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함-섭섭함=감사함 (2st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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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25-32

예배를 본당에서 드릴까? 거절 당했던 이야기
우리 성도님들의 기도로 토요예배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휴스턴에 오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예배를 드리기에는 우리 청년들과 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에 ‘Recharge’기간을 선포하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작년 10월쯤, ‘아, 이제는 예배를 드려도 되겠다' 생각을 해서 예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먼저 ‘본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어떨까' 제안을 했는데 거절 당했습니다. 참, 섭섭했습니다. 속으로, ‘자기들이 나보다 기도를 많이 했어, 뭘 했어. 왜 목사 말을 안 듣는거야.’ 라고 비판의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섭섭함의 감정은 나도 모르게 점점 미움의 감정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면서, ‘아, 청년부 사역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의 섭섭함은 커져갔습니다. 이러한 섭섭함의 감정이 지속되니까 기도도 하기 싫고 영적으로 침체되는 것을 느낍니다. 여기서 깨달은 것이 사단은 때로는 섭섭한 마음을 가로채서 우리가 영적으로 침체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섭섭함이 증오로 바뀐 사람들 - 가롯유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서운한 감정을 느꼈던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그중에 한 사람이 가롯유다일 겁니다. 가롯유다는 제자 중에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유다는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화 30개를 받고 당시 예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죠? 성경은 먼저 그의 마음에 사단이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이유는 무엇이죠? 첫째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4-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둘째는 서운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눌 때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제자들이 근심하여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때 유다가 “랍비여 내니이까"라고 물어봅니다. 이때 예수님이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섭섭한 것입니다. 서운한 것이죠.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충고가 서운한 겁니다. 이 서운함이라는 감정이 사단의 올무가 되어 결국 예수님으르 팔아버립니다.
우리도 서운함을 느낀다
그런데 때로는 가롯유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교회를 다니며 열심히 충성 봉사하지만 목회자가 자신을 칭찬해주지 않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서운한 것입니다. 섭섭마귀의 올무에 걸리면 목회자를 비난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 버리는 겁니다. 직장 생활의 끝이 안 좋은 것도 바로 그런 겁니다. 그동안 월급 받고 생활하고 자식 먹여 살리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대우 잘 안해준다고 서운한 감정을 가지면 좋지 않은 결과로 끝이 납니다. 이렇게 서운함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사단은 어떻해서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감사와 서운함을 쌓는 세 가지 방법
열린교회 김필곤 목사님은 감사와 서운함을 쌓은 방법은 크게 세 가지라고 말합니다. 첫째, 감사는 감사대로 서운함을 서운함 대로 쌓은 방법입니다. 둘째는 감사와 서운함을 더하는 방법입니다. 서운한 마음에 감사함을 더하면 서운한 마음은 묻히게 되는 겁니다. 제가 문제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PPT). 우리의 마음의 감정을 10으로 잡을 때 감사한 감정이 8이 있습니다. 10개 일어난 일 중 8개는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2개가 서운한 일입니다. 자, 산수 문제 나갑니다. 그러면 8개중 2개를 빼면 몇이죠? 6개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운한 마음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감사와 서운함을 곱하는 거에요. 곱하기를 하면, 8x-2=-16 이 됩니다.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도 서운한 감정을 집어 넣어 유혹하듯이 오늘날도 그 무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보면서 아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왜 선악과를 주시지 않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게 맞나? 혹시 아까워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동산 모든 것을 다 주었는데 그것 하나 안준다고 섭섭해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작은 서운함을 사탄이 낚아 채어 문제를 키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내버립니다. 사울왕을 보세요. 사울왕이 왕인데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 하나로 서운함을 가지게 만듭니다. 그 작은 서운함이 불순종을 낳고 결국 그 인생은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감사함과 서운함을 따로 쌓는 것도 아니고, 감사함과 서운함을 곱하면 더더욱 아니됩니다. 곱하면 서운함 때문에 가롯유다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감사함에 서운함을 더해야 합니다. 서운함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섭섭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원리
돌아온 탕자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고, 보통은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아버지의 애타는 마음을 잘 보여주는 비유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리고 큰 아들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잘 보면 서운함의 원인을 알 수 있고, 그럼 어떻게 그 서운함을 극복할 수 있는지 세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원리는, 서운한 마음이 들 때 내가 받은 은혜를 세어보는 것입니다.
이제 큰 아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멀찍이 풍악과 춤추는 소리가 들립니다. 한 종을 불러 무슨 일인가 물으니까 아버지께 받을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다 쓴 동생이 돌아왔다는 거에요. 열을 받습니다. 화가 납니다. 아버지가 잔치집에 같이 가자고 해도 요즘 말로 삐져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따지잖아요. “내가 열심히 아버지 말도 잘 들으며 섬겼는데 나를 위해서는 잔치 한번 열어주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동생을 위해서는 잔치를 열어주시는가요?”
이 큰 아들이 왜 서운함을 느꼈을까요? 기대하지 않았으면 서운할 일이 없을 텐데, 기대했기 때문에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거나 그 기대에 반하는 일이 일어날 때 서운함이라는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서운하다는 말은 뭔가 마음에 차지 않을 때, 아쉽거나 섭섭한 느낌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능합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 “아, 오늘 스마트폰이 나를 섭섭하게 하네 혹은 오늘 요리한 음식이 나를 서운하게 하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연애하는 남녀가 처음에는 잘해주다가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을 때 서운해합니다. 아픈 부모를 모실 때 자신은 부모님을 위해 열심히 하는데 다른 형제는 한 달에 한 번도 찾아뵙지 않으면 형제들에게 서운해합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며 한 평생 살았는데 한 달에 한 번도 전화하지 않으면 자식들을 보며 서운해합니다. 제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시댁 식구들과 갈등이 있을 때, 남편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서운해합니다. 얼마 전에, 아내가 씨래기 국을 끓여주었는데 제가 실수를 하고 말았지 멉니까. “아, 우리 엄마 씨래기 국은 이렇지 않았는데.” 헉. 아내는 보나마나 서운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직장에서, 교회에서 열심히 헌신했는데 인정 받지 못하고 도리어 무시를 당하게 되면 서운합니다. 심지어는 욥처럼, 하나님, 왜 나에게 이렇게 대접하시냐면서 하나님께도 섭섭해할 수 있습니다.
서운해하는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무엇이라고 말하죠? 31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큰 아들은 자신만 따돌렸다고 서운해하는데,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소외시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을 위해 하루 잔치해주는 것을 보며 너는 서운해하는데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잔치에 있는 자식이라는 겁니다. 29절에 보면, 큰 아들은 자신을 아버지의 종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뭐라고 합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거에요.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겁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Son, you are always with me” 원어에 보면 “테크논”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쓰이는 단어입니다 (PPT). 큰 아들은 자신이 종이라고 생각되어 자신이 섬기는 만큼 보상이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열심히 했는데 열심히 한만큼 뭔가 돌아오지 않으니까 서운해한거에요. 그러나 큰 아들은 종이 아니라 아버지의 당당한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고난과 어려움을 겪으면 너무 쉽게 주를 위해 살았는데 왜 아프냐고 왜 가난하냐고 왜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왜 인정해주지 않고 사랑해주지 않느냐고 서운해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당신의 전부를 주셨잖아요. 나를 살리고자 자기 아들의 생명을 나에게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한다면, 조금 잃어버린 것, 조금 무시 받는 것, 조금 인정 받지 못하는 것, 조금 사랑 받지 못하는 것 별거 아닙니다. 영원토록 나와 함께하시고 나에게 영원한 천국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에 우리 마음 속에서 감사함이 다시 회복될 것이에요. 그리고 그 감사가 흘러 서운함을 덮게 되면 서운함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 서운함 감정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겁니다.
서운함은 섭섭함을 느끼게 한 그 사람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추측하고 확대해석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존재로 느끼고 거부나 무시당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큰아들은 동생을 위해 잔치해주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해서 차별대우한다고 생각하고 서운해하는 겁니다. 한번은, 휴청 찬양팀과 저녁에 회식을 하면서 “우리 예배를 위해 금식하자"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제 내면에는 ‘나만 토요예배를 위해서 열심히 한다'라는 열심을 포장한 높아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는 열심히 하는데 다른 청년들은 열심히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조바심에 “너는 왜 열심히 안해, 서운해"라고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금식하자'라고 에둘러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눈치 빠른 청년 한명이 저한테 말합니다. “목사님, 그냥 솔직히 목사님의 마음을 나눠주시면 저희도 그 부담의 짐을 나눠질께요" 이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저를 돌아보게 되고요, 서운한 감정이 들 때 이것을 빨리 말해야 서로 불편한 오해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호랑이와 암소
옛날에 호랑이와 암소가 너무나 사랑하여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세월이 흘러 신혼이 단꿈이 사라져가던 어느 날, 드디어 참고 참던 서로에 대한 서운함이 폭발했답니다. 호랑이는 “너는 왜 나를 사랑한다는 노력을 보여주지 않니?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맛있는 고기를 볼 때마다 먹고 싶은 것을 참고 너에게 가져다주었건만 어째서 너는 너만 위하고 이기적이니?”라고 했고, 이 말에 암소는 “뭐라고? 내가 이기적이라고? 너야말로 왜 그렇게 너밖에 모르니?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해주었는데, 맛있는 풀이 생기면 모조리 너에게 가져다주었는데, 왜 넌 나를 사랑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거니?”라고 반박했답니다. 서로에 대한 서운함이 원망으로 바뀌고 결국에는 서로 오해만 쌓인 채 ‘우리가 정말 사랑하긴 한 걸까?”라면서 등을 돌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방식을 모르기 때문에 서운해할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의 솔직한 감정 표현
그렇기 때문에 큰 아들처럼 자신의 서운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도 서운함이 더 커지지 않게 하는 방법이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29-30절에 아들은 솔직하게 자신의 섭섭한 감정을 아버지에게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왜 둘째 아들에게 왜 환대를 베풀었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후로 큰 아들의 서운한 마음이 풀렸는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았을 겁니다. 엘리야도 서운한 감정이 들 때 하나님께 나아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이겼는데 이세벨이 여전히 자신을 죽이려고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섭섭해서 저들에게 잡혀 죽기 전 하나님이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서운한 감정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위로하고 사명을 주어 일하게 했습니다. 서운함으로 주어진 사명의 자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서운함의 감정이 쌓이면 결국 이것이 올무가 되어 사단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표현할 때는 ‘I message’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서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바로 오시지 않았다고 서운해합니다.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주님이시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시는데 그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욥도 하나님께 서운했습니다.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대우하십니까?”라고 서운해했습니다. 친구들이 와서 죄를 회개하라고 정죄합니다. “왜 죄 없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느냐?”고 서운했을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연단을 통해 정금처럼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서운함 때문에 사명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온갖 서운함을 다 당하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살려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 내가 누군지 아는 겁니다.
큰 아들은 바리새인을 상징합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특징은 특권 의식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께 선택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우월 의식이 늘 있었습니다. 나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교만함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특권 의식은 은혜를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합니다. 그리고 교만하게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방인, 창기, 세리를 낮게 보았습니다. 상종하면 안 될 사람들로 보았기에 예수님이 이방인과 창기와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기뻐하니까 이러한 모습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큰 아들, 즉 자신을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은 가장 큰 계명을 어긴 죄인이었습니다.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인 ‘서로 사랑'의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맏아들로 받아 주십니다. 결코 아버지의 아들로 있는 자격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반주 들어오기, 은혜 찬양)
침례 요한을 보십시오. 정말 인기 있는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정치권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숨김 없이 당당하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러면서 모든 손가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또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우리는 높은 마음을 가질 때 더 쉽게 서운함을 느끼고 섬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서운함의 근원은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만해서 서운한 겁니다. 내가 내 인생의 그리스도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고 더 많은 영광을 받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칭찬 받고 싶은 욕망이 더 큰 거에요. 그러니 조금만 나를 서운하게 하면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내가 섭섭하고 안섭섭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결론
여러분, 사단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서운해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섭섭한 감정을 낚아채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포기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서운함의 감정을 대적해야 합니다. 더 큰 감사로 덮어야 합니다.
첫째, 서운함에 감사함을 더하는 겁니다.
둘째, 정직하게 표현합니다.
셋째, 나를 아는 겁니다.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실 것입니다. 같이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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