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심으시렵니까?

사무엘상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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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심으시렵니까? / 내가 심는대로 거두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서론]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모두 어떤 영화일까요?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복수심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파헤친 작품들입니다.
복수하는 영화가 재밌기는 합니다.
어릴 적 소림사 영화를 보면 제자가 스승의 복수를 하기위해 최고의 무공을 수련합니다.
결국 스승의 복수를 해내고야 맙니다.
어릴적 그 장면을 보고 감동하면서 통쾌해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런 복수심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평범한 우리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소심한 복수를 하고는 합니다.
남편이나 아내, 가족, 친구가 미워 소심한 복수를 한 적이 없을까요?
저는 있습니다.
그치만 어떻게 했는지 말해줄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복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복수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악에 대해 복수하니까 희열과 쾌감을 느끼지만 그의 영화는 끝에가면 괜히 기분이 안 좋습니다.
복수의 한쪽면인 통쾌함말고 다른면인 복수의 악함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악에 대한 복수는 또다른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어 낼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복수의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 군대에 가면 괴롭힘, 폭력들이 있었습니다.
저 또한 군대에서 구타와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게 대물림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쫄다구 시절에 당했기 때문에 내 밑으로 쫄다구가 들어오면 똑같이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복수의 악순환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구타와 괴롭힘이 없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당한만큼 나도 상대방 혹은 누군가에게 갚아주려는 마음 때문인 것이죠.
그럼 이런 복수의 악순환을 끝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말하면 어떨까요?
너무 뻔한 대답인가요?
나한테 악을 저지른 사람한테 어떻게 선으로 갚으란 말인가요?
나를 매일 갈구는 상사 책상 위에 어떻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올려놓을 수 있을까요?
내가 미워하는 친구에게 혹은 나를 미워하는 친구에게 카톡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보낼 수 있을까요?
[본론]
오늘 말씀인 사무엘상 26장에서 다윗은 여전히 광야에 있습니다.
수년째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는 중입니다.
언제쯤 끝이 날까요?
사울이 죽으면 이 광야도 끝이 날텐데 말입니다.
요즘 저는 아내와‘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내가 관심을 갖는 주인공은 구씨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닙니다.
저는 염미정이라는 여자주인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뻐서가 아니라 독특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인공은 어둡고 우울하고, 웃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그녀가 회사에서 만든 클럽이 바로 해방클럽입니다.
그녀의 해방은 사람에게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삶은 곧 관계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관계가 때로는 사람을 많이 피곤하게 만듭니다.
남여 관계에서도 밀땅을 해야 하고, 윗 사람 눈치도 봐야 하고, 말도 안되는 소리도 맞장구를 쳐줘야 하고 말이죠.
많은 관계에 얽혀 우리는 내 마음도 마음놓고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들한테도 말이죠.
그래서 주인공은 사람에게서 해방되고 싶은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 그 자체에서 해방되고 싶기보다는 고정된 관계의 틀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이런 염미정을 보며 다윗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다윗도 ‘해방’이라는 단어를 너무나 원할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도망다니는 것도 이제는 지쳤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죄인처럼 계속 도망다녀야 하니 얼마나 서글플까요?
다윗은 광야에서 못 먹고, 못 씻고 이런게 힘든 게 아닙니다.
사울 자체가 자신에게는 광야입니다.
얼마나 벗어나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그 광야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믿기에 견뎌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광야는 힘들기도 하지만 시험과 유혹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고난가운데 다윗을 시험하셨습니다.
너무 힘든 고난 앞에서 시험과 유혹을 이기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고난을 끝낼 수 있는 시험과 유혹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 광야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두번이나 맞이했습니다.
첫번째 기회는 우연히 찾아온 기회였습니다.
24장에 보면 사울이 제발로 다윗이 있는 굴에 들어왔습니다.
사울이 용변이 마려워 엔게디 광야에 있는 어떤 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용변보려면 무장해제를 해야 하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용변을 보는데 하필 그 굴 안에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울은 어두컴컴하니까 그냥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 옆에서 부하들이 하나님이 사울을 죽이라고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았고, 단지 그의 옷자락만을 베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다윗은 후회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 때 아량을 베푼 다윗에 감동해 사울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다윗을 미래 왕으로서 축복해줍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때 뿐이었습니다.
다시 궁으로 돌아간 사울은 또다시 다윗을 뒤쫓아 그를 죽이려 합니다.
이번에는 십 광야까지 군사 삼천명을 이끌고 다윗을 뒤쫓아 왔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사울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는 그가 있는 곳까지 직접 찾아갔습니다.
삼천명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도 놀랍게도 다윗은 사울이 있는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12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머리맡에 있던 창과 물병을 들고 아비새와 함게 빠져 나왔으나, 보는 사람도 없고, 눈치채는 사람도 없고, 깨는 사람도 없었다. 주님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셔서 그들이 모두 곤하게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들을 모두 잠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사울도 자고 아브넬도 자고, 군사들도 모두 자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용기를 좋게 보시고 하나님이 도우신 것입니다.
그 때 다윗과 동행한 장군이 아비새입니다.
이제 다윗의 명령 한번이면 자고 있던 사울의 목은 아비새의 칼에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두번째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입니다.
다윗은 첫번째 기회가 왔을때는 봐줬지만 이번에는 봐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사울은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죽이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이 죽으면 지긋지긋한 광야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옆에 있던 부하 장군 아비새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며 다윗을 재촉합니다.
심지어 삼천명의 군사들을 뚫을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말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그럼 사울을 죽이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그러나 다윗은 이번에도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두번째에도 죽이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왜 죽이지 않았을까요?
다윗은 앞서 25장에 등장한 나발과 아비가일을 통해 배운 게 있었던 것입니다.
나발이 다윗을 모욕하자 다윗은 나발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과 행동으로 인해 다윗은 나발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발을 직접 심판하셨습니다.
그 때 다윗은 깨달은 것입니다.
“악은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시는구나.”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그를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손에 맡긴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두번째 기회이고, 하나님이 도우신게 분명하다면 우리는 사울을 그냥 죽이지 않았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을 끝낼 절호의 기회를 주님이 주셨다고 믿고 그를 죽였을 것입니다.
나에게 유리한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쉽게 판단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요.
신학교에 예쁜 여학생이 들어오니까 남자신학생들이 엄청 대쉬를 했답니다.
그런데 다들 하는 소리가 주님이 마음을 주시는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 일상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누구나 했을 것 같은 복수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분명하게 주님의 뜻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이를 내가 쳐서 죽이는 일은 주님께서 금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의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그 증거로 사울의 머리맡에 있던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갑니다.
이번에도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사울이 주님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레위기 묵상할 때 성막에서도 성막도구들에 기름을 바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그냥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인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은 기름부음받은 사울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내가 유리한 대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주님께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유불리와 상관없이 주님께 맡겨드리는 신뢰가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이 기름부음받은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은 자신의 행동이 나중에 부하들에게 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기름부음을 받았고, 다윗도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쉽게 죽여버린다면 다윗 역시 똑같이 당할 위험에 빠질지 모릅니다.
다윗이 힘이 약해졌을 때 다윗의 신하가 그를 죽이려 한다면 자신이 할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기름부음받은 사울을 절대로 손대지 않았기에 이것은 부하들에게 살아있는 본보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의도적으로 이런 효과를 노린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니 결과적으로 이런 효과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왕, 예언자, 제사장만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이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기름부음, 즉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바로 우리의 삶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뻔히 하는 선택이지만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나한테 이득이 될 게 뻔한데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한테 손해가 될 게 뻔한데도 하는 것입니다.
믿음때문입니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세상 사람들과 우리가 다른 이유는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때문입니다.
친구들 다 컨닝하는데 나만 안합니다.
왜냐하면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때문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나만 성적이 B나왔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만 영광받으셨다면 그것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때로는 실패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제일 먼저 살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멀리 산꼭대기에 올라가 사울과 아브넬에게 소리칩니다.
먼저 아브넬을 부릅니다.
왜 아브넬을 먼저 불렀을까요?
다윗은 아브넬이 자신을 죽이려는데 열심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브넬은 사울을 보좌하는 2인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윗을 없애야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브넬은 계속해서 사울에게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옆에서 부추겼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브넬에게 경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죽을 사람이 아니라 사울을 지키지 못한 아브넬 너가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넬은 왕을 지키지 못한 불충으로 죽어야 마땅했습니다.
이 일로 다윗은 아브넬보다 자신이 더 충성스러운 신하이며 죽어야 될 사람은 아브넬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아브넬은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입니다.
이제서야 다윗의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사울은 또다시 감성에 젖습니다.
다윗을 아들이라고 부르며, 다윗을 찾습니다.
이것이 사울의 연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울도 그 당시에는 진심이었겠지만 금세 다시 변한다는 게 문제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이 잘못했다고 고백합니다.
다시는 해치지 않겠으니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 순간만은 진심입니다.
그러나 행동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행동은 회개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만듭니다.
진정한 회개는 후회가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바꿔야만 합니다.
행동의 변화가 반드시 따라와야 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은 사울의 죄악때문이 아닙니다.
사울이 제대로된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기회를 주시면서 사울이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후회할 당시에는 회개하는 척하지만 행동에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어떻습니까?
이제 다윗의 두번째 말을 보십시오.
19절입니다.
“임금님을 충동하여 나를 치도록 시키신 분이 주님이시면, 나는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을 충동하여 나를 치도록 시킨 것이 사람이면, 그들이 주님에게서 저주를 받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사람의 음성만을 듣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죽는게 하나님 뜻이라면 자신이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사울 옆에서 다윗을 죽이라고 부추기는 신하들을 향한 저주인 것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사울은 사람의 말을 듣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누구의 말을 듣느냐가 누구의 사람이냐를 결정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고, 사울은 사람의 음성을 듣고 행하기 때문에 그냥 세상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다윗처럼 사람의 음성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듣고 있습니까?
아니, 누구의 말이 내 삶에 결정적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사울은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말하지만 다윗은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23,24절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공의와 진실을 따라 갚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늘 임금님을 나의 손에 넘겨 주셨지만, 나는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임금님께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임금님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겼던 것과 같이 주님께서도 나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어떠한 궁지에서도 나를 건져 내어 주실 것입니다.”
다윗의 말의 핵심은 심은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악에 대해 선으로 갚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의 선에 대해 악으로 갚았습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이 값을 치루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악을 심은 사람은 하나님이 악으로 갚으십니다.
그러나 선을 심은 사람은 하나님이 선으로 갚아주십니다.
내게 아무리 악을 행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는 믿음, 그리고 악은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대에도 다윗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광야같은 세상 속에서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세상의 기준과 가치에 물들지 않고 하나님을 최우선 순위로 두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나를 갈구는 상사의 책상 위에 우리는 아.아 올려놓을 수 있을까요?
나를 미워하는 친구, 내가 미워하는 친구에게 카톡으로 선물 보낼 수 있을까요?
악을 선으로 갚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으신 분이 계십니다.
복수의 악순환을 끝내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악함의 심판을 본인이 대신 받으시고 선을 심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 힘으로 우리가 어떻게 악에 대해 선을 심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주님이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나를 갈구는 상사 책상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올려놓는 것은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가져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친구, 내가 미워하는 친구에게 카톡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보내는 것은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져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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