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의 가장 치명적인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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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가장 치명적인 적 / 교만은 우리 삶에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서론]
여러분,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시나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교만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교만한 사람이라고 말하면, 남을 깔보는 사람, 자기 잘난 맛에 으시대면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밥맛 떨어지는 사람들 아닌가요?
그런데 여러분 주위에도 이런 교만한 사람 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생각나는 얼굴들이 몇몇 있을 것입니다.
사실 유재석씨가 어느 연예인들보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도 그가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연예대상을 수없이 탄 유재석씨가 갑질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이처럼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교만한 사람들을 싫어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은 세상의 교만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교만하지 않게 보더라도 교만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스스로가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교만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은 사람이 판단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의 뿌리에도 이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으로 가장한 사단의 꾐에 빠져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과를 먹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 불순종이라는 죄를 저지른 동기가 바로 ‘교만’입니다.
사단이 가진 최고의 독약이 바로 ‘교만’인데 이를 아담과 하와가 먹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그래서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잠언말씀처럼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교만때문에 망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과연 누가 교만한 사람인지 깨닫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본론]
오늘 말씀에서 베냐민 지파 사람이 이스라엘의 패전 소식을 전합니다.
4장 앞부분에 보면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1차 전쟁에서 4천명이 죽는 패배를 당했고, 2차 전쟁에서 3만명이 죽는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이 패배의 소식을 실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전쟁터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 사람으로 인해 성경의 카메라는 한 사람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게 누구일까요?
바로 엘리 제사장입니다.
3만명이 죽은 처참한 전쟁터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그 군인은 실로에 가서 사람들에게 패배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는 패배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썼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극도의 슬픔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모습을 하면 ‘아 뭔가 큰일이 났구나’하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습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자신들의 마음이 찢겨질 듯 아프다는 의미이고, 띠끌을 뒤집어 쓴다는 것은 자신이 티끌과 같이 비참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이런 모습을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전쟁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3만명이라는 대부분의 군사들이 죽었고,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도 전사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입니다.
언약궤가 무엇인가요?
언약궤는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성막을 다루었을 때 설명했습니다.
성막은 거룩한 순서대로 바깥뜰, 성소, 지성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거룩한 곳, 지성소에 유일하게 있는 것이 바로 언약궤입니다.
이 언약궤 위에는 두 명의 천사가 날개로 덮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곳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1년에 딱 한 차례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바로 언약궤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난 것이고 이는 곧 나라가 망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큰 일난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엘리 제사장도 마음 속으로 걱정하고 있는 게 자기 자식들의 안위가 아니라 언약궤입니다.
혹시라도 언약궤가 잘못 되었을까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것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패배 소식은 먼저 백성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엘리가 알기도 전에 먼저 온 성읍이 알고 울부짖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통은 실로라는 곳의 지도자인 엘리 제사장에게 먼저 전달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백성들은 다 아는데 지도자만 맨 나중에 안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옷을 찢고, 머리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 썼는데 그것을 모를 리가 있습니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이 모습을 통해 엘리 제사장의 무딘 영적 감각과 무능력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근거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15절입니다.
‘그 무렵, 엘리는 아흔여덟살된 노인으로서 눈이 어두어져서 앞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엘리의 육체적 상태를 설명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런 심각한 이야기 속에서 갑자기 엘리의 상태를 설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엘리의 영적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가 앞을 거의 볼 수 없었다는 것은 그의 영적 어두움을 의미합니다.
그는 육체만 늙은 게 아니라 영적 감각도 퇴보한 것입니다.
그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또다른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그가 ‘의자에 앉아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궤를 그렇게도 걱정했다면 의자에 앉아있었을까요?
엘리 제사장은 1장에서도 한나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왔을 때 의자에 앉아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힘드니까 앉아있을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그런 의미로 표현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결국 그 의자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18절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궤에 대한 소식을 전할 때에, 엘리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으로 쓰러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있기를 좋아하더니 결국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죽음입니까?
앞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야할 제사장이 벙어리가 된 것입니다.
대신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백성들에게 전달합니다.
이는 엘리제사장이 하나님과 많이 멀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말씀을 우리는 신약성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 제자들을 가지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붙어있지 않은 가지, 즉 자신과 인격적인 교제가 없는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가지가 되어 밖에 버려져 결국 불에 태워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얼마나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습니까?
예배는 안 빼먹고 나오는데요? 큐티도 안 빼먹고 하는데요? 기도도 정기적으로 하는데요?
제가 묻는 말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주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어떤 여성을 좋아해서 제가 가진 돈과 시간과 열정을 다 쏟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매랑 사귀는 줄로 알았습니다.
제가 사귀자는 말은 안했지만 정말 사귄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 여성은 저를 떠나면서 자기는 사귄게 아니고 저한테 마음을 준적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아 며칠동안 누워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저만 혼자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나 혼자 열심히 북치고 장구치고 한다고 그게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보장해주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질문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내가 주님의 뜻을 아는 게 내 삶에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주님과의 친밀함이 진정으로 내 삶의 에너지가 되고 있습니까?
주님과 나누는 교제가 내 삶의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내 생각과 판단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혼자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엘리는 전쟁도 대패했고, 아들들도 모두 죽었고, 언약궤도 빼았겼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40년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내온 지도자인데 하나님과 좀 멀어졌다고해도 너무 허망한 죽음이 아닐까요?
엘리 제사장이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길래 하나님은 이토록 비참한 결말을 맞도록 하셨을까요?
2, 3장에 보면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두차례나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엘리 가문의 심판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고 말합니다.
어쩌다가 엘리 가문은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일까요?
첫번째 이유는 아들들의 죄악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엘리 아들들의 죄악은 2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아들들은 제사드리는 사람들의 제물을 빼앗았고, 성전에서 섬기는 여인들과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엘리는 그들의 죄악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들들의 죄악을 제대로 막지 못한 이유를 성경은 그가 하나님보다 자신의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자어‘소중하게’에 해당하는 ‘중’자는 ‘무거울 중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보다 자기 자식을 더 무겁게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무겁다’라는 의미를 가진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 즉 영어로 Glory를 뜻하는 카보드’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이 ‘카베드’,즉 ‘무겁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하나님을 무겁게 여긴다는 의미이고, 이게 바로 하나님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무겁게, 더 소중하게 여겨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8절 뒷부분에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엘리 제사장이 의자에서 목이 부러져 죽은 이유를 그가 늙고, 몸이 무거웠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의 몸이 무거웠다는 설명을 통해 그가 하나님보다 자신의 자식들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진짜 무거워야 할 것은 자기 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마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에 실패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교만입니다.
그의 가문이 이렇게 비극적인 심판을 받은 것은 그가 영적으로 무뎌졌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는 그의 교만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교만이자,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입니다.
엘리는 수십년동안 제사장을 담당하다보니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교만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제사장인데 아들들을 더 소중하게 여겼고, 자신의 육체를 살찌우는 일을 더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영적 교만함은 패배한 전쟁에서도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이 1차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엘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렸어야만 했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죄를 먼저 찾아봤어야 했습니다.
패배소식을 전달한 군인처럼 1차 전쟁에서 패배했을 때 하나님 앞에 옷을 찢고, 먼지를 뒤집어쓰며 슬픔을 표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다른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가면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싸우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치 언약궤를 부적처럼 여긴 것입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통제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매우 위험하고 교만한 행동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처럼 내 소원을 이루어주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보다도 내 뜻이 이루어지는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내가 교회 열심히 다녔으니까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대학교 3학년때 예수님을 만난 후 너무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리더도 했고, 새벽예배도 3년 개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취업할 때 자꾸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안한 친구들도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데 저는 그게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왜 신앙생활 이렇게 열심히 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하고 분노했습니다.
저는 이해할수도 없고, 인정할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냥 좋은 기업에 취직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만 여겼습니다.
언약궤를 앞세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저는 하나님을 제 취업의 성공을 위해 앞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찾지 않고 내 뜻에 따라 하나님을 조종하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은 저를 어느 누구도 교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저는 제일 교만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서의 핵심 구절중 하나가 2장 30절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엘리 가문이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 구절 안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존중히 여긴다’는 표현은 또다시 ‘카베드’, 무겁게 여기지 않았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엘리는 이스라엘 장로들이 1차 전쟁에서 패배 후 언약궤를 가지고 전쟁터로 나가자고 제안했을때 그들을 적극적으로 막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약간의 근심이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둔 것입니다.
아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가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을 방조한 것이 바로 그의 교만때문입니다.
그 결과 1차 전쟁때는 4천명이 죽었는데 2차전쟁에서는 3만명이 죽었습니다.
제사장 두명이 다 죽었고,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
언약궤를 가져갔는데도 이렇게 처절하게 패배한 것은 하나님을 무시한 그들에게 하나님이 진노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멸시하는 자들을 경멸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다시 처음에 했던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가 교만한 자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보다 나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내 일하는데는 수십시간을 써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위해서는 단 한시간도 내지 못하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알아가는데 있어서는 적은 돈도 아까워하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내가 보기에, 그리고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겸손해 보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교만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이 사탄이 가진 최악의 독약인 이유는 자기 스스로도 교만한 지 잘 모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만은 다른 사람들도 속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며 우리 마음의 중심을 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교만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라고 주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제대로 점검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언약궤를 매고 나가는 엄청난 실수를 할 지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은 영적으로 무디고 교만한 엘리처럼 서서히 무너지고 말것입니다.
우리의 몸에 건강검진이 필요하듯 우리의 신앙도 건강한지 점검하는 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은 모두 주님을 나 자신보다 더 무겁게 더 소중히 여기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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