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복음, 의심을 넘어 확신으로(요20: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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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주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신 것을 믿기 때문에 주일을 안식하면서 예배합니다. 그러면 사실상 매 주일이 우리에게 부활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매 주일을 작은 부활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반면에 모든 주일에 부활을 기억하며 예배드리지만 부활주일은 특히 더 그래야 한다고 해서 부활절을 큰 주일이라고 합니다. 큰 주일이 어딨고 작은 주일이 어디 있겠어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드릴 때 늘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자고 하자는 거예요.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이후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본문입니다.
우리가 기술이 고도로 발전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적이지 않으면 믿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부활인데 우리가 어떻게 부활을 믿을 수 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한 번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복음을 일치시키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일치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고린도전서 15장 4절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사된 지 3일 만에 살아나신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까지만 생각하는데 부활하고 하늘에 올라가신 것 그리고 세상을 심판하러 다시 오시는 것까지 복음의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이 실제로 복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부활, 승천, 재림까지 논리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를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제자들이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구나!”
그 후에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찾아가서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이렇게 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봤다는 것이죠. 신약성경이 원래 그리스어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그리스어 똑같은 말이에요. 헬라어로 살펴보면 여기 25절에 ‘말했다’라는 동사가 지속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어요. 계속해서 말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끊임없이 도마에게 찾아가서 이야기 했다는 거예요.
왜 끊임없이 찾아가서 이야기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으니까 그런 거예요. 그리고 도마가 여기에 대해서 선을 확실히 긋습니다. 도마가 뭐라고 합니까?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헬라어로 보면 가정법이 사용됐습니다. 못 자국에 손을 넣지 않는 이상은 안 믿는다는 거예요. 가정법을 썼다는 건 뭐예요.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부활은 없다고 확신하는 거예요. 내용상으로도 보세요. “손에 못 자국을 보며 손가락을 못 자국에 넣으며 옆구리에 넣으며...” 세 번이나 예수님의 흔적에 손을 넣어야 믿는다고 말합니다. 손에만 못자국 있어도 안 믿는다는 거예요. 좋게 말하면 굉장히 이성적이고 정확한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의심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에요.
그러면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고마 치아뿌라!”하고 그냥 가면 되는데 왜 끊임없이 도마에게 부활을 믿으라고 했습니까? 그 이유는 복음의 내용을 일치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똑같은 예수님의 제자 11명이 복음을 전하는데 10명은 부활의 사건을 전하고 도마만 부활을 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의 내용이 일치되지 않아서 복음 자체가 의심을 받게 됩니다. 11명이 모두 부활까지 전해야 복음에 신뢰가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고 하는 제자들의 복음이 일치가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복음 전파에 큰 장애가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의 진리를 일치시키기 위해서 도마를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찾아가서 설득을 한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이 설득해도 도마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제 누가 나서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직접 나서게 됩니다. 26절에 보면 8일 후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아마 부활한 몸은 폐쇄된 공간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 그런 몸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도마를 찾아가셨습니다. 10명의 제자만 부활의 복음을 믿고 도마가 부활을 믿지 않을 때 도마에게 부활을 보여주시며 예수님의 제자 모두가 부활을 믿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복음의 내용을 일치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들이 부활한다는 사실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려고 하신 거예요.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죽으심이 헛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을 복음을 제자들을 통해 정확하게 보존하기 위해 도마를 직접 만나셨습니다. 도마에게 부활하신 그분 자체를 보여주셨습니다. 도마가 부활을 믿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복음을 일치시켰습니다. 이제 이 열한 제자들이 열한 사도가 되어 세상에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러 다닐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부활하게 될 것을 전파할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질 준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복음을 정리하고 일치시키기 위해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적용) 그러면 이게 우리랑 무슨 상관일까요? 우리가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특히 복음의 내용 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내용을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부활의 복음은 그냥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복음이 정리되어서 우리에게 오기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복음에 대한 오해를 없애시고 제자들이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신앙의 인물들에 의해서 이 복음이 계속해서 전파되고 전수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내용은 확실한 절차를 거쳐서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내용을 진짜라고 받아들이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 안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믿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인물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고 예수님이라는 인물을 이순신 장군을 좋아하듯이 그냥 그 인물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좋아하는 정도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그래서 우리에게도 부활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도마처럼 부활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아에게 나타나시면서 부활이 없는 복음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의 기록을 우리가 봤기 때문에 우리에게 굳이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부활을 의심하지 않고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복음을 다 일치시키셨고 우리는 그걸 믿으면 됩니다. 도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지만 그게 도마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때 그게 도마에게 생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복음을 지키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일치시키기 때문에 복음 안에 있는 죽으심 부활 승천 재림을 의심하지 말고 믿을 수 있습니다.
2- 보지 않고 듣고 믿기를 원하신다.
(설명) 교회의 복음을 일치시키고 지키신 예수님께서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28절에 도마가 예수님을 보고 대답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한글로 성경을 읽는 거하고 다른 언어로 성경을 읽는거랑은 느낌이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한창 영어를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로 성경을 보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아마 여기 있는 친구들 중에선 저보다 영어를 더 잘 읽을 수 있는 친구들이 많기 때문에 할 수 있을 거예요. 영어로 성경을 읽으면 좋은 점이 대부분 한국 사람은 영어로 뭘 읽으면 천천히 읽게 되기 때문에 그게 성경을 자세히 보도록 합니다. 저 같은 경우 헬라어로 읽으면 더 느리고 천천히 보게 됩니다.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이 좀 특이한 부분이 있어요. 당신은 주님이고 당신은 하나님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도 있잖아요. 영어로 You are The Lord. You are God.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 My Lord. My God.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주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이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어요. 헬라어로도 소유격인 문법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더 로드가 아니라 마이 로드가 되었어요. 그 주님이 아니라 나의 주님입니다. 예수님이 나라는 존재에 의해서 규정되는 거예요. 무한하신 주님 앞에 ‘나의’가 붙었어요. 부활하신 주님과 나의 관계가 생긴 거예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라고 하면 느낌이 다르잖아요.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이시고 나와 관계를 맺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지금도 나와 관계를 맺으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거예요.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하게 믿게 된 거예요.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이게 도마가 참 불쌍한게, 다른 제자들도 다 보고 믿었지 보지 않고 믿은 제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건 모든 제자들에게도 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하고 이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리고 30-31절에 보면 쌩뚱맞게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쌩뚱맞게 다른 내용이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이때는 당황하지 말고 왜 이런 내용이 나오는지 잘 관찰해야 합니다. 이유 없이 이렇게 하진 않습니다.
자 29절에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고 믿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30절에 요한복음이 기록된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이건 무슨 의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않더라도 요한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것처럼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요한복음이 있는 이유가 그거예요. 성경이 있는 이유가 그거예요. 예수님을 단순히 역사적 인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31절에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경험한 것을 믿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이 경험이라는 것을 뛰어 넘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전달하는 책입니다. 요한복음 뿐 아니라 모든 성경이 다 그렇습니다. 3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도 많이 행했다고 말합니다. 여기 표적은 영어로 보면 ‘사인’이라고 되어 있어요. 표지를 말하죠. 무슨 표지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는 표지죠. 병자를 고치신다거나 죽은 자를 살리신다거나 이게 다 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된다는 표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이런 표지를 많이 보여주셨어요. 도마 앞에서도 많이 보여주셨겠죠. 그런데 이런 표지를 성경에 있는 것 이상으로 아무리 많이 보여줬어도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눈앞에 있는 뭔가를 본다고 다 믿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표지를 있는 대로 다 보여 주는 게 장땡이 아니라는 거예요. 표지는 성경에 기록된 만큼만 보고 믿으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을 잡아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사도들이 전한 복음 예수님께서 확실히 정리하시고 사도들이 기록한 그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요한복음 그리고 다른 성경을 보는 것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만 29절에서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들 성경 말씀만 보고도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도마처럼 의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지키신 부활의 복음을 굳이 예수님의 손의 못 자국을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책속에 나와 있는 역사적인 인물인 것을 뛰어넘어서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 나의 하나님이고 나의 주님이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되는 거예요.
(증명) 현대판 도마 같은 사람이 있는데요. 본문이랑 좀 상관 없는 이야기일 순 있는데 부활하고 관련이 있고 여러분이 관심을 가질 것 같아서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떤 형사가 있었습니다. 미제 담당 전담 수사관이었습니다. 이분이 35살까지 전형적인 무신론자였습니다. 신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누가 전도를 해서 마지못해서 교회를 갔어요. 말이 조금 새는 것 같지만 이래서 전도가 중요합니다. 자! 어쨌든 이 분이 교회에서 설교를 듣고 아 예수님이라는 분이 도덕교사로서 좋은 분이라고 동의를 한 것 같아요. 설교도 중요하네요.
그러다가 이분이 복음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까 이분이 무슨 일 하는 분이라고 했어요? 형사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포렌식 수사기법을 가지고 복음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1) 복음서 저자들은 사건 현장에 있었는가? 2) 그들의 기록은 정확하고 정직한가? 3) 그들의 증언은 다른 방식으로 입증될 수 있는가? 4) 그들에게는 복음서를 기록할 만한 숨은 욕망이나 동기가 있었는가? 등등의 질문을 가지고 복음서를 읽었는데 결론이 복음서의 증언은 맞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맞다는 거예요. 이 복음서 문서가 증인들이 뻔히 보는데 조작된 잘못된 문서라면 아직까지 남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중간고사 끝나면 이 책을 꼭 읽어보세요. 베테랑 형사 복음서 난제를 수사하다라는 책입니다. 추리소설 좋아하는 사람 꼭 읽어보세요. 코난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아무리 무신론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부활의 복음을 믿는 일이 생깁니다. 성경은 보지 않고 믿게 하는 복된 일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고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거예요.
(적용) 사람은 본능 자체가 직접 보고 믿는 것을 좋아합니다. 직접 경험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그랜드캐니언 사진을 봐도 별 감흥이 없잖아요. 제 친구가 대학 다닐 때 그랜드 캐니언을 직접 봤는데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그건 말로 못한대요. 그 웅장함이 직접 봐야 한답니다. 저도 그 이야기 들으니까 그냥 사진으로 보는 것 말고 직접 가서 보고 싶더라고요. 이게 우리 본능입니다.
또 우리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계속 훈련받았어요. 좋은 거예요.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나 내가 가진 정보를 토대로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발생할 수 없는지 판단하는 거잖아요. 일종의 추리입니다. 경험을 가지고 판단하고 추리하고 이게 본능입니다. 이걸로 참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해요. 우리가 만약에 예수님을 직접 본다고 해도 우리가 가진 경험, 판단, 추리력 이런 걸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 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요. 그게 우리 한계이고 죄인의 한계입니다. 도마 보세요. 성경에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기적들을 봤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부활도 믿는 게 맞죠. 근데 안 믿잖아요. 도마의 과학적 사고방식은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니까 본인도 부활하셨을꺼다.” 이렇게 작동하지 않았어요. “사람이 어떻게 죽다가 다시 살아나냐” 이렇게 오작동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과학적 사고방식을 믿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해요.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나에게도 부활하는 생명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전환문장)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의 내용을 정리하시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복음에 부활이 빠지지 않게 도마를 설득하시고 사도들의 복음을 일치시키셨습니다. 이 일치된 복음은 사도들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성경 자체를 믿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고 언젠가 다시 오실 것을 믿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부활의 복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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