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충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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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3장 14-19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진 성경으로 신약성경 311 페이지입니다. 다 찾으신 줄 알고 합독하겠습니다.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설교 제목: 하나님의 충만함
서론
통상적으로 유대인들은 서서 기도하였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였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세리 모두 하나님을 향해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의 경우, 하루 3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듯 성경에서 우리에게 기도할 때에 해야 할 자세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사도바울은 종종 기도한다는 표현을 무릎을 꿇는다고 표현하는데요. 무릎을 꿇는다는 표현 안에는 그 대상을 향한 존경, 복종, 겸손이 담겨져 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공손히 존경을 표하며,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 앞에, 복종하며,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향하여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기도를 받으시는 분을 표현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입니다. 유대 문화 속에서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그렇게 이름을 붙인 존재가 그것에 대해 갖는 힘, 권위, 지배력을 의미했습니다. 즉 만물의 이름을 주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의 아버지로 찬양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수신자인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온 우주에 미치는 영향력을 언급하면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기도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의 기도가 나오는데요. 총 3가지로 나눠서 볼 것입니다. 그런데 이 3가지의 간구는 아예 동떨어진 것들이 아니라, 마치 계단과 같이 하나의 단계를 점점 더 발전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총 3개의 단계를 살펴볼텐데요. 첫째, 사도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기를 기도하고 있고요. 둘째, 사도바울은 사랑 안에서 뿌리 박히고 터가 굳어져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까지 채워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 단계들을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본론
첫째, 사도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16-17a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이 간구는 두 개의 간구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개의 간구는 서로 보완하면서 하나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떼어서 살펴보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 너희 속사람을 / 강건하게 하신다”는 부분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 너희 마음에 /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라는 것이죠.
믿음과 성령의 능력이 대칭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어디서부터 나온다고 이야기하죠? 오직 하나님, 성령 능력을 통해서만 우리는 믿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가장 깊숙한 존재, 속사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강건함과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을 이야기하죠. 그리스도의 내주하시는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며,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실 때 우리는 마음이 강건하게 됩니다.
지금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을 경험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다니는 그리스도인에게 쓴 편지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에베소 교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을 놓고 기도하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모든 믿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마음을 다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사도바울이 기도하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이 존재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계시게 하다”라는 표현은 “하룻밤 묵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거처에서 거주하고, 정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만 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이 마음을 잠깐 스쳐 지나가, 아주 작은 부분만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깊이 정착하여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는 것을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사 그들 마음에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강건하여지기를 간절히 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사도바울 선생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 마음을 주님께서 다스리고 계시죠. 그런데, 하늘과 땅의 이름을 지으시고,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위대한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의 아주 일부분만 드리고 있지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관계를 맺어가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비밀이라고 하나도 얘기하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더 깊어질 수 있을까요? 저는 20살 초반에 제 속 마음을 친구들에게 얘기하는 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항상 재밌게 떠들고, 웃고, 즐거웠지만, 속마음을 한번도 얘기하지 못했죠. 그 이유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서였죠. 실제로 사람들에게 내 속 마음을 보여주지 않고, 단점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에 꽤나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과 친해질 수 없었어요. 오히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내 단점과 내 생각을 가리자, 부자연스러웠고, 깊은 마음의 교감이 없었던 것이죠.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였던 것이죠.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되신다 얘기하죠. 그러나 하나님에게도 잘 보이고자,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영역, 연약한 영역, 친구들과의 관계, 성격의 문제, 성적인 문제, 가족의 문제들을 하나님에게 감춰버렸습니다. 그리고나면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수 있는 영역은 교회에서의 시간 밖에 없게 되죠
그렇기에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간구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성령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입술로 하는 신앙고백에 그치지 않고, 마음 깊은 곳까지 다스리고 통치하기까지 자라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 가운데 계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께서 다스리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지금까지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의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을 위하여 간구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에서 이어지는 사도바울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요? 둘째, 사도바울은 사랑 안에서 뿌리 박히고 터가 굳어져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엡 3:17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사도바울이 기도하며 원하였던 모습은 에베소 교인들이 진정한 사랑 위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제자매된 그리스도인들이 인종과 성별, 지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사랑하는 것이었죠.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내주하심과 성령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이뤄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권위와 나의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나의 삶의 모든 영역들을 주장할 때에 우리는 십자가 지고, 사랑할 수 있게 되죠.
사도바울은 이러한 사랑이 성도의 기초가 되기를 원하며, 2가지의 비유를 결합합니다. 18절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식물이 뿌리를 내림으로 양분을 공급 받는 것처럼, 성도들은 사랑이라는 기초를 통해 양분을 공급 받는 것이죠. 또한 잘 지어진 집의 토대가 탄탄한 것처럼, 성도는 사랑이라는 탄탄한 기반에 세워져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하려고 할 때, 성령님께서는 그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엡 3: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그 사랑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포괄할 정도로 충분히 넓고, 그 사랑은 우리의 연약함과 죄로도 끊어지지 않고 영원까지 이어지도록 충분히 길고, 그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밑바닥까지 내려오실 정도록 충분히 깊고,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기까지도 충분히 높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너비와 길이를 깨달으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사랑하고자 할 때에 우리는 여전히 내 안에 사랑할 수 없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한계를 볼 때에 그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나는 여전히 내 돈 만원도 다른 이에게 쓰는 것은 죽을 것처럼 싫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를 위하여 몸의 흠집나는 것, 다른 이를 위해서 옳은 이야기를 했다가 명예와 인기가 하락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를 위해서 맞으셨고, 조롱 당하셨고, 제자들에게까지 부인당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죠. 죽으시면서까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셨음을 기억나게 하시는 것이죠.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에 지쳐서, 때로는 사랑하였으나 배신당하여 사랑하지 않고자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이라는 토양 아래에 뿌리를 박아야 하고, 사랑이라는 터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C. S. 루이스는 사랑의 실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신경 쓰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세요. …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그만큼 더 그 사람을 싫어하는 내 모습을 마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싫어도 잘해주면 어느새 싫은 마음이 줄어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에게만 친절하게 대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야 하며,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많은 사람을 좋아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좋아하게 되리라고 상상도 못했던 사람들까지 말이지요”
현대 사회는 사랑을 행할 수 있는 토대를 감정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행위를 계속 행하면 상대를 사랑하는 감정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어도, 사랑하고 싶지 않아도, 그 마음을 넘어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가 우리가 죄가 없고, 우리가 그 자체로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바울이 우리가 사랑을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스도의 사랑을 깨달음에서 이어지는 사도바울의 기도는 무엇일까요? 셋째, 사도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에 이르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에베소서 3장 19절 후반부인데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더 알아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충만을 향해 갈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 문장을 쉽게 보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를 채우신다고 느껴집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서의 원 의미는 하나님의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까지, 하나님이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졌다는 것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만큼 우리도 충만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쉽게 표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부분을 빼놓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그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이 영적인 성숙입니다.
우리는 영적 성숙에 대해서 오해하여, 키가 크는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곤 합니다. 어릴 때 키를 키우기 위해서 밥을 먹고, 운동하고, 스트레칭 하고, 잠을 자는 것 외에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게 없죠. 키를 키우는 것은 성장 호르몬인데, 우리가 하는 것은 돕는 역할이죠. 우리는 기다리면서 잠 자는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영적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도 사실 이렇게 여기기도 한다는 겁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이죠.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처럼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냥 우리의 손을 내려 놓고 있을 때가 많이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이제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된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순종하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시고,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내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부분을 빼놓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영역에서 충만함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모습을 향해 가야만 합니다.
제가 대흥교회 오기 전 다니던 교회 청년부에서 동역자 한 친구가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자신은 아기자기한 것들을 되게 좋아한다. 그리고 항상 교회에 있는 카페를 정리하시는 분들이 너무나 마음에 밟힌다고 얘기했어요. 저는 사실 그 때까지 한번도 눈 여겨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러자 청년부 담당하시는 분께서 그 친구에게 그게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일 수 있어. 아무도 보지 않는 그 곳을 보게 하시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거다. 꼭 찾아봤으면 좋겠다. 얘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역이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누군가는 새가족을 내버려 둘 수 없어서, 누군가는 처음 올 때에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싶어서, 누군가는 목소리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누군가는 보이지 않지만 다른 이들의 예배를 돕는 방송실을, 누군가는 영혼들을 돌보는 교사와 순장으로 부르시죠. 그 부르심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을 것이고요. 그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충만하게 채우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앞서 이 기도는 계단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 사랑의 행위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우리의 죄된 모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되죠. 그 사랑을 더 깊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을 명령하지 않으셔도 자발적으로 따르고 싶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나아가는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채우시고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20-21절을 보면, 사도바울의 감사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사도바울이 지금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간구한 모든 것을 넘치도록 능히하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죠. 하나님께서 친히 능력을 부으사 사랑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모든 영역 가운데 행하시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에 찾아오셔서, 사랑을 일으키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시키실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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