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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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받을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9장 31-35절 말씀입니다
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설교 제목 : 유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러분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십니까? 참으로 다양한 시대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사랑 주고 받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해서 팀 켈러의 책 “내가 만든 신”은 저에게 큰 유익을 주었는데요. 오늘 이 시간 우리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말씀을 나누는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큰 은혜가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야곱은 어떤 인물입니까? 아브라함의 손자이자, 이삭의 둘째 아들이죠.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를 임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예언을 통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 얘기하셨습니다. 여기서 큰 자는 에서이고, 작은 자는 야곱이죠. 그렇다면 예언대로 에서가 야곱을 섬기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장남인 에서를 편애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편애는 편애를 받는 사람에게도 불행이요,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도 불행입니다. 편애를 받은 에서는 교만하고, 버릇없고, 고의적이고, 충동적으로 행동합니다. 반면에 야곱은 사랑을 받지 못하여, 분노하였고, 사랑을 받기 위해 계획을 짜 쟁취하려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리브가는 둘째 야곱을 사랑하였죠.
마침내 늙은 이삭이 자녀에게 족장의 축복을 줄 때가 되었습니다. 에서를 사랑하는 이삭은 에서에게 주고자 했지만, 야곱은 에서인척 하며, 이삭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에서가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고 야곱을 죽이고자 했을 때는 이미 야곱이 집을 떠났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죽이고자하는 에서를 떠나 광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죠. 축복은 받았으나 족장이 되기는 커녕, 자신의 목숨조차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죠.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도 없는 그 상황에 야곱은 방랑자가 되어 떠돌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어머니의 고향인 밧단아람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야곱은 자신의 엄마의 형제, 즉 외삼촌인 라반을 만나게 됩니다. 외삼촌 라반은 몸을 피하러 온 야곱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한달동안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외삼촌의 양을 치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외삼촌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29장 15절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야곱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라헬, 라헬을 신부로 원했죠. 그리고 그 라헬을 위해서 7년동안 일할 의향이 있었습니다. 야곱의 삼촌인 라반에게는 2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첫째 딸 레아와 둘째 딸 라헬. 17절을 보면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이 본문을 원어로 살펴보면, 라헬은 몸매가 좋은 데다 예쁘기까지 했다는 것이죠. 야곱은 그런 라헬을 보고 홀딱 반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얻고자 어떻게 합니까? 본인은 지금 돈 한푼도 없이 먼 곳 타지에서 혼자 있기 때문에 야곱은 라반에게 당신의 두 딸 중에 작은 딸 라헬을 위해서 7년 동안 섬기겠다고 얘기합니다. 7년동안 다른 보수도 받지 않을테니 오로지 라헬만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죠. 기본적으로 그 때 당시에 한 여자를 얻기 위해 4년 정도의 품삯이면 충분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는 것은 야곱이 라헬을 얻고자 내세운 7년의 보수는 엄청난 액수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에 그 모든 것을 포기했고, 심지어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습니다. 그렇게 7년동안 열심히 일한 후에 외삼촌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창 29:21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이 표현은 유난히도 성적인 표현입니다. 아버님, 라헬과 얼른 주십쇼. 얼른 첫날 밤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 표현은 야곱이 지금 성적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다는 것이죠.
야곱은 도대체 왜 이렇게 성적 열망으로 가득차 있었을까요? 지금 야곱의 마음이 텅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편애하느라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했고, 어머니로 떨어져 있어 사랑을 받지 못해죠.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도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축복은 받았으나, 유산도 가족도 잃어버린 상태에서 텅 비어져 있는 그 마음을 한 여인이 채워주고 있기 때문이죠. 야곱으로 그 여인은 하여금 살아있는 목적, 이유가 되었습니다. 내가 다 잃어버렸지만, 만약 그녀를 얻게 된다면, 행복할꺼야.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 얘기할 수 있을꺼라 여겼던 것이죠.
그런데 라헬을 주기로 한 라반이 뒤통수를 칩니다. 굉장히 계산이 빠른 라반의 입장에서 좋은 꾀가 떠올랐기 때문이죠. 라반의 어려운 골치덩어리를 해결할 방법이었죠. 몸매도 좋고 이쁜 둘째 딸 라헬에 비해, 이쁘지 않은 시력이 약한 첫째 딸 레아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시력이 나쁘다는 표현은 단순히 눈이 좋지 않다는 뜻을 넘어섭니다.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눈은 매력을 상징합니다. 즉 눈은 그 사람의 표정과 외모를 상징하는 것이죠. 그래서 레아를 눈에 장애가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라반은 앞서 라헬을 굉장히 비싼 값을 받고 야곱과 결혼을 하게 했습니다. 일반적인 것보다 더 많은 양을 받았죠. 그토록 라헬을 사랑하는 야곱을 한 번 더 이용한다면, 레아를 통해 자신에게 큰 돈을 벌어드릴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렸던 것이죠.
그래서 야곱을 7년동안 일하고 난 후에 라헬과 결혼 시키는 것 대신, 결혼식에 레아를 내보낸 것이었습니다. 라헬을 얻고자 7년동안 달려온 야곱은 결혼식 밤에 그 고대시대의 관습대로 같이 누웠다가 일어났을 때 아침에 보니 레아였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라헬은 구원자였습니다.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줄 상대였죠. 그런데 눈을 떠보니 레아였습니다. 야곱은 충격을 받았고, 라합에게 따져, 다시 7년동안 일을 하는 조건으로 라헬과도 결혼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안타까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신이 7년동안 살아왔으나 얻지 못한 야곱. 그렇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야곱과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라헬과 비교당하면서,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지 못했던 레아는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과 결혼했으나, 정작 그 상대조차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듣고 얼마나 절망하였을까요? 남편은 야곱이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고, 매일 같이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 더 소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버지도 나를 원치 않았고, 이제 결혼한 남편도 나를 원치 않았다.
이렇듯 우리의 인생도 야곱과 같이, 레아와 같이 내가 원하는 목적을 향해 달려갑니다. 라헬이라는 아내를 향해서, 야곱이라는 남편을 향해 나아가죠. 그러나 눈을 떠보면, 항상 우리 삶 옆에 있는 것은 레아입니다. 내가 원했던 것들을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지만, 항상 그것들을 성취하면서 살아갈 수 있던가요?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행복을 줄 것이라 여긴 모든 것들은 정작 까보니, 소유해보니, 가져보니 그것에 행복이 담겨있지 않더라는 거에요. 잠깐 그것을 소유할 것 같았어요. 잠깐 손에 잡히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죠.
만약 이것을 가진다 하여도 우리는 문제가 됩니다. 야곱은 라헬을 얻고자 다시 7년동안 일을 해서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나중의 라헬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어떻게 행하죠? 본인이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행동했습니다. 12명의 아들 중 라헬의 아들들만 편애 했고, 그로인해 다른 자녀들이 요셉을 팔아버리게 만들어 버렸죠.
야곱의 텅 비어진 그 마음을 채우기 위해 라헬과 결혼했지만, 결국 그 결국은 눈 떠보니 레아였다. 절망 뿐이었다는 것이죠. 그 가운데 야곱은 텅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습니까?
그 해답이 레아에게 담겨져 있습니다. 레아 또한 남편의 사랑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여전히 레아였고, 못 생겼고, 몸매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자녀를 낳음을 통해 남편의 사랑을 받고자 했던 것이죠.
31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하나님께서 지금 레아를 바라 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야곱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지 못하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태를 여셨습니다. 지금 사랑받지 않는 레아를 통해서 야곱의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의 이름을 보십쇼. 창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르우벤이고, 그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지금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보라!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셨으므로 이제 남편이 나를 사랑할 것이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레아가 누구를 고백해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셨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는 것이죠. 물론 남편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원함은 있으나, 레아는 지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죠. 이렇게 둘째, 셋째 아들이 지나고, 넷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레아에게 있어서 가장 원하고 바랬던 것이 남편의 사랑이었습니다. 지금껏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며,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지만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죠. 창 29:35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이 때 레아가 낳은 아들이 바로 유다입니다. 창세기 49장에 등장하는 것처럼 진정한 왕이신 메시아는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고, 유다의 후손으로 오셨죠.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가 예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름다운 라헬이 아니라, 못나고 연약했던 레아의 편에 서시며,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데 사용되게 하셨죠.
여기서 레아만 유일하게 신앙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서 찾았던 사랑을 계속해서 라헬에게서 찾다, 일찍 죽자, 라헬의 자녀들에게 찾았죠. 이것은 우리에게 명확하게 얘기합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텅 빈 마음을 채우고자 다른 것들을 추구합니다. 나의 외적인 모습들을 가꾸고, 다른 이를 사랑함으로 내 마을 채우고자 하죠. 심지어 야곱이 요셉을 편애했던 것처럼 자녀에게서 그 모습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결국은 무엇이었습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항상 늘 레아였더라. 환상이었고, 잡을 수 없는 것이었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위대한 연합이 바로 결혼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결혼이 아내를 너무나 사랑하였던 야곱에게는 오히려 독이 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무 사랑한 것이 잘못된 방향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아내와 남편을 덜 사랑해야 합니까? 아니요.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 언약 안에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떄로는 속상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 그런데 하나님보다 더 자신을 사랑하면 행복이 주어질 것 같으나 오히려 파멸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은 결국 왜곡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도 괜찮을까요? 부모에게는 자녀를 책임지고 사랑으로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보다 자녀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 자녀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내가 자녀의 주인되고자 한다면, 자녀는 올바른 가치관이 세워질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들을 내 손으로 책임지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주인되시는 주님께 맡기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신의 가장 깊은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떤 식으로든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을 강화하고 입증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에게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를 요구하고 하나님보다 상대방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이용하여 만족감을 누리고 싶어한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아내와 남편을 홀로 외로움 속에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사랑의 의무를 다해서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무엇을 얻고자 하십니까? 그 동기는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레아가 하는 행동은 자녀를 낳는 것이지만 사실 그것을 통해서 남편의 사랑을 얻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죠. 야곱이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고 수용 받지 못하였던 그 마음을 라헬과의 결혼을 통해서 보상 받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죠.
여러분 마음 속에 여러분이 행하는 것을 점검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원하고 바라고 있는 것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진정으로 바라고 원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누군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승진을 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자신의 명예와 지위의 확대를 위해서 승징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랑을 받고자 한다면, 그 사랑이 어떠한 사랑입니까?
우리는 그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떻게든 행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여 평생토록 내려놓지 못하는 짐이 되곤 합니다. 때로는 그것을 성취하였으나, 그 안에 내가 얻고자 했던 것이 없어 좌절을 느끼고 포기하기도 하고요. 야곱이 라헬을 얻고자 14년을 일 했던 것처럼, 레아가 사랑을 받고자 3명의 아들을 낳았던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높은 가치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구걸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고귀한 사랑을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성취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의 자손으로 오심으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그 은혜로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레아와 같이 연약한 우리에게 집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제목을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세상을 지으시고, 만물을 운영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가장 귀하다, 존귀하다 여기시는데 그것을 한 귀로 흘려듣고, 내 얘기는 아니라며 넘기지 않기를 원합니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나를, 여전히 죄 가운데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오늘 말하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한다. 오직 예수 뿐이네 찬양 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