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과정설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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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3:3–5 NKRV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 말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된거냐? 우리 조상들이 죽은 후로부터 만물은 항상 그대로인 것을 보니 그런 약속을 어떻게 믿겠느냐?” 이런 말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동일과정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지층들을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환경으로 관찰해보면 매년 하천에 몇 mm씩 퇴적층이 쌓이고 또 쌓이면서 장구한 세월이 지나서 우리 눈에 관찰되는 지층들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연장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사고를 외삽 영어로는 extrapolation 이라고 합니다. 지금 제 손 안에 부러진 막대기(a pole) 하나가 있다고 합시다. 이 막대기 좌측에는 어떤 것이 붙어 있었는지 또 우측에는 어떤 것이 이어져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 길이는 얼마나 됐었는지 그 굵기는 어뗐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손에 들고있는 막대기 조각과 동일한 식으로 이어져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이런 식으로 추측해서 과거와 미래를 짐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무 확신도 없으면서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온당합니까?
성경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천지창조의 과정과 노아 홍수 이후에 일어난 일을 일부러 잊으려는 태도라고.
창세기 1:9–10 NKRV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조의 순서는 이렇습니다. 첫째 날에 빛과 어둠이 분리되었습니다. 둘째 날에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 물이 분리되었습니다. 셋째 날에 물과 육지가 나뉘었습니다. 넷째 날에 궁창에 광명체들로 채우셨습니다. 다섯 째 날에 하늘의 공간과 물을 생명체로 채우셨습니다. 여섯 째 날에 지면을 각종 동물들로 채우시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각 창조의 날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몇 째 날이니라"는 말이 반복되는데, 일곱 째 날에는 이런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미 창조는 완성된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합니다.
땅이 물에서 올라와서 각종 생물이 그 위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때는 이 순서가 거꾸로 돌아가서 땅이 다시 물 속에 잠겼습니다. 창조 과정 일부가 취소된 것입니다. De-creation 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끝난 후 땅이 다시 물에서 올라왔습니다. 이 세 사건이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라는 것을 일부러 망각하는거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창조도 물로 심판하신 것도 그리고 다시 땅이 회복된 것도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기억한다면, 주의 재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기롱하는 자들은 이런 분명한 사실을 일부러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6–7 NKRV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이전에 물로 온 세상이 심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앞으로 있을 최후의 심판의 선례를 남겨 주신 것이고, 두 번째 오는 심판은 불사름으로 심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는 온 세상이 심판 받는 것의 선례가 된 사건이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은 앞으로 올 불사람의 심판의 선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이 이 사건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7–39 NKRV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이 죄입니까? 사람이 살면서 응당히 있을 일들 입니다. 문제는 그게 전부 다인 것 처럼 사는 것입니다. 벌레가 당장 눈 앞에 있는 이파리 외에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here and now’에만 관심이 있고,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노아 때와 같이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8–9 NKRV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9절은 신학적으로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구절입니다. 모든 해석은 항상 문맥 속에서 해야 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으시는데 사실은 많은 사람이 멸망한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앞에 ‘너희' 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사람 중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0–11 NKRV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러나 그 날이 오면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교한 섭리의 손길로 우주의 질서가 유지되며 보존되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 우주의 질서가 우연의 산물이고 당연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의 사고는 항상 그렇습니다. 이 우주의 질서와 구조의 유지는 주께서 붙들고 계시는 동안만 유지되는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예배하지도 않습니다. 우주는 영원하다는 생각과 얼마나 다릅니까? 우주의 질서는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이 붙드시는 때까지만 존재하는 것 뿐입니다. 우주가 이렇게 붕괴될 것을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무한에 가까운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 어마어마한 낭비를 하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 온 세상이 우주의 아주 작은 한 행성 지구를 지키겠다고 난리인데, 이 지구가 없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가 불에 종이가 말리며 타들어 가듯이 하늘과 땅이 다 불에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지구가 그리고 이 위대한 우주가 없어진다니 얼마나 큰 낭비입니까?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길래, 하나님은 현재의 하늘과 땅을 거두워 가시는 것일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시대의 사람들의 환경운동이 무색해지게 합니다. 이렇게 우주도 가고 지구도 없어지지만 남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 온 삶입니다. 다른 것은 다 사라지고 우리 자신과 살아 온 삶이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이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명예롭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회적 지위, 재력, 가문, 학벌, 각종 수상과 훈장, 평판 등이 아닙니까? 이런 것을 얻고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다 거는데, 이 세상에서는 그 속에 얼마든지 거짓이 숨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노벨상도 명예훈장도 종교적 명성도 우리의 진짜 모습을 가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종교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가진 자에게 주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른다" 이렇게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하나님 앞에서는 “네 재물과 함께 지옥에 들어가라" 이런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 현실을 알고 사는 것과 무시하고 사는 삶이 얼마나 다릅니까? 이런 현실을 알고 사는 신자들은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경건하게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없이 산다면 진짜 믿음이 있는 것인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목사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추구보다 더 고귀하거나 고상한 가치관과 추구를 어느 종교, 어느 철학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그 날에 하나님 앞에 숨기워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알고 사는 것 만큼 순수한 삶이 있을까요? 기독교는 인간이 가진 가장 고상하고 가장 지혜로운 가치체계입니다.
베드로후서 3:12–13 NKRV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가 왜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합니까?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을 평화, 아름다움, 다시 고통이 없고 눈물이 없을 것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곳은 의가 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이 땅에서 탄식합니까? 의가 거하지 않기 때문 아닙니까? 우리는 마치 소돔성에 살던 롯 처럼 악에 둘러싸여 살면서 탄식합니다. 마치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외로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며 의를 지키는 노아 처럼 악이 관영한 이 세상에 대해 탄식하며 삽니다. 악을 선하다고 하고, 선을 악하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탄식합니다. 거짓 신을 섬기라고 강요하는 세상, 영아를 살해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법을 만드는 세상, 남자를 여자라고 하는 세상, 악한 통치자들이 전쟁을 부추키고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탄식합니다. 제발 의로운 통치자가 의와 공평과 인애로 통치하는 세상을 보고 싶다 탄식합니다. 이 시대는 무도덕(amoral)의 세상입니다. 지금은 도덕의 기준도 없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만든 세상입니다. 다가올 주님의 심판보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멸망을 두려워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시며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경제적 자유를 줄 이 세상의 구원자를 갈망하는 세상입니다. 1세기 때도 사람들은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다가 올 무섭고 준엄한 심판,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심판이 다가오는데, 그때는 땅도 하늘로 불 위의 종이 같이 말려 올라가고 모든 체질이 다 녹아 없어지는데, 그 준엄한 주님의 심판 대신 기후변화라는 사이비 종말론이 세상을 지배하고, 사이비 구원론이 이 세상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분입니까? 이제까지 살아 온 경험에 비추어 보니까, 주님의 재림 그런 것 없다고 판단하는 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분명히 알려 주셨고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으로 이미 선례를 보여주신 그 경고를 따라 최후의 심판을 대비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불의가 가득한 이 세상에 소망을 둡니까 아니면 의가 거하는 곳 즉 의로우신 통치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입니까? 국회의원 시켜준다면 양심을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의 말씀을 붙들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이 땅에서 얻을 손해와 부당한 대우를 기꺼이 받을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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