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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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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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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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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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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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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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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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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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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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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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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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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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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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환영인사)
(찬송가-321장)
(기도)
(장례광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룻기 3:14-4:6”)
오늘 이 시간, “쉼이 없고 다함이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겠습니다.
우리는 한 주간 동안, 룻기를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을 어떻게 회복시켜 나가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1장에서 룻과 나오미는 자기 인생의 지붕과도 같았던 남편을 잃고, 생존하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돌아오는 과정도 참 처절하고 마음이 저려오는 순간들이었죠.
그런데 그녀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인애의 통로, 보아스를 순적하게 만나게 됩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인애를 베풀었는데, 그런 그녀가 이제는 보아스를 통해 인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보아스의 추수 밭에서 순적하게 보리 이삭을 주울 수 있게 되었고,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되었죠.
이렇게만 보아도 참 큰 회복이 임한 걸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애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룻은 이제 후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아스 발치에 누워있을 수 있게 됩니다.
보아스의 밭에서 보리 이삭을 주울 뿐만 아니라 이제는 보아스에게 청혼까지 하는 룻에 대해 염치 없다며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더하면 더했겠죠.
우리는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뒹굴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찾아와 주시어 우리의 더러운 죄를 모두 씻어 주시고, 우리의 신랑이 되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했나요?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염치 없이, “네 주님.
저의 신랑이 되어주세요.
제 인생을 구원해 주세요.”라고 대답했죠.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인애를 입었는데도, 우리 신랑 되신 주님을 버리고 죄를 따르며 섬기려고 했던 적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인애를 쉬지 않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인애’를 입은 자들입니다.
인애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인애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헤세드, 인애는 변함 없고 다함 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헤세드는 참 많이 사용됩니다.
창세기 39장을 보면, 감옥에 갇혀 있던 요셉에게 ‘헤세드’를 베풀어 주셨다고 기록되었고, 사무엘하 7장을 보면,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건지시고 끊임없이 ‘헤세드’를 베풀어 주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느헤미야 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변함 없는 인애, 헤세드를 베푸시며 성벽을 재건해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아스 또한 하나님의 변함 없고 다함 없는 인애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룻과 나오미에게 인애를 베풀었던 거죠.
성도는 인애를 입음으로 그치는 자들이 아니라, 또한 인애를 베푸는 자들입니다.
보아스의 모습을 통해 성도는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인애’를 베풀 수 있는지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대지
첫 번째, 인애를 입은 자는 다른 이에게 쉬지 않고 인애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돌보지도 말고, 다른 이들에게만 집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우리에게 붙여주실 때, 그들을 내 생활의 우선순위로 정하고, 빠르고 확실하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를 보았는데도 모르는 척하고 그를 위한 일을 뒤로 미룬다면, 인애를 입은 자라고 할 수 없겠죠.
보아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보아스는 룻의 청혼을 받고 보리를 여섯 번 되어주고 시어머니에게 곧장 돌려보내는데요.
룻을 가만히 자기 곁에 계속 두면 역사가 속히 이루어질 수 없었겠죠.
그래서 보아스는 빨리 일처리를 진행하고자 룻을 나오미에게 곧장 보냈던 겁니다.
이 보리 여섯을 쥐어주는 행위는 룻의 청혼에 대한 승낙의 의미로 룻에게 인애를 베푸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뿐만 아니라 나오미까지 고려했던 마음이 넓은 자였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돌아오자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질문합니다.
보아스가 청혼에 승낙했는지를 묻고 있는거죠.
룻의 대답을 들어볼까요?
17절을 우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보아스는 룻에게 빈 손으로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 ‘빈 손으로’라는 단어는 룻기 1장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죠.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비어’라는 말은 3장에서의 ‘빈 손으로’라는 단어와 동일한 히브리어입니다.
나오미는 스스로를 텅 비어 있는 자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나오미에게 룻을 보내어 이렇게 따스히 말해줍니다.
“나오미여, 당신은 텅 빈 자가 아닙니다.
당신과 룻은 저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죠.
하지만 그 우연은 하나님의 인애였습니다.
제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당신의 삶을 인애로 계속 채워나가실 겁니다.
그러니 이 보리 이삭을 받아주십시오.”
나오미는 룻을 통해 그 말을 듣고 직감했습니다.
하나님이 후손의 문제를 신실하게 이끌어 나가실 것을 말이죠.
그래서 며느리 룻에게 믿음을 담아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일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고 말합니다.
이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이끄실 것을 믿고 앉아 기다리자는 거죠.
그리고 또 한가지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보아스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쉬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정말 보아스는 쉬지 않았을까요?
자기 일은 일단 내려놓고, 나오미와 룻부터 챙겼을까요?
4장 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보아스는 나오미의 예상대로 쉬지 않았습니다.
4장 시작부터 쉬지 않고 성문으로 올라간 보아스! 일이 되어질 것이 예견됩니다.
이렇게 인애를 베풀기 위해 쉬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순적하게 일이 이루어지는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보아스가 앉아 있더니 ‘마침’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갑니다.
이 ‘마침’이라는 말은, 2장 4절에서도 사용됩니다.
보아스와 룻의 첫만남에서 사용되었죠.
룻기 기자는 의도적으로 이 ‘마침’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인애를 베푸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가 순적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에도 풍성히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인애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가득할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쉼이 없으시고 다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또한 다른 이들에게 쉼 없이 다함 없이 인애를 베푸시기를 축복합니다.
2대지
두 번째, 인애를 입은 자는 자신의 손해까지 감수하며 다른 이에게 인애를 베풉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에게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기업을 무를 수 있겠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아무개는 자신이 무르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는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무르는 행동이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오미가 많이 늙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죠.
그렇게 되면 그 땅이 영원히 자기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래서 기업을 무르겠다고 나선 겁니다.
하지만 보아스가 정곡을 찌르죠.
우리 함께 4장 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보아스의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이보세요.
나오미의 밭을 사는 것만으로 안 돼요.
나오미의 며느리 룻과 결혼해야 되고 그 낳은 아들의 이름을 당신의 이름이 아니라 죽은 룻의 남편의 이름을 붙여줘야 합니다.
그럼 당신이 나오미뿐만 아니라, 룻도, 룻의 아들도 다 먹여 살려야 하고, 그 땅은 결국 룻의 죽은 남편의 이름을 가진 그 아들이 상속받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업을 무르겠습니까?”
기업 무르는 일의 참 의미를 깨달은 아무개는 곧바로 무르지 못하겠다며 발을 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보아스는 왜 아무개에게 4장 5절의 발언을 했을까요?
자신은 그 손해를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아니, 자신에게는 그것이 손해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구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인애는 항상 하나님 측에서 손해였거든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걸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기뻐하셨거든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도 그렇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기업을 대신 물러 주셨습니다.
무엇으로 무르셨죠?
자신의 핏값으로 무르셨습니다.
그저 몇 방울 흘리셨나요?
남김없이 다 쏟으셨습니다.
그게 ‘인애’입니다.
너무 사랑해서 다함 없이 다... 주고싶은.... 전혀 손해라고 생각되지 않고 오히려 더 기쁘고 내가 채움 받는 것 같은.... 그것이 인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아무리 쏟고 또 쏟아도 다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큰 사랑을 우리에게 계속 쏟아주시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기업을 포기하였죠.
그리고 그의 포기한 기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포기하는 삶으로 예수님의 향기를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손해 보는 것과 포기를 즐겨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주신 말씀을 새기며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쏟아주신 그 쉼 없으시고 다함이 없는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다른 성도들과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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