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

사무엘상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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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새로운 소망은 애통에 찬 한 사람의 기도에서 시작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시나요?
(네~)
그럼 우리의 삶에 우연은 없고, 모두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시죠?
예수님은 참새 한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셨거든요.
(맞습니다)
그럼 우리는 왜 기도하나요?
어차피 하나님이 자신의 뜻대로 다 이루실거라면 우리가 기도할 필요가 없잖아요.
지난 주일 우리는 룻기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에게 인생에서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은 나오미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나오미와 룻, 보아스의 선한 마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선한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뜻은 무조건 이뤄지는 것일까요?
그럼 기도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데 있어 직접적인 원인이 될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는 우리가 선한 마음을 품게 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으로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과정에 우리를 동참하게 만들어주셔서 우리가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아이가 야구배틀을 잡는데 아빠가 뒤에서 함께 잡고 쳐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본론]
오늘 말씀에 나타난 사건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사사시대에서 왕이 통치하는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사시대 끝자락에 일어난 일이라고 보면 됩니다.
사사 시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문제가 생길때마다 여러 사사들, 영웅들을 세워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종교적, 도덕적 타락이 심각해져 갔습니다.
사사기 끝부분에 종교지도자 레위인의 타락이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사무엘서는 이런 어두운 영적 분위기 속에서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 구조상으로 따지면 사사기 다음 룻기 그 다음 사무엘상이 등장합니다.
룻기에서 하나님은 사사 시대라는 암흑기에도 나오미라는 한 여인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셨고, 다윗이라는 왕이 그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사무엘서 역시 사사 시대의 암울한 분위기를 한 가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가정을 주목하시는데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엘가나 가정입니다.
‘엘가나’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소유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하나님이 소유하게 되셨을까요?
이 가정을 소개하는 문장이 1절에 나옵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그 위 할아버지들까지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뼈대있는 가문처럼 보입니다.
이 계보만 보면 마치 엘가나가 오늘 말씀의 주요인물처럼 보입니다.
엘가나의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3절에 보면 그는 매년 가족들과 함께 이틀길이 걸리는 실로에 가서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경건한 사람이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하던 사사 시대에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3절에 보면 그 당시 제사장이 홉니와 비느하스였는데 이들은 오늘 말씀에도 등장하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정말 문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2장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드리러 온 사람들 제물 빼앗고, 제사 도와주는 여자들과 간음까지 저지릅니다.
이렇게 제사장들도 타락하는 시대에 엘가나는 참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가정에서 주목하는 인물은 엘가나가 아니고, 다른 사람입니다.
누구일까요?
2절에 보면 엘가나의 두 아내가 소개됩니다.
엘가나가 경건한 가정이라고 했는데 왜 아내가 두명일까요?
첫째 부인인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부유한데 그 재산을 물려받아 가문을 이어갈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첫째 부인의 이름은 한나이고, 두번째는 브닌나입니다.
한나의 이름은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브닌나의 이름은 ‘다산’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나는 이름의 의미는 은혜인데 정작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브닌나는 그 이름 그대로 자식을 많이 낳았습니다.
이 사실만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마치 브닌나처럼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가정의 문제는 곧, 한나의 문제였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의 문제는 매우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여성을 소유물처럼 생각했기에 마치 쓸모없는 사람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불임 여성은 사람들에게 수치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룻기에서 본 것처럼 계대 결혼같은게 있었던 것이죠.
형제중 누군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다른 형제가 결혼해서 아들을 대신 낳아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경건한 가정이라고 해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신앙생활 잘하면 내 삶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거야.
좋은 일만 있을거야.’
그게 솔직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예수님을 잘 믿을까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내 삶에 아무 문제가 없기를 위해 기도하지만 문제가 있어야 기도하게 되는 게 우리들입니다.
이게 우리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항상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한나는 사람들에게 수치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나의 마음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아래 부인이던 브닌나였습니다.
흔히 크리스천들이 농담처럼 ‘나를 분이 나게 하는 사람을 브닌나, 브닌나’라고 부르잖아요.
6절입니다.
주님께서 한나의 태를 닫아 놓으셨으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다.
사극같은데 보면 왕실에서 아들 낳은 후처가 얼마나 갑질을 합니까?
그런것처럼 지금 브닌나도 한나에게 갑질을 하는 겁니다.
브닌나가 이렇게 한나를 질투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4, 5절입니다.
레위기에서 배운 것처럼 화목제를 드리면 그 제사를 드린 사람이 남은 고기를 다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인 엘가나가 브닌나와 브닌나의 아들, 딸들에게 한 몫씩 나눠주었습니다.
그럼 한나는 아이가 없으니까 한 몫만 받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하니까 두 몫같은 한 몫을 챙겨준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 부분을 두 몫이라고 말하지만 원래는 한 몫인데 많이 준 것입니다.
우리 식당가면 2인분 같은 1인분 주라고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남편이 한나를 위해 풍성하게 준 것이죠.
브닌나는 이게 못마땅한 것입니다.
애를 이렇게 많이 낳았으면 자기를 더 사랑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 화가 나는 것이죠.
이런 브닌나의 시기, 질투심때문에 한나도 힘든 것이고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브닌나같은 존재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화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브닌나같은 존재를 만나면 너무 피곤하고 힘이 듭니다.
저는 군대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 참 힘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이런 사람 만나면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브닌나때문에 한나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에도 브닌나같은 존재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들때문에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이런 존재들을 붙여주신 이유가 있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브닌나를 주님이 붙여주셨다고 믿으십니까?
아멘하기 참 힘듭니다.
자, 그런데 한나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문제는 또 있습니다.
바로 남편 엘가나입니다.
한나를 사랑하는데 뭐가 문제일까요?
공감능력이 없습니다.
남편들이 대부분 그렇죠.
한나가 브닌나때문에 화가나고 마음이 힘들어서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열받아 죽겠는데 밥맛이 있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남편이 한나를 위로해 줍니다.
8절입니다.
여보, 왜 울기만 하오? 왜 먹지 않으려 하오? 왜 늘 그렇게 슬퍼만 하는거요? 당신이 열 아들을 두었다고 해도,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만큼 하겠소?
이게 공감입니까?
그래서 남편들이 욕먹는 것이죠.
경건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긴 한데 공감능력이 없어요.
내가 사랑해주고, 잘 챙겨주고 하는데 열아들 부러워할 필요없다는 말이잖아요.
자기 입장에서 말하잖아요.
그러니 한나에게 남편의 사랑도 위로도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6절을 다시 한번 보면 한나의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주님이 한나의 태를 닫아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5, 6절에서 두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한나 입장에서는 자신이 불임을 겪는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밖에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들의 또다른 고통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신데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느냐 하는 것이죠.
나오미도 그랬었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우리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줍니다.
이런 고통이 있으니 남편의 위로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잠시 위로는 될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위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런 일들을 겪습니다.
내 힘으로도, 남의 도움으로도, 인간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큰 질병이나 큰 사고도 우리가 막을 수 없고,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런 큰 문제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해결할 수 없어서 무력함을 느끼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남편, 자식의 문제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대표적인 것이죠.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큰 문제는 한나처럼 왜 하나님이 내게 이런 고통을 주는 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게는 딱 교회가 그런것 같습니다.
어떻게하면 좀 더 예배때 하나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을 지 매번 고민합니다.
분명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시작한 교회인데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내 설교가 부족한가?
예배 순서가 문제인가?
내 기도가 부족한가?
그럴 때마다 한없는 연약함과 무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런 고통가운데 있던 한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마 이런 고통의 문제를 해석할 수 없어 하나님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중에도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실 수는 없다며 하나님을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반응이 있습니다.
바로 그 문제와 고통을 내게 주신 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나는 후자를 선택했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한나는 가족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몰래 자리를 떠서 성전에 와서 기도합니다.
한나는 마음을 다해 기도합니다.
11절입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저를 기억하셔서 주님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님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첫 마디가 만군의 주님입니다.
만군의 주님이란 전능하신 하나님, 즉 almighty God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자극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마치 여성이 태속에 있는 아이에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 감정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몇번이나 반복합니까?
자신이 주의 종이라고 낮추면서 ‘불쌍히 보시고, 기억하셔서, 잊지 않으시고’모두 비슷한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낮아져서 간절히 구하는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볼 것은 이 기도가 서원기도라는 점입니다.
서원기도는 조건과 약속이 등장합니다.
주님이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주님께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이 주시면 그건 제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드나요?
어차피 주님께 바칠거면 뭐하러 주라고 하나?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한나는 지금 하나님께 완전히 맡긴 것입니다.
한나는 한두번 기도한 게 아니고 계속해서 기도하다가 결론을 이렇게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서원기도는 함부로 할 수도 없고, 함부로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웃기는 장면이 하나 등장합니다.
한나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엘리 제사장이 한나가 술취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14절에보면 엘리 제사장이 언제까지 술에 취해 있을 거냐면서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합니다.
당시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소리를 내서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소리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이 한나가 술에 취했다고 착각한 것이죠.
이런 제사장의 모습은 당시 영적으로 둔감한 종교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사 시대가 왜 영적 암흑기인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한나가 무슨 문제로 기도하는 지도 모르더라도 뭔가 감은 잡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런 제사장의 모습은 현재의 목회자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목회자가 성도의 삶에 큰 관심이 없고, 영적 감각이 너무나 무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영적 둔감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술 좀 먹지 말라는 엘리 제사장에게 한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술에 취한 게 아니고,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그렇게 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나쁜 여자로 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자 엘리 제사장이 뭐라고 합니까?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대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단어 하나 하나 보자면 목회자로서 충분히 해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상투적인 말입니다.
한나의 사정에 대해서 그리 큰 관심이 없이 내뱉는 기계적인 답변입니다.
그만큼 엘리 제사장은 영적으로 둔감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나는 이런 상투적인 엘리 제사장의 말을 듣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로는 음식도 먹고 얼굴에 슬픈 기색도 띠지 않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이 대답을 듣고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한나는 제사장의 말을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기도를 했기 때문에 마음이 평안해진 것입니다.
그것을 제사장의 말을 통해 기도응답으로 여긴 것이죠.
실제로 한장만 넘기시면 한나가 곧장 응답을 받아서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한나가 낳은 아이가 누구일까요?
바로 그 당시 이스라엘을 뒤집어놓은 영적 거인인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사사 시대를 끝장낸 마지막 사사이자, 제사장이었습니다.
한나의 이런 간절한 기도는 사무엘이라는 영적인 거인을 낳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목사로서 두려웠습니다.
저는 이 엘리 제사장처럼 제가 영적으로 둔감해질까봐 두려웠습니다.
성도들의 문제에 무관심하거나 제대로 영적 진단을 내리지 못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은 목회자가 아무리 부족해도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구나.
정말 다행이다.
내가 부족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는구나.’
이게 감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목사인 제가 부족해도 하나님은 부족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점이 하나 생깁니다.
과연 엘리 제사장의 한마디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요?
그런 영적으로 둔한 목회자의 말을 어찌 하나님이 들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엘리제사장은 한나의 마음을 몰랐지만 하나님은 모두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게 제사장의 말과 시기가 딱 맞아 떨어졌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엘리 제사장의 믿음때문이 아니고 한나의 기도와 믿음때문입니다.
[결론]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러가지 상황을 통해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살면서 우리를 분이나게 만드는 브난나를 만나기도 하고,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겪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어 더 큰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내 문제의 답이 있다고 믿고 무릎꿇고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가족들이 내 마음을 위로해주지 못해도,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이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다 아시고, 내가 하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낮은 마음으로 겸손히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기도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한나와 같은 기도의 사람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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