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그들이 핑계치 못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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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범죄의 속성을 정확히 진단하는 곳부터 복음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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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바울은 복음을 소개하기 시작하는 대목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언급했을까요? 주님께서 앞으로 오실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의 특성을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6:8–11 (KRV)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사람들의 자기 의가 얼마나 형편없는 누더기인지, 그들의 판단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 깨닫게 하는 것으로 복음의 문을 엽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질병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환자에게 어떻게 의사가 수술을 권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게 하고, 또 그 죄인이 자기 의, 자기의 어떤 노력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복음은 그에게 복음이 아닙니다. 다이아몬드가 검은 융 위에 놓일 때 그 아름다움이 드더나듯이, 밤 하늘의 수 많은 별들의 아름다움이 칠흙 같이 어두운 밤에 잘 드러나듯이, 우리의 죄, 우리의 무력함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복음은 삶의 어떤 안전장치, 보험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설명을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로마서 1:18–20 (NKRV)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 이유는, 사람들이 불의로 진리 즉 진실을 억누르고 외면하는데 있습니다. 진실 즉 진리가 뻔히 보이는데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어서 콱콱 눌러서 안 보이게 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뻔히 보이는데 사람들이 이 보이는 것들을 외면하기 위해서 진리를 꾹꾹 눌러 안 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다 알려졌기 때문에 아무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성이 안 보여서 몰랐다구요? 아니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이 만물에 분명히 나타나 보입니다. 어느 정도로요? 누구도 핑계하지 못할 정도로요.
어떤 분은 진화론이 나온 이후에도 그런 말이 통하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을 한 마디로 하면, 이 만물은 스스로 있는 것이다, 이 우주의 신묘막측한 작품은 우연의 산물이라고 고백하는 일종의 신앙입니다. 이 자연은 스스로 있는 것이고(naturalism), 그 속에 보이는 놀라운 조화는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생긴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존재에서 존재가 나올 수 있습니까? 무질서에서 질서가 저절로 생길 수 있습니까?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카메라가 있습니다. 카메라가 있기 위해서는 이것을 설계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광학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카메라를 설계합니다. 이 설계에 따라 카메라 제작자는 카메라를 만듭니다. 이 카메라가 있기 위해서는 광학의 원리라는 법칙이 먼저 있어야 하고, 또 이 원리를 잘 알고 설계하는 디자이너가 있어야 디자인이 나옵니다. 또 이 디자인에 따라 제작하는 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몸에 쌍안의 카메라가 있습니다. 렌즈가 있고 필름에 해당하는 망막이 있고, 빛의 양을 조절하는 조리개가 있고, 촛점을 맞추는 근육이 있고, 이 모든 것을 조절하는 신경이 있고, 여기서 맺어진 영상을 처리하는 영상처리 창치가 뇌에 있습니다. 이 카메라가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구요?
우리 몸의 세포가 1조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이 세포 하나 하나 마다 핵이 있고, 이 핵 안에 DNA가 있습니다. DNA는 일종의 기계어입니다. 우리가 쓰는 컴퓨터는 전원이 들어오고 나오는 것 두 가지 신호로 0과 1로 2진법으로 정보와 명령이 처리됩니다. DNA도 이와 유사한 원리로 네 개의 염기가 배열된 순서로 정보와 명령이 4진법으로 처리됩니다. A, C, G, T 네 가지 염기가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서 세 개의 염기 서열이 하나의 아미노산을 결정하고, 셋 씩 짝지어오는 염기서열에 따라, 아미노산의 서열이 정해지고, 아미노산의 서열에 따라 단백질의 입체적, 화학적 특성이 결정됩니다. 이 단백질의 종류에 따라 세포 안에서 명령이 수행되고 생명활동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유전자는 일종의 컴퓨터 프로그램입니다. 수 많은 상황에따라 그에 맞는 명령이 발현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잡한 프로그램이 저절로 프로그램 되었다구요? 이게 말이 됩니까? 테트리스 같이 아주 간단한 프로그램도 무작위에 의해서 생길 수는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우리의 유전자는 일종의 컴퓨터 프로그램입니다. 수 많은 상황에따라 그에 맞는 명령이 발현되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잡한 프로그램이 저절로 프로그램 되었다구요? 이게 말이 됩니까? 테트리스 같이 아주 간단한 프로그램도 무작위에 의해서 생길 수는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보다 복잡하고 정교한 유전자 프로그램이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저절로 생겼다구요? 우연에 우연을 곱하면 점점 확률이 떨어지지 더 높아집니까? 아무리 간단한 프로그램도 저절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복잡한 이 프로그램이 우연히 짜졌다구요?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작은 확률이라도 시간을 길게 주면 무엇인가 나온다구요. 30억년 동안 키보드를 무작위로 두드리면 무엇인가 나올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무한대 곱하기 0은 무엇인가요? 그냥 0입니다. 그러니까 naturalism은 일종의 신앙입니다. 논리적으로 전혀 타당성이 없는데, 표면적으로는 타당하게 보이는 것을 믿는 맹목적 신앙입니다. 어떤 것이 더 바보 같습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과 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우연의 산물 즉 스스로 있는 것이라는 말 말입니다. 무대에서 마술사가 작은 막대기를 들고 흔들었더니 모자에서 토기가 나옵니다. 그 막대기에 그런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죠. 그냥 눈속임이죠. 우연은 이 막대기 처럼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우연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가설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말장난입니다. 우연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이 우연의 산물이라는 가설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말장난입니다.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 누군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면 그것은 안된다고 합니다. Naturalism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모든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고 합니다. 과학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합리성이지 naturalism 자체가 과학은 아닙니다. 자연주의적 설명이 너무 허술하니까 지적 존재에 의한 설계로 설명하려 하면 안된데요. 과학이라면 어떤 쪽 설멸이 더 합리적인가 들어나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법정에서 원고측과 피고측이 논쟁이 붙었을 때, 판사가 어느 한 쪽 증거는 증거로 받아주지 않는 법정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재판이 공정한 재판입니까? 재판은 공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법조계의 상징이 저울 아닙니까?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우주와 그 안의 생물들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자연주의적 설명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창조주가 계심을 우리 내면의 본성이 알고, 또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이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주가 계심을 보여 줍니다. 날 때부터 장님이고, 귀먹어리였던 헬렌 켈러의 가정교사로 온 설리번 선생님이 헬렌과 어떻게 대화를 할까 고민하던 중, 손가락에 글씨를 써주며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손바닥에 물을 떨어 뜨려 주고 water 라고 써 주는 식으로 한 단어 한 단어씩 가르치면서 그녀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이라는 단어를 가르쳐 주었을 때, 헬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설리번 선생님이 하나님의 존재를 가르쳐 주기 전부터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있었어" 라고.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감각합니다. 모를 리가 없습니다. 온갖 그럴듯한 이론으로 하나님의 계심을 부인하는데 훈련되어 부인하는 것이지,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을 감각합니다.
로마서 1:21–23 (NKRV)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 본성이 알고 또 만물이 창조주에 대한 넘치는 증거를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만, 이 창조주를 존경하지도 않고 그에게 감사하지도 않기 때문에 지성이 그 지각이 너무 어두워졌습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미련해졌는지 하나님 대신에 사람이나 새나 짐승,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자기들의 신을 만들고 절을 합니다. 썩어지지 않고 죽지 않으시는 창조주 대신에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썩어질 이런 짐승이나 벌레 모양의 신을 만들어 대치합니다. 내 죄를 깨닫게 하고, 나의 비참함을, 나의 더러움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을 직면하느니, 차라리 이런 형상으로 거짓 신을 만들어서라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악하고 거짓된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3:19–21 (NKRV)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습니까? 그들의 죄악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가,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존재, 그의 신성을 마주하게 하면서 사람들이 자기의 죄, 자신의 무력함, 자신의 불의를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를 미워하고 그를 지워버리고 싶은 것입니다. 진리를 즉 진실을 직면하기 보다는 그것을 덮고 억눌러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4:12–13 (NKRV)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사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것까지 다 드러납니다. 밝은 빛으로 온 방이 밝혀졌을 때 처럼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일이 매주 예배시간마다, 매일 새벽예배마다, 매일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일어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어찌할꼬? 어찌할꼬?” 하며 주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이런 일을 게으르게 하면, 그 밝히 드러나는 일이 온 땅과 하늘이 불에 말려 없어지는 것 같이 사라지고 실 한 오라기 걸친 것 없이 완전히 발가벗겨진 상태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날 드러납니다. 그때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날마다, 매 주마다 말씀에 의해 발가벗겨지는 것이 좋습니까?
사람들이 왜 우리를 미워하고 배척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보면 하나님이 생각나고 자기 죄가 생각나고 다가올 심판의 기운이 느껴지기 때문에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까닭 없이 사람들이 여러분을 미워하고 배척하면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확실히 속했다는 증거이니까요.
로마서 1:24–27 (NKRV)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사람들이 하는 아주 희한한 짓, 너무 이상한 짓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하나님을 거짓신으로 바꾸는 것이고, 두번째는 짝짓기의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23절부터 ‘바꾸다' 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창조주 하나님 대신 피조물로 거짓 신을 만들어 교환하고, 자기의 성적 짝을 동성으로 바꾸는 것이 인간이 하는 가장 어처구니 없는 행동 대표입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얼마나 어리석으면 창조주와 피조물을 바꿉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온 우주보다 크신 분인데, 그런 하나님을 잠간 있다가 썩어질 피조물로 그런 대치물로 바꿉니까? 어처구니가 없지요. 우리 가까이 있는 개나 돼지나 소도 자기가 암놈인지 숫놈인지 알고, 자기 짝이 암놈인지 숫놈인지 압니다. 예네들은 어떤 학교도 다닌 적이 없어요. 학위 같은 것도 없어요. 그래도 알아요. 그런데 세계의 유수 대학을 나온 자들이 자기가 남자인기 여자인지 모르고, 인간의 성이 몇 가지이냐고 하면 무한대로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기 위해서 무슨 학위가 필요합니까? 참 희한한 세상입니다. 최근에 미국의 대법관으로 임명을 받게 되는 한 여성이 청문회에서 “여성의 정의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으니까 “저는 생물학자가 아니라서 모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남성, 여성이 무엇인지 아는데 무슨 학위가 필요합니까? 이제는 다 비겁해지고 남 듣기 좋은 얘기만 하는 세상이니까 생물학 박사들에게 물어도 모른다고 할 세상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성이 얼마나 타락했냐 하면 개, 돼지의 지성 만도 못한 지성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데요? 창세기로 가보겠습니다.
창세기 3:4–5 (NKRV)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와가 그 열매를 먹은 동기가 어디 있나요? 첫째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한 마음에 있습니다. 지음을 받은 존재가 자기를 창조한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고자 한 것은 반역입니다. 사탄이 지은 죄와 다를 게 어디 있습니까? 둘째는 자율적,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자 함에 있었습니다. 지음을 받은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이며 옳고 그름의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데, 이 위치를 벗어나서 스스로 법을 제정하고 스스로 판단(심판)하는 독립적, 자율적인 존재가 되고자 한 것입니다. “옳고 그름은 내 스스로 판단할거야. 나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싫어. 나는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사는 것이 싫어. 내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거야. 하나님의 뜻 그런 것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이렇게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 마음’ 입니다.
로마서 1:28 (NKRV)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Καὶ καθὼς οὐκ ἐδοκίμασαν τὸν θεὸν ἔχειν ἐν ἐπιγνώσει, παρέδωκεν αὐτοὺς ὁ θεὸς εἰς ἀδόκιμον νοῦν, ποιεῖν τὰ μὴ καθήκοντα,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함'에 있습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인식 안에 하나님 두는 것을 가치 있는 일로 여기지 아니 하므로" 이런 뜻입니다. “조사하다, 면밀히 밝히다" 라는 뜻을 가진 dokimazo를 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adokimos인 상태 즉 실패한, 자격을 잃은 상태에 버려 두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은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어떤 학생에 대해서 포기하는 일이 그 학생에게 좋은 일입니까?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포기하는 단계까지 오면 그게 좋은 것입니까? 하나님이 “야 그 놈은 그냥 내버려 둬라. 난 포기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그게 좋은 일입니까? 마치 이런 그림과 같습니다. 어떤 집에서 가수를 초청하고 악단을 초청하여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며 파티를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줌-아웃 해서 보니까, 그들이 있는 바닥이 천천히 움직여 용광로 쪽으로 떨어지기 직전입니다. 상실한 마음 가운데 내어 버려 두셨다는 말이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은 징계하시지만, 어떤 자들은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이런 자의 미래는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손을 안 보시니까 계속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고 방자히 행합니다.
이어서 29-31절에 나타난 인간의 온갖 죄악상은 다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진 상태에서 합당치 못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29–31 (NKRV)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로마서 1:32 (NKRV)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이 시대는 악을 권하지 못해 미칠 것 같이 행하는 세상입니다. 어린이들을 성전환시키지 못해 미친 자들이 부모나 기독교기관이나 기독교인 의료인이 어린이가 성전환수술을 원할 때 금하지 못하도록 법을 제정하려고 합니다. 혼자 하나남의 법을 어기고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을 끌고 들어가려고 온갖 노력을 다 쏟아 붓고 있습니다.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미국은 세계 각국에 동성결혼을 합법화 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을 따라하지 않으면 비문명국, 인권이 없는 나라 취급합니다. 악을 권장하지 못해 안달이 난 나라가 되었습니다. 뭐 좋은 거라고 남에게 권장합니까? 선을 악하다고 하며 벌 주고, 악을 선하다고 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검은 것을 하얗다고 하고, 하얀 것을 검다고 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단 것을 쓰다 하고, 쓴 것을 달다고 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저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창세기 삼 장과 로마서 장을 그것도 18절부터 아주 자세히 두고두고 묵상하십시오. 인간의 문제에 대한 깊은 인식과 이해가 없으면 결코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여기서부터 2장, 3장에 걸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비참한 존재이고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지 자세히 설명한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 시대의 기독교가 왜 약할까요? 이 두 가지 핵심적인 교리, 이런 신앙고백을 말하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가지가 없으면, 예수님은 단지 좋은 선생님에 지나지 않는 그런 신앙이 됩니다. 오늘날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이 두 가지 핵심교리를 믿지 않는 자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배시간에 왜 사도신경은 외운데요?
우리의 비참한 상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이 두 가지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에덴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인류 역사가 증명을 합니다. 이 낙원에, 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은혜, 대속의 은혜로 됩니다.
히브리서 10:19–22 (NKRV)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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