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살의, 요나단의 사랑

사무엘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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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울의 암살 시도 2. 요나단이 알려줌 3. 요나단이 화살을 쏨 4. 울며 헤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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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요나단에게는 기회가 없었을까?

저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던 중 “왜 요나단은 왕이 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요나단은 다른 사람에 못지 않게 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왕이 될 수 있었는데 그는 왕이 될 생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왜 요나단은 자신에게 보장된 당연한 권리를 포기한 것인지 솔직히 요나단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향해 분노하고 죽이려 했을 때 잠시 침묵 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다윗을 사랑하고 절친한 사이로 지냈다 해도,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 갈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요.
사실 요나단도 뭐하나 꿀릴 것 없는 사람이었습오다. 왕이 되기에 충분한 요소들을 갖고 있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되면 아버지 사울보다 더 이스라엘을 잘 다스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왕이 될 가능성이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지금 자신의 정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제거하려 합니다. 정적 제거는 단순히 왕이 될 가능성이 높은 한 사람을 제거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잠재적인 반란과 같은 불안요소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잠시 침묵하면 왕권이 강화되고 자신에게 권력이 넘어오는 아주 쉬운 길을 갈 수 있는데 요나단은 그 길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 그는 자신에게 보장된 영광의 길을 포기했을까요? 왜 그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을까요.

사울의 분노

오늘 본문을 보면 24절 초하루에 왕이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말합니다. 사울은 평상시와 같이 벽 곁에 앉습니다. 그가 벽 곁에 앉은 이유는 암살 시도에 대한 확실한 보호를 받기 위해서 였습니다. 벽을 두고 앉아 자신의 시야 안에 모든 것들을 넣어두고 식사를 하는 것이죠.
사울이 신하들과 밥을 먹기 시작하는데 빈 자리가 보입니다. 바로 들에 숨은 다윗의 자리입니다. 빈 자리가 신경 쓰였지만 사울은 굳이 말하지 않습니다. 26절처럼 ‘그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 부정한가보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읽고 지켰던 모세 오경을 보면 부정한 시기에는 음식 먹는 일을 금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정함은 우리가 지난 3월 레위기를 통해 매일 들었던 ‘그 부정'에 관한 것 들입니다.
부정한 사람과 접촉을 했다던가, 특정 피부 질환에 걸렸다던가 혹은 인간의 시체를 만졌다던가 하여 부정해진 경우초하루에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 금지 되어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모세오경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가 오지 않은 것에 대해 그럴 수 있다 여기며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에도 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울은 왜 또 다윗이 보이지 않는지에 대해 질문합니다. 사울이 다윗이 어디 있는지 물은 그 날은 27절의 기록처럼 그달의 둘째 날이었습니다. 이날은 거룩하다.라고 지정된 날이 아니었기에 부정한 사람도 함께 식사를 먹을 수 있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부정해져서 첫날은 오지 못했다 해도, 둘째 날은 올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자 사울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왕과 함께 하는 자리에 신하가 오지 않았으니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가장 친하게 지냈던 자신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윗의 소재를 묻습니다.
요나단 은 그러한 질문을 할 것을 알았다는 듯이, 핑계를 대기 시작합니다.
다윗이 가족과 함께 베들레헴에서 제사를 드리는 중입니다.
다윗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몰래 식사자리에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반역이나 음모를 꾸미기 위해 빠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현재 베들레헴에 가족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동하기 전 왕실의 사람인 저에게 허락을 구했습니다.
혹시 까방권이라는 표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몇년 전까지 사용되던 줄임말인데요. 까임 방지권을 줄인 표현입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비난이나 악성 댓글을 면제받을 권리를 부여하는 것인데요.
본받을 만한 행동을 하거나 크게 활약한 유명인에게 대중이 호감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한두 번 잘못을 저질러도 비난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시는 나라였습니다. 왕과의 식사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 것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제사를 드리러 갔다는 요나단의 이 핑계는 일종의 까방권과도 같았습니다.
그 누구도 비난하거나 토를 달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예배가 우선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사울은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갔다는 이 이야기를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깁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보다 자신이 주관하는 이 자리에 오지 않았음에 주목하며 그를 향해 강한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30절을 함께 볼까요? 사울은 다윗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새의 아들"이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다윗이 예배를 드리러 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이 자리에 빠진 이유는 다른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다윗을 향한 그 적개심을 이제는 아들 요나단에게 돌리며 원색적인 비난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아들인 요나단마져도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패악무도한 계집의 아들이라 비난합니다.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으며 요나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은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와도 같다!
그가 있는 한 너는 절대 왕이 될 수 없다!”

수치와 탐욕

저는 30-31절이 사울의 현 마음과 관심사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라 생각합니다.
30절을 보면 수치라는 말이 두번 반복됩니다. 사울은 다윗을 감싸는 그 행동이 얼마나 수치와 부끄러움을 주는 것이 아느냐? 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나단을 못된 아들로 만듭니다. 요나단이 이 이야기를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 돌아서 다윗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지지하기를 의도하며 ‘수치'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아버지인 자신이 아닌 다윗을 선택했다는 것이 자신에게 수치라 말합니다. 부자와의 연을 위협할만큼의 괘씸한 배신을 지금 요나단이 자신에게 하고 있다 말합니다. 요나단의 이 행동은 아버지인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인격적인 모독과 수치를 주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요나단의 어머니를 언급합니다. 요나단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부인인 왕비를 향해 패악무도한 계집이라 말합니다. 그녀에게 ‘수치'를 주고 있습니다. 부인을 향해 패악무도하다라 표현한 것은 자신이지만, 그녀가 그런 평가를 받는 이유가 바로 요나단 때문이라 말합니다.
사울은 요나단에게 너의 그 행동은 “나와 너의 어미 모두에게 인격적 모독과 수치를 주고 있는 것과 같다.” 말하며 요나단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 수치와 모욕감을 받고 주는 것인 자신인데, 그는 그 이유가 요나단 때문이라며 비난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수치를 언급한 이유에 대해 31절을 통해 말합니다. “다윗이 있는 한 너는 왕이 될 수 없다.”
요나단의 모든 행동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만 수치와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 수치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너의 아들들도 모든 자녀들도 동일한 수치심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말하고 있는 것이죠.
요나단의 잘못된 선택이 온 가족을 웃음거리로 만들 것이다. 라 말하며 요나단의 마음을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듭니다.

요나단의 마음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으로 인해 한 발 물러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되묻습니다.
“도대체 다윗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습니까? 그가 도대체 무슨 행동을 했길래 이러십니까?”
요나단의 질문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대표로써 책임을 다하셔야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써 백성을 다스려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
모세오경에 따라 법을 집행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법에 따라 누군가를 처벌해야 해야 했습니다. 또한 무죄한 자를 처형해서는 안되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은 무죄한 자였으며,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이 아니라 판단했습니다. 그랬기에 요나단은 아버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버지 사울이 왕으로써 바른 선택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요나단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자신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단창을 던져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아버지의 반응이 자신의 예상을 넘어선 것을 보고 요나단은 심히 노하여 그날 내내 금식하며 슬퍼합니다. 그가 심히 노했던 이유 아버지가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모욕하며 죽이려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윗이 부당하게 욕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은 다윗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활과 화살 그리고 작은 소년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작은 소년을 달리게 하고 뒤에 화살을 쏩니다. 그리고 다윗과 자신만 알 수 있는 암호를 외칩니다.
소년이 화살을 주으러 갈 때 소리를 칩니다. “서둘러라. 빨리 가라! 멈추지 마라!
소년이 화살을 주어오자 갑자기 요나단은 활과 화살을 주며 돌려보냅니다. 다윗을 공격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무장해제를 통해 보여줍니다.
왕위 계승자가 들판에 이렇게 무장해제 하고 서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울이 암살 시도를 막기 위해 벽을 곁에 두고 음식을 먹었던 것처럼, 요나단도 다른 나라 혹은 반대파의 암살 위협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들판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장구도 없이 서있습니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다윗은. 요나단의 모습을 보고 현 상황을 이해합니다. 요나단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다윗이 복종과 극도의 경의의 표현으로 절을 세번 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요나단은 동년배의 존중을 표하는 의미로 입을 맞추고 부둥켜 안고 서로 울기 시작합니다.
그 마음을 가지라
요나단은 아마 복잡미묘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왕위를 빼앗긴다는 그러한 마음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닌, 다윗을 진정으로 걱정하며 미안한 마음과 함께 자신의 아버지가 하나님을 떠난 것에 대한 여러 감정들이 교차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요나단이 이렇게 행동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왕이 될 생각도 야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모자란 사람이었기에 감히 그 왕의 자리를 꿈꾸지 못했던 것이 아닙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는 왕이 될 자질이 충분히 넘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왕이 되는 것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마음 속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로 작정하셨음을 알고 요나단은 그 뜻에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정적을 제거해주면 편하게 왕이 될 수 있고,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다윗에게 어떤 질투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온전히 서도록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을 위한 마음으로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묻고, 왕의 역할을 다하라" 충언 했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자기 자신을 비우고 겸손한 마음으로 섬기며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당연한 그리고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 권리를 기꺼이 내려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린 사울과 요나단을 살펴 보았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셨나요?
우린 사울과 요나단의 모습을 둘다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생각을 앞세울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고 선택과 결과를 맡겨 드리기도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욕심을 앞세우는 사람은 사울처럼 변해갑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 여기기에 시야가 좁아지고 나의 선택이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다른 이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도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올리고 붙잡으려는 생각과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요나단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마음을 기꺼이 포기하고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의 모습 둘 다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가짐과 선택에 따라 사울도 될 수 있고 요나단도 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모든 제2가족들이 요나단과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마음과 경험에 따라 선택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하나님을 찾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잠시 멈추고 숨을 크게 내쉬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우리는 요나단처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분명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나단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기록된 그의 마음이 아닌 저의 여러분의 마음이 되기를 그렇게 살아가기를 결단하는 이 시간 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