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양심의 승리

베드로전서 강해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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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새벽기도에 오신 성도님들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인류는 오랜 세월동안 살아남고 승리하는 방향으로 발전을 도모했습니다.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서 농업을 발전시키고 비바람을 막기 위해 집을 지었습니다.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개인보다는 집단이 더 안전해서 무리를 지어 생활을 하고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인류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위험을 최소화 하는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외부의 적을 이기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지금도 이런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공부합니다. 그래야 취업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더 좋은 실적을 얻기 위해 다른 동료나 다른 부서와 경쟁합니다.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합니다. 표가 없으면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모든 기업이 광고라는 무기를 가지고 치열하게 경쟁 합니다. 총칼은 없지만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온갖 자극적인 콘텐츠를 무기로 삼아 매출을 올리기 위해 경쟁을 합니다. 그래야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시대에도 경쟁과 살아남기를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식당이 현장 판매 대신 배달을 선택했고 현장 강의들도 온라인 수업을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살아남고 이기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타인과 싸우고 남들을 밟고 일어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세상적인 방식을 초월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존전략, 필승전략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그 방법이 선한 양심에 있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선한 양심으로 한 주간 승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선한 양심이 없는 이들은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
(설명) 오늘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신약에서 어려운 본문으로 여깁니다. 어려운 본문을 읽을 땐 특히 전후 문맥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17절까지가 선한 양심을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 내용도 뭔가 선한 양심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유념해서 함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선한 양심이 없는 이들이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7절에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오고 18절에 이것을 잘 실천하신 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선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해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라고 하면서 앞에 언급된 선한 양심이라는 주제와 오늘 본문의 주제를 연결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선한 양심을 가진 분이 아니겠습니까? 선한 양심을 가지셨기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 고난을 감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양심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는 우리 안에 선한 양심 때문에 십자가를 믿습니다. 우리 안에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알고 순종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양심과 우리의 양심이 연동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타락한 양심은 이런 작용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19절을 보면 이 선한 양심이 없어서 심판을 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옥에 있는 영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죽임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는데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단어는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보단 일방적으로 어떤 진리를 전달할 때 사용합니다. 이걸 잘못 이해해서 소위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잘못된 가르침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19절은 예수님이 지옥에 갔단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 최후 심판이 선고되었다고 말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복음을 듣고 천국에 가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지 않아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중에 최후심판을 선고받은 이 ‘옥에 있는 영’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 실체는 20절에 나옵니다. 이들은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입니다. 그래서 죽은 후 그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전후 문맥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5절에 의하면 노아는 홍수가 임하기 전에 의를 전파하는 의의 전파자였습니다. 불순종하여 방주에 들어가지 않은 이들은 노아가 의를 전파할 때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아서 심판을 면치 못했습니다.
홍수 심판이 왜 일어났습니까? 홍수 심판은 네피림들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창세기 6장에 4절을 다함께 찾아보겠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읽은 후)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네피림은 6장 2절에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다르게 번역하면 신의 아들들입니다. 고대에는 영웅을 신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이 신의 아들이 네피림입니다. 네피림은 나팔이라는 단어에서 왔는데 나팔은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떨어진 불신자입니다. 이들은 고대의 영웅이고 힘이 있고 폭력의 시대를 풍미하던 자들입니다. 이 영웅들이 자식을 낳았는데 그들도 영웅이고 명성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힘을 의지하고 명성을 추구하고 힘의 논리에 충실하게 살던 사람이고 시대를 폭력과 악으로 물들였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시대를 타락시킨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오늘 본문의 관점에 의하면 선한 양심 대신에 타락한 양심을 가졌습니다. 이 타락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않고 자기 이름을 추구했습니다. 바벨탑이 무너진 것도 결국 사람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입니다. 힘의 논리를 가지고 떵떵 거리며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힘의 논리로 시대를 어지럽혔기에 창세기 6장 6절, 7절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작정했습니다. 이들은 힘이 있었고 명성이 있었지만 그 힘과 명성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다 물살에 쓸려 내려가 죽었습니다. 이 네피림 시대의 자칭 영웅들은 홍수 심판으로 심판 받고 죽은 그 영혼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옥’에 갇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그 옥 안에 선포될 때 영원히 심판 받을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힘, 명성 이런 것들은 그들에게 전혀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선한 양심이 아니라 타락한 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타락한 양심으로는 하나님께 회개할 수 없고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내가 낸데 하고 살다가 갔습니다. 선한 양심이 없어 심판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적용) 세상을 살다 보면 힘 있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돈이 많고 공권력이 있고 고급 정보를 접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사람 각자 자기 힘으로 자기 분야를 일구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것으로 이 땅에서 잠깐 좋은 것들을 누리겠지만 정작 선한 양심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선한 양심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감내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이 선한 양심이 없으면 네피림처럼 명성이 있고 힘이 있고 영웅 대접을 받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지푸라기 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오직 복음에 반응하는 선한 양심만이 심판을 면하는 능력이 됩니다.
2- 성도는 선한 양심으로 승리하게 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성도는 선한 양심으로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을 펼쳐 주시기 바랍니다. 3장 20절 중간에 보면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여덟 명은 노아와 그의 아내 자식들과 며느리들입니다. 네피림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아서 왕성하게 후손들을 남겼지만 그 많던 용사들, 명성 있는 자들 중에서는 한 사람도 구원 받지 못하고 그 시대에 겨우 노아의 가족들만 구원 받았습니다. 노아는 어떻게 그 시대의 생존자, 승리자가 되었습니까?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고 본문의 문맥에 의하면 선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의를 전파하는 선지자입니다. 노아에게 네피림 같은 힘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노아에게 네피림 같은 영웅적인 서사나 명성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노아는 그저 악한 시대에 선한 양심을 가지고 의를 전파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갔을 뿐입니다.
베드로전서의 기록목적은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것입니다. 노아가 베드로전서에 등장한 것은 베드로전서의 기록목적에 알맞습니다. 네피림의 시대, 자신의 힘과 자신의 명성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대에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보단 하나님의 이름을 중하게 생각하는 노아는 그 시대에 맞지 않은 나그네였습니다. 노아가 가진 것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노아가 심판을 면한 비결입니다. 당대 모든 힘 있는 용사가 하나님의 권능에 상대도 되지 않았지만 노아는 선한 양심으로 심판을 면했습니다.
20절 말미에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가 몇 명인가 나옵니다. 여덟 명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노아와 그 가족들이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숫자를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8이라는 숫자는 7일에 뒤이은 여덟 번째 날로 새 창조의 상징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상징성을 살려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 번째 날을 여덟 번째 날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습니다. 제 칠일이 안식일인데 그 다음 날 주일은 첫째 날이 아니라 이때까지 없었던 여덟 번째 날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요일이 주일입니다. 일주일 칠일이 지나면 다시 첫째 날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창조하신 새로운 날, 여덟 번째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8이라는 숫자는 새 창조를 상징합니다.
홍수 심판은 단순히 세상을 물로 덮어버릴 뿐 아니라 죄에 물든 세상을 깨끗이 씻어버리는 홍수 창조이기도 합니다. 선한 양심이 있었던 노아는 홍수 심판 혹은 홍수 창조 이후에 새로운 시대를 허락 받았습니다. 베드로전서 전체 주제가 나그네인 성도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는 여정을 설명하는데 노아의 여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노아는 선한 양심이 있었기에 네피림들과 달리 새로운 시대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했던 네피림들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지만 노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표현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맛보았습니다. 네피림들 사이에서 나그네 노릇할 때는 패배자 같았는데 선한 양심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니까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이 승리에 대한 표시가 바로 세례입니다.
21절에 굉장히 흥미로운 내용이 등장합니다. 홍수 심판이 있을 때 하늘에서 빗물이 내리지 않습니까? 본문은 노아의 방주가 이 빗물을 맞는 것을 세례로 묘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표시가 세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방주가 홍수로 인해 세례 받았다고 표현합니다.
물에는 죽음의 이야기와 동시에 생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홍수 심판 때에 물은 죽음을 가져다주는 재앙입니다. 하지만 선한 양심으로 홍수를 맞이할 때 그 물 안에는 죽음의 이야기 뿐 아니라 생명의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노아는 홍수를 통해 악한 시대, 네피림 시대, 폭력의 시대로부터 구원 받았습니다. 홍수가 네피림들을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도구인 물이 동시에 구원의 도구가 된 셈입니다. 선한 양심이 작동해서 노아는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고 죽음 가운데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홍수 세례는 죽음의 실체 가운데 생명을 증거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세례도 이런 내용을 반영합니다. 초대 교회는 세례식을 세례조라고 하는 욕조에서 시행했습니다. 세례 받는 사람을 물에 푹 담그는데 이건 죽음의 의미를 가집니다. 세상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례식의 물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물에는 동시에 생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은 악한 것을 씻어냅니다. 생명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지만 또 의에 대해서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세례식은 이 복음의 원리를 우리에게 표하기 위해 시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방주가 세례 받았습니다. 이전의 폭력의 시대, 네피림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옛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합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새로운 시대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는 세례는 이전의 죄악 된 삶을 청산하고 영생을 받았다는 의미가 있지만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는 표도 됩니다. 새 시대를 허락받은 승리자라는 표시입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 예수님께서 명령하셔서 교회가 베푸는 세례는 이 땅에 나그네로 사는 우리가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었음을 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의 시대, 죄악의 시대에 대해서 승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 세례를 부가적으로 설명하는데 무엇이라고 하냐면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표현합니다. 세례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하는 그 선한 양심을 구하는 사람, 그 선한 양심을 얻은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진정한 승리자는 선한 양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이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는 18절에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오고 중간에 노아에 대해 세례에 대해 설명하다 뜬금없이 또 22절에 또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문학적인 장치입니다. 18절과 22절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하늘로 올라가신 스토리가 선한 양심을 가진 이들이 승리한다는 이야기를 감싸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에는 선한 양심으로 승리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선한 양심으로 복음에 순종하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의 옛 사람도 죽었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실 때 우리의 신분이 땅의 신분을 초월해서 하늘의 신분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2천년 전 예수님의 처형 사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으로 세상에 대해 승리하는 우리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악한 시대에 힘의 논리를 추구하고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네피림 같은 자들이 아닙니다. 마치 나그네처럼 선한 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선한 양심에 따라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세상 사람들에게 지는 것 같습니다. 패배하는 것 같습니다.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진 이들이 결국 승리합니다. 악한 양심을 가진 이들이 결코 들어가지 못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며 선한 양심으로 승리하시는 한 주 보내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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