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 멀리 보지 못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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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엣 것 외에 관심이 없는 신자는 장님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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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8–9 NKRV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이 말씀의 원어적 표현대로 하면 “너무 근시안적이라서 장님이나 다를 바 없는" 이라고 표현됩니다. 바로 앞에 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마치 벌레가 바로 눈 앞에 잎파리 외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 오늘 내가 앉은 잎파리는 진액도 많고 싱싱하다" 하면서 오늘은 이 잎파리에 머물고 내일은 바로 옆의 잎파리로 이동하면서, 시야가 딱 거기까지인 벌레와 같은 삶입니다. R.C. Sproul이 세속주의를 ‘here and now’ 라고 표현한 것 처럼, 당장 눈 앞에 있는 것 외에 아무 것도 관심이 없는 벌레와 같은 삶을 바로 앞의 구절 8절에서 ‘아무 영향력도 없고 열매 없는 삶’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아무 가치있는 것도 이루지 못하고 열매 없는 삶,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에 아무 진척이 없는 자, 눈 앞엣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장님 같은 자이지만, 이런 것이 충만하게 있는 자는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 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5–7 NKRV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한 마디로 말하면 성도 다운 삶이고 다르게 표현하면 성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신칭의의 교리 즉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방종의 근거로 여깁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가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에베소서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8–10 NKRV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 아무 공로 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은 우리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그의 작품입니다. 우리가 행한 선한 일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고 오직 그의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선한 일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들을 성도라고 성경은 부릅니다. 영어로 하면 saints 입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선한 일을 하도록 구별하신 자들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원어로 ekklesia 라고 합니다. ek는 out of 라는 뜻이고, klesia는 ‘부르심을 받은’ 그런 뜻입니다. 성도라 함은 밖으로 불러 낸 무리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무리 가운데서 따로 불러내신 무리를 말합니다. 그러면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구약의 의식적 율법을 보면 금지된 음식이 있고, 허락된 음식이 있습니다. 곤충, 과일, 물고기, 가축 등 여러 종류에 대해 규정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공통성이 있습니다. 가축 중에는 갈라진 굽이 있으면서 되새김질을 하는 가축만 허락됩니다. 갈라진 굽은 마치 신발과 같아서 여기 저기 배설물이 길에 널려 있던 시대에 자기 자신을 이 오물로부터 분리하며 사는 동물입니다. 메뚜기 같은 곤충은 점프를 하며 이동합니다. 발을 붙이고 살지만 최소한 붙이고 이동할 때는 질질 몸을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폴짝 뛰어 건너갑니다. 땅에 기는 벌레는 먹을 수 없습니다.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는 물고기는 먹을 수 있으나 비늘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고 땅에 묻혀 사는 물고기는 금합니다. 흙탕물 같은 이 세상에서 완전히 동화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비늘이라는 차단막으로 자신을 분리하고 살며, 지느러미가 달린 몸으로 물살을 거슬러 움직이며 삽니다. 뱀장어처럼 바닥에 붙어 살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은 이 흙탕물 같고 오물이 가득한 세상에서 되도록 자기 자신을 구분하여 삽니다. 이 세상에 만연한 사상, 종교행위, 행태에 동조하지 않고 삽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오염되는 것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도는 항상 자기 자신을 구분하며 삽니다. 그러니까 주변의 사람들은 우리를 불편해 합니다. 동화 되는 것 같은데, 결국은 동화되지 않고 무언가 다르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냥 불편합니다.
구약에서 금지된 부정한 동물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맹수나 맹금류는 인류가 타락하기 전 원래 모습이 아닙니다. 홍수 이전에는 이 땅의 씨 맺는 채소가 먹을거리였으나, 홍수 이후부터는 하나님이 육식을 허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 상태 특히 아담이 타락하기 전 상태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저주가 내리고 변형된 상태가 맹금류, 맹수이고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 등입니다.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은 항상 타락 이전의 낙원을 사모하며 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염원하며 살지, 이땅에서 천 년 만 년 살 것 같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 처럼 살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주변 이웃들의 주관심이 무엇입니까? 부동산, 주식, 자녀교육, 취미, 애완견 이런 것들이죠. 이런 것에 관심 갖는 것이 나쁠 것은 없습니다.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하고, 현실적인 판단도 잘 하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우리 관심의 전부일 때 문제가 있습니다. 마치 벌레가 자기 눈 앞의 잎이나 주변의 나무 정도가 관심의 전부인 것 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높이 나는 새가 전체를 내려다 보듯이, 더 나아가서 인공위성에서 지구 전체를 내려다 보듯이, 우주의 역사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큰 일을 한꺼번에 우리 눈에 넣고 살아야 그리스도인 답습니다. 천지창조부터 인간의 타락, 여자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물로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은 사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모세와 출애굽, 여호수아, 다윗, 이스라엘의 포로기, 귀환,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오순절 성령강림, 교회시대, 주님의 재림과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이 모든 것을 우리 마음에 담고 산다면, 우리는 눈 앞의 것에 전전긍긍하며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베드로후서 1:3 (NKRV)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그의 영광과 탁월함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신적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광에 그리고 그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 가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셨고, 또 그런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후서 1:4 (NKRV)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여기서 두 가지가 대비가 됩니다. ‘보배롭고'와 “썩어질'이, ‘신성한 성품’과 ‘정욕'이 대비 됩니다. 한 쪽은 말할 수 없는 가치와 고결함이 있고, 그 반대편에는 썩어질 정욕이 있습니다. 이렇게 대비를 이루고 보면, 우리가 추구할 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해집니다. 어떤 쪽을 추구하는 것이 가치가 있습니까? 다시 5절로 가봅시다.
베드로후서 1:5–7 NKRV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여기서 왜 ‘그러므로' 라는 말이 나옵니까? 4절에 나온 것과 같은 하나님의 거룩한 초대가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으니 이런 삶을 살아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베드로후서 1:8–9 NKRV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이런 것이 없는 삶은 아무 열매도 영향력도 없는 삶이 될 것이고, 이런 것이 있는 삶은 열매 맺는 삶, 영향력 있는 삶입니다.
베드로후서 1:10 (NKRV)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물론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 얻는 것이고, 하나님이 한 번 구원하신 이들은 하나님이 결코 잃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수동적으로 구경만 한다든지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이 명령에 합당한 삶입니다. 구원을 얻되 계속 실족을 반복하며 사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삶이 좋습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백 번 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구원 받은 변화가 삶에서 나타나지 않을 때 자기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지 않았는데 자기가 구원 받은 것으로 알고 참된 회개를 하지도 않고 나태한 마음, 거짓된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구원의 확신이 없어 흔들리는 것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이 쓴 [죄인의 괴수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라는 책을 읽어 보면, 이 사람이 구원의 확신에 이르는데 수 많은 고뇌의 과정을 거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고뇌 속에서 자신의 죄악됨으로 심하게 괴로워 하던 중에 복음의 의미를 참되게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날 구원의 확신은 너무 피상적입니다. 사람의 죄악과 비참함이 얼마나 심한지 미쳐 깨닫기도 전에 구원의 확신을 강제로 심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가까이 할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성품을 본 받는 자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죄악됨과 연약함을 더욱 더 알게 되고, 그렇게 할 때 우리도 존 번연 처럼, 스펄전 처럼 자기의 영혼의 비참함을 인하여 심하게 슬퍼하고 애통해 하게 되며, 그런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가 얼마나 큰 지 점점 더 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게 됩니다.
베드로후서 1:11 (NKRV)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여러분이 구원 받은 것이 맞는지 아닌지 아슬아슬한 상태가 아니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시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13:18–23 NKRV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밭의 비유 중에 돌밭에 떨어진 씨나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처럼 열매 맺는데까지 자라지 못하는 그런 믿음으로 살고 싶습니까? 적어도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길 위에 씨가 뿌려진 분들은 아닐 것입니다. 복음이 어느 정도라도 감흥을 주었으니 이 예배당에 계시겠지요. 그런데 복음을 들은 자들 중에 처음에는 크게 감동 받고 좋아하다가 이 복음으로 인해 환난이나 핍박이 오면 물러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돌밭에 뿌린 씨 같습니다. 흙이 얕아서 금방 싹이 돋아나왔으나 곧 햇볓에 말라 시들어버린 식물과 같습니다.
가시덤불 밑이 뿌려진 씨도 싹이 납니다. 그러나 위에 가시덤불이 햇볓을 막아 더 자라다가 맙니다. 세상의 근심과 재리의 유혹이 그 사람이 자라는 것을 막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좋은 밭에 뿌린 씨처럼 잘 자라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열매 맺는 삶이 되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가요? 게으르고 수동적이고 눈 앞엣 것만 관심을 갖는 벌레 같이 근시안적인 열매 없는 삶에 머무르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보배롭고 영원하며 빛이 바래지 않는 영원한 기업에 합당한 삶, 우리를 부르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영적으로 지독한 근시가 아닌가요? 혹시 영적으로 장님은 아닙니까? 아니면 독수리처럼 시야가 넓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다 시야에 두고 사는 분입니까? 하나님의 창조부터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다 보며 넓은 시야 속에 사는 현명한 사람 맞습니까?
여러분의 삶은 열매 맺는 삶입니까? 세상 근심과 재리의 유혹에 막혀 성장이 멈추지는 않았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곤란한 일을 당했다고 믿음이 시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초대에 믿음으로 연합하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십시오. 두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눈 앞의 이익이나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유업을 추구하고 하나님께 인정 받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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