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열리면 눈이 열린다

박재진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47 views

신앙의 모순을 경험하는 이유 1.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기대 2. 경험에 의존하는 신앙 신앙의 모순을 해결하려면 성경을 열어라

Notes
Transcript
Sermon Tone Analysis
A
D
F
J
S
Emotion
A
C
T
Language
O
C
E
A
E
Social
View more →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쓰신 <영적 침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침체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침체한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제대로 대변할 수 없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왜 침체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모순이라 말하는가?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지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말그대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무엇을 통해서? 복음을 통해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간단히 요약하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 받았고,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진짜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주신 사건 아닌가? 그분의 부활을 통해 우리 역시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며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그 능력! 이게 복음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침체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모순이라고 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주님을 믿는다 말하는데, 어떻게 낙심하고 좌절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 있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 모순을 우리 모두가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 살아계시다고 최선을 다해 찬양하고 고백하는데, 그 고백이 예배당 안에만 머물러 있다. 마주하는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아갈 때가 참 많다.
오늘 본문을 보니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중 두 사람도 이 모순을 피할 수 없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눅24:13) ‘그날에’ 그날이 언제인가? 24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눅24:1) 안식 후 첫날.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전혀 기쁨이 없다. 오히려 침체되어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 24:17)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도 들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눅 24:22–23) 주님의 죽음과 부활. 복음의 핵심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우울하고 낙심하여 터덜터덜 엠마오에 있는 집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이 살아나신 날, 이들은 슬퍼했다. 모순 아닌가? 가장 기뻐해야 할 날, 소망으로 가득해야 할 날에 우울해 하고 침체에 빠져있는 두 제자.
나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가장 많이 들은 말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목사님 왜 이렇게 살이 빠지셨어요.” 이상하다. 다이어트를 한 것도 아닌데, 살이 빠진다. 엊그제는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한 순장님이 흰머리가 많이 생긴 것 같다 하셨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너무 동안이라 일부러 흰머리 기르고 있습니다.” 어제는 순장님 몇 분이 예배당 자리를 세팅하러 오셨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목사님, 뽀앟던 피부가 많이 상하셨어요.” 피부는 원래 안 좋았다. 뽀얗다는 표현은 생전 처음 듣는다. 어쨌든 내가 많이 안스럽게 보였나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성도들에게 죄송하다. 내가 위로해야 하는데, 오히려 걱정을 끼쳐 드린 건 아닌지. 솔직히 말하면, 왜 힘들지 않았겠나? 이찬수 목사님이 말씀하셨지만, 당신 스스로를 ‘잔소리꾼’으로 자처하며 1년 반을 보내왔다. 그 시간을 통과하면서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자각할 수 있었다. 담임목사로서의 무게감. 성도님 한 분 한 분 분립교회로 가기로 했다는 말씀이 너무 감사하고 고마우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한 인생이 다가오는 것이기에, 눈물로 결정하시고 너무나 훌륭한 이찬수 목사님과 분당우리교회를 떠나 오신 분들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무거움이 있다. 정말 잘 섬겨드려야 하는데. 정말 행복하게 해 드려야 하는데. 그러다보니 기쁨이 사라지고 침체가 되더라. 목사로서 참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최근까지의 내 마음이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데, 내가 복음 안에 있는데, 교회를 세워가는 영광스러운 일에 불러주셨는데, 왜 이렇게 살이 빠지고, 흰머리가 늘어가고, 피부가 상할 수밖에 없는가? 왜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모순을 피할 수 없는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아시고 오늘 본문을 우리에게 주셨다. 나는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 신앙의 모순에 빠져서 슬픈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그 이유 두 가지를 살펴보길 원한다.

신앙의 모순을 경험하는 이유: 1.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기대

본문의 두 제자는 왜 신앙의 모순을 경험했는가? 그 첫 번째 이유는 이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기대. 이들에게는 주님을 향한 한 가지 기대가 있었다. 21절을 보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눅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여기서 ‘속량’이라는 단어는 ‘대가를 지불하여 포로를 해방시키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해하고 있던 ‘속량’은 로마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로 인해 로마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된 나라를 만드는 것 말이다.
그들은 왜 이런 기대를 가지게 되었나? 19절을 보라.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눅 24:19)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이들이 예수님을 보니 보통 분이 아니시다. 설교가 얼마나 좋은지,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셨다. 온갖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 내가 만약 이런 능력을 가졌다면, 여러분은 나를 어떻게 대하겠는가? 말씀이 얼마나 은혜롭고 능력이 있는지, 듣는 사람마다 회개의 기도가 터져나오고 삶이 변화된다. 손을 대기만해도 위궤양이 치료 된다. 주름이 펴지고 흰머리가 검은 머리가 된다. 그러면 여러분은 저에게 기대하지 않겠나? 능력 많은 목사라고, 이분 밑에 있으면 다 잘 될 거라고. 그러나 미리 말씀드리지만,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다. 절대로 기대하지 마시라. 어찌되었든, 주님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기 때문에, 이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이 분이라면 우리를 로마로부터 건져내실 분이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다! 그래서 이들은 인생을 걸었다. 밤낮으로 주님을 따라다녔다. 그런데 그렇게 기대했던 주님께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눅 24:20)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아니, 이럴 수 있는가? 우리 민족의 문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줄로 알았는데,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기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 아니었겠나? 이들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이 기대에는 십자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주님이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모든 것이 잘 되고 형통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내 안에도 이런 기대가 있었다. 일만성도 파송운동이 하나님이 주신 꿈이고, 그 꿈을 확신하여 부산에서 이곳으로 왔다. 그래서 다 잘 될 줄 알았다. 예배당 장소도 순탄하게 찾을 줄 알았다. 그런 기대가 있었는데, 쉽지 않은 것이다. 야탑, 이매, 삼평일대를 다 뒤졌다. 마땅한 장소가 나왔다. 그런데 교회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 평생 이렇게 많은 거절을 당해본 적이 없다. 29인 목사님들이 한창 장소를 구하고 있을 때, 농담으로 주고 받는 말이 있었다. 어떤 교회가 마지막까지 남을 것인가? 그럴 때마다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우리는 아니지요? 그런데 막상 장소가 준비되지 않아 드림센터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성도님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고, 한편으로 기대에 부응해 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야속하기도 했다.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이처럼 우리 내면에는 한 가지 기대가 있다. 주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내가 주님을 따르면 다 잘되야 된다. 예수 믿으면 만사 형통해야 한다. 그런데 그 잘 되는게 과연 무엇인가? 대부분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십자가 없는 이 땅에서의 삶 아닌가? 고난도 다 비껴가고,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유명해지고. 그러니 주님께 거래 관계로 다가간다. 이렇게 눈물을 머금고 일만성도 파송운동에 순종했는데, 주님 앞으로는 꽃길만 걷게 해 주셔야죠. 내가 이렇게 헌신하고 교회를 섬겼는데, 우리 자녀들 좋은 학교 가고 좋은 직장 주셔야죠. 그런데 막상 인생이 그렇지 않다는 현실을 직면하면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조금만 힘들어지고 어려움이 찾아오면 주님께 등을 돌리기 일수다. “하나님, 제가 기대했던 것은 이게 아니잖아요! 이게 뭡니까 도대체!”
선안남씨가 쓴 <기대의 심리학>이란 책에서 기대했던 것이 어그러질 경우에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절망, 공격성, 집착. 너무 잘 분석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절망이 찾아온다. 그리고 분노를 터뜨리며 원망한다. 그 상황에 매몰되어서 그 일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영적인 눈이 가리워져서 살아계신 주님을 바라보지 못한다. 두 제자가 그랬다. 15절부터 보자.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24:15–16) 아니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주님이 마스크를 쓰셨다면 이해가 된다. 나도 처음 분당우리교회 와서 성도들을 줌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예배당에서 성도들을 마주치게 되면,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마스크를 써서. 마스크가 얼굴의 절반을 가리니 당연하다. 그런데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는 주님을 어떻게 알아보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눈이 가리어지다’ 할 때 ‘가리어지다’라는 단어를 보니 그리스어로 ‘크라테오’다. ‘강하게 붙잡다’는 뜻이다. 이들은 무엇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는가? 기대가 꺾여서 절망한 마음, 그 상황,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 절망스러운 순간, 거기에 매여 있다보니 바로 앞에 나타나신 살아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폴 트립이 <고난>이라는 책에서 말한 것이 정확하다. “절망감은…부정적인 것이 전혀 없는데도 부정적인 것을 보게 만들고, 바로 눈앞에 긍정적인 것이 있는데도 그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신앙의 모순을 경험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주님은 여전히 살아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주님을 보지 못한다. 왜? 십자가 없는 삶을 기대하기 때문에. 잘못된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신앙의 모순을 경험하는 이유: 2. 경험에 의존하는 신앙

그런가하면, 우리가 신앙의 모순을 경험하는 두 번째 이유는 이것이다. 경험에 의존하는 신앙. 쉽게 말해, 내가 경험해야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겠다는 태도다. 앞서 말씀드린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 책에서 영적 침체의 궁극적인 원인을 불신앙이라 지적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왜? 살아계신 하나님을 내가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두 제자도 마찬가지다. 22절부터 보자.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눅24:22–24) 이들이 놀란 이유가 무엇인가? 주님을 따랐던 여인들이 전한 소식 때문이다. 주님의 시체를 두었던 무덤에 시체가 사라졌다. 그런데 그 여인들이 하는 말이 가관이다. 천사를 만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살아나셨다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눅24:11) 그래서 베드로도 가보고, 제자 중 두 세 명이 직접 확인하러 갔다. 그런데 진짜 무덤이 비어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없었다. 살아나신 주님. 24절을 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눅24:24)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정황상 무언가 일은 일어난 것 같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예수를 보지 못했다. 살아나신 예수가 없다. 그러니 믿을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이 두 눈으로 살아계신 주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놀라운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슬픈 기색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 아닌가?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그들이 왜 슬퍼하겠는가? 그런데 본문을 가만히 묵상하다보니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15절을 보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눅24:15) 아니, 지금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계신 분이 누구이신가? 주님 아닌가? 부활하신 주님을 지금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주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니 말이 안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웃긴데 슬프다. 이들의 모습이 꼭 내 모습 같아서. 주님을 믿지 않는 분들을 전도하다보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이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면 내가 믿겠다.” 그러면 우리가 뭐라 말하는가? 하나님은 증명하는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다. 그런데, 주님을 모르는 분들의 그 말이 종종 내 입술에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조금만 상황이 어려워지면 하나님 살아계신 겁니까? 진짜 계시다면 이럴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살아계신 주를 목청 높여서 찬양하지만, 작은 일에 일희일비 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 아닌가? 이러한 우리의 실체가 바로 두 제자의 웃픈 상황과 오버랩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신앙의 모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낙심하고 절망하는 이유는 십자가가 없는 삶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말은 하면서 어려움이 다가올 때 그분을 의식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우리의 연약함이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연약함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할 방법도 기록해 주셨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24장에는 두 제자의 불신앙과 대비되는 인물들을 기록하고 있다. 한 부류인 두 제자는 기대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절망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불신해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반면, 다른 한 부류는 똑같이 근심했지만 주님의 부활을 믿고 확신하여 다른 이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누구인가? 주님의 빈 무덤을 처음 발견한 여인들이다. 24장 1절을 보라.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눅24:1–4) 그들은 빈 무덤을 보았다. 주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근심했다. 그러자 그들 앞에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들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주님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자 그들의 근심이 사라지고 확신에 차서 다른 사람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들의 변화의 핵심이 무엇인가? 천사들을 보았기 때문인가? 성경은 아니라고 증언한다. 8절을 보자.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눅24:8–9)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들이 근심에서 기쁨으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신앙의 모순이 찾아오는 이유 두 가지를 버리면 되는 것인가? 그것이 첫 걸음일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보다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 원리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잘못된 기대를 안고 주님께 실망한 그들, 살아계신 주님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던 그들. 주님은 그들에게 어떤 처방을 내리시나? 성경을 가르치셨다. 성경을 열어 보이셨다.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5–27) 주님은 그들을 회복시키려고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다만 말씀을 가르치셨다.
사실, 주님은 이미 수차례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9장 22절을 보라.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눅 9:22) 18장에도 나온다.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눅 18:33)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을 놓쳤다. 그들이 만약 이 말씀을 기억했다면,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 삼 일 만에 살아나실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지 않았을까? 빈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 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살아나셨구나 라고 기쁨으로 외치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은 이 그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님이 오늘 그들을 찾아가셨다. 그들에게 성경을 열어 보이시려고. 그러자 그들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31절 보라. 새번역으로 읽어 보자.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눅24:31, 새번역)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그러자마자 주님은 그들의 눈 앞에서 사라지셨다. 주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안에 다시 새겨진 그 말씀으로 인해 주님이 보이지 않았지만 주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할 수 있었다. 비로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14:32)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리스어로 ‘풀어 주다’라는 단어가 앞에 나온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할 때의 ‘열리다’와 같은 단어다. 주님이 성경을 열어 주시니,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 말씀이 들어가니 그들의 마음이 다시 회복되었다.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마음이 다시 회복되니 다시 사명의 자리로 달려갔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누가복음 24:33)
이제 다음 주면 코로나19의 거리두기가 해제된다.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 이제 마스크만 벗으면 된다. 2년이 넘는 시간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다. 그런데 내가 심방을 하며 안타까운 것은 이 긴 코로나 기간동안 우리 성도들이 말씀을 놓쳤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은 너무 쉽게 잠금해제가 되는데, 성경은 왜 그렇게 열리지 않는지 모르겠다. 여러분, 거리두기가 해제됨과 동시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말씀과의 거리두기를 해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기대는 오직 말씀을 통해 교정될 수 있다.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때, 오직 말씀을 통해서만 믿음이 회복될 수 있다. 부활 주일에 주님이 가장 먼저 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고나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하길 원하는 것은 말씀의 회복인 줄 믿는다. 기쁨이되는교회는 말씀에 기초를 둔 교회가 될 줄 믿는다.
얼마 전 집에 선물 하나가 도착했다. 부산에서 사역할 때 함께 동역했던 청년이 보낸 것이다. 이 청년은 수 년 전에 아내와 내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된 청년이다. 유튜브로 준비기도회 영상을 보다가 내가 눈물을 소매로 훔치는 것을 보고 손수건을 보냈다. 손수건만이 아니라 쪽지 하나를 보냈다. 거기에 말씀이 적혀있었다. 마음이 너무 귀하고 격려가 되어 냉장고에 붙여 두었다. 아까 내 마음이 참 힘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던 즈음이다.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 곁에 갔다가 우연히 그 말씀을 보게 되었다. 이 말씀이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눈물이 팽 돌았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 이것이 내가 여기에 온 이유임을 다시 깨닫게 된 것이다.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지던지. 성경이 열리자 눈이 열렸다. 그 청년이 보내준 말씀으로 인해, ‘곧 그 때로 일어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신앙의 모순을 경험하고 있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말씀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성경을 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에 기록된 진리를 통해 여전히 살아계신 주님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의 입술에 이 고백이 있게 된다. 34절이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누가복음 24:34, 새번역)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우리 주님 부활하셨다. 그리고 여전히 살아계신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오직 성경을 열 때 볼 수 있다. 오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찾아가신 주님은 우리의 삶에도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신다. “곧 그때로 일어나” 이 놀라운 회복이 오늘 부활주일 예배 가운데 일어나게 될 줄 믿는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