 지나니 이번에는 다른 분이 먹이고, 또 먹였어요. 그때는 또 그게 너무 당연해져서 선배님들은 돈이 많은가보다 했죠. 그런데 제가 1-2년 지나보니까 알겠드라고요. 돈이 많아서 그랬던게 아니라, 알바하면서, 자신이 먹을 것을 줄여 가면서, 힘든 와중에 저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을 채워줬던 것이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오미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오미가 혼자 가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게 아니에요. 뒤에 보면 룻이 다른 집에 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워 온 것으로 먹고 산단 말이죠. 며느리들이 나오미에게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필요로 하는 며느리에게 제일 귀하고 가치로운 것을 주는 것, 즉 자신의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 새롭게 결혼하도록 해주었던 것이죠.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러한 사랑을 배우고자 합니까?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더 어려워지는 선택을 하고 계십니까? 아쉽게도 이 시대는 점점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 같아요. 점점 철저하게 개인주의가 심해져가며,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해져가죠. 사랑한다고 입술로 고백 하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모습들로 인해 끊임없이 의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나오미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는 사랑에 두 며느리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먼저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리고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강하게 부정합니다. 오르바와 룻, 모두 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더 이상의 헌신을 하지 않아도 된다며 돌아가라고 권면하고, 며느리들은 어머니와 함께 하겠다며 울고 있는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오르바와 룻, 둘 다 돌아가라는 시어머니의 말에 울면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냥 예의상 거절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다시 한 번 권면합니다. “내 딸들아.” 나오미는 세 번씩이나 딸이라 칭합니다. 그리고 “가라, 돌아가라”고 계속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지 드러나는 것이죠. 그리고 돌아가야 하는 근거로 남편을 둘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다른 아들들이 있어서 우리 가문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내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하더라도 내가 오늘 밤에 남편을 만나야 하고, 동시에 쌍둥이를 나아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들이 자랄 때까지 기다리겠느냐. 어떻게 남편 없이 지내겠어. 그렇지 않으니, 돌아가렴. 하나님이 나에게 재앙을 주셨는데, 너희도 나와 같은 처지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며 그게 더 마음이 아파..
이렇게 나오미가 두번째 권면을 했을 때에 오르바와 룻, 둘 다 펑펑 울았으나, 했던 행동이 갈렸습니다. 오르바는 어떻게 합니까?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춥니다. 이것은 작별의 입맞춤이죠. 오르바는 입맞춤 이후에 나오미의 곁을 떠납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 집으로 가겠죠. 그리고 안식을 위해서 새로운 남편을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종종 이 본문을 보면서 오르바가 이기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비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오르바는 비난 받기에 너무나 충성을 다했습니다. 가족에게 최선을 다했고요. 시어머니께서 고향으로 떠날 때 같이 떠나왔죠. 그리고 울면서 떠나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르바는 비난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살기 위해서 납득할 만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런 권면과 냉혹한 현실 앞에서 오르바와 같이 결정하지 않을 시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만 정직해진다면 오르바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보통은 오르바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이죠. 반면에 룻은 상식을 초월한 행동을 합니다. 룻은 어떻게 반응했죠? 오르바는 작별의 입맞춤을 했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붙좇았습니다. 여기서의 붙좇다는 표현은 인간 관계에 쓰일 때는 애정과 충성심을 가지고 결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상식 밖에 일입니다. 룻이 지금 그곳에 가면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어머니를 붙좇고 있나요? 그곳에서 얼마나 어려움을 겪게 될 지, 여전히 믿음의 결단을 할지라도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룻은 자신의 모든 미래를 걸고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좇기로 합니다. 공동체 속에 약한 자가 곤궁에 처했을 때 강한 자가 자발적으로 보이는 충성과 사랑, 이것이 바로 헤세드라고 한다면 룻이 하고 있는 그 행동이 헤세드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과 나오미는 어떠한 이유인지 알지 못하나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되었죠. 그러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중에 서로를 위해 자신의 것을 희생하며 사랑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진정한 의미의 헤세드를 베풀고 있죠.
그런데 가지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면서 우리에게 오신 헤세드가 있습니다. 룻과 나오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고, 하늘의 보좌 위에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셨지만, 그 강한 분께서 약한 자를 위해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셔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사망의 권세 아래 살아가는 것을 불쌍히 여기셨고,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헤세드는 그들의 텅 빔 속에서 부족함 가운데 이루어졌죠.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풍요로움을 포기하신 온전한 헤세드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향해 가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내버려두면, 오르바와 같이 안전을 위해서 새로운 남편을 찾아 갈 겁니다. 우리의 생각에 가장 적합한 길, 이성적인 길, 합리적인 길로 향하여 가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괜찮겠지, 이렇게 하면 우리는 안식을 누리겠지! 그런데 우리는 어느 길로 가야만 합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그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 헤세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나의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회복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을 포기하여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안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우리 공동체 안에 이러한 헤세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공동체 속에 약한 자가 곤궁에 처했을 때 강한 자가 자발적으로 보이는 충성과 사랑, 이것이 이 헤세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강한 자에게 강함을 허락하신 이유는 다스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드러난 약한 자, 룻과 나오미도 서로를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약했기 때문이라고요? 아니에요. 그 권능을 가지신 예수님이 다스림이 아니라, 그 능력과 강함으로 사랑하셨어요. 우리는 희생하며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의 평안을 위해 여러 방법들을 찾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행해야 할 것은 헤세드, 그 사랑입니다.
결론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오미는 두번째로 며느리들에게 권면할 때를 보십쇼. 13절 후반부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셨다는 아픔 속에 나오미는 거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다. 나에게 고통을 주셨다라는 생각 속에 있었던 것이죠. 지금 며느리에게 그 얘기를 하기 전부터 계속해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에요.
그런데요. 놀라운 것은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는 2명의 며느리를 모압 땅으로 돌아가게 할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선대하심을 받기를 원했죠.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와 동일시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깊은 고난 속에 있는데도 상대방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선대하심을 구하고 있어요. 이 간단해 보이는 나오미의 축복과 기도 안에는 확고한 믿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이고요. 그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믿음이고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 며느리들을 선대해달라고 한 축복과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사랑을 행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그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진짜 중요한 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요. 하나님은 들으시고요.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는 기도하고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달라는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를 포기하는 사랑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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