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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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 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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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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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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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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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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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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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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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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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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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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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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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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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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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 .5
.5 - .6
.6 - .7
.7 - .8
.8 - .9
> .9
사도신경
찬송
342장 너 시험을 당해
기도
성경봉독
서론
이번 한 주 동안 야고보서의 말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론
1절
편지를 시작하며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를 소개하고 있다.
보내는 이와 받는 이를 소개한다.
발신자는 야고보이고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이다.
이 땅에서 흩어져 나그네로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쓴 편지이다.
그런 이 편지를 쓴 야고보는 어떤 야고보인가?
예수님의 12명의 제자 중의 야고보인가?
아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2명의 야고보가 있다.
요한의 형제이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보통 큰 야고보라 불린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흔히 작은 야고보라 불린다.
큰 야고보인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12 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이다.
마태복음 13 장을 보면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몸을 통해 성육신하셨다.
그 이후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는
자녀들이 계속 출생하였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바로 야고보이다.
처음부터 야고보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7 장을 보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향해
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은 이것을 두고
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야고보가 예수님을 믿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갈 2:9)
그리고 지금 이 편지에서 자기를 소개하며 무엇이라 이야기하는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예수님을 주님이시며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님의 ‘종’이라고 고백한다.
자신을 예수님의 형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종’이라고 고백한다.
우리 신앙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하는가?
그리고 나 자신을 어떤 자로 고백하는가?
야고보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높이고,
자기 자신을 낮추고 있다.
이 귀한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축복한다.
야보고 사도는 이 편지를 통해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지를 잘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인가?
첫째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다.
2-8절 말씀을 읽어보자.
2-8절
먼저 야보고 사도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삶에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믿음의 시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믿음의 연단과 훈련을 이야기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시험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이 일을 소개하는 창세기 22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이러한 믿음의 시험을 주시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성도라 부르심을 얻기에
합당한 자로 만들기 위함이다.
4절은 이러한 시험이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고 말씀한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시험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기뻐해야 한다.
적당히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기뻐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한다.
분명 믿음의 시련을 거치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콧노래를 부르며 룰루랄라하며 그 길을 나섰겠는가?
아니다.
그 과정은 분명 고통이 따르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이며,
이삭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고 성취하실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믿음의 시련 그 과정의 끝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기에
우리는 온전히 기뻐해야 한다.
우리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혹시 지금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이러한 시험, 이러한 믿음의 시련이 있다고 여겨지는가?
왜 나에게 이러한 시험이 왔냐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자.
내 안에 있는 불순물과 찌꺼기를 제거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한 자로 세워져 가는 과정임을 기억하자.
믿음의 시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성도님 되기를 축복한다.
감사한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이러한 믿음의 시련 가운데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그저 팔짱만 끼고 지켜보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인가?
후히 주시는 분이다.
꾸짖지 않으시는 분이다.
믿음의 시련의 과정을 지나가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지혜이다.
영적 분별력이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 과정을 통과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후히 주시는 분이다.
꾸짖지 않는 분이다.
그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껏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지혜를 넘치게 주신다.
믿음의 시련을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
그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 구하며 받는 복된 우리 모두 되길 축복한다.
계속해서 9-11절 말씀을 보자.
9-11절
이 말씀은 참으로 역설적인 말씀이다.
낮은 자는 높음을 자랑하고
높은 자는 낮아짐을 자랑하라.
무슨 말씀인가?
앞에 나오는 ‘낮고 높음’은
세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를 말한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높고 낮음’은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를 말한다.
이 세상이 눈으로 바라볼 때
‘낮은 자’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가진 재물도 적고
건강도 좋지 않고
사회적인 신분이나 직업도 별볼일 없어 보이는 이들이 있다.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형제’라 불리는 이라면,
다시 말해 복음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
‘높은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자신의 형편과 환경을 뛰어넘어
자신의 높음을 자랑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이 세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
‘높은 자'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가진 재물도 많고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고
사회적인 신분과 직업도 유력한 그런 이들이 있다.
사회적 강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도 그러해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갖고 있는 그 부유함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는 자들 되기를 축복한다.
하나님의 자녀된 존귀한 자들임을 늘 기억하는 자들 되길 원한다.
그리고 이 땅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며 낮아짐 가운데 나아가는 자들 되길 축복한다.
계속해서 말씀을 살펴보자.
야고보 사도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말씀하고 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이어
두번째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인가?
악과 무관하신 선하신 분이다.
12-15절 말씀이다.
12-15절
야고보 사도는 앞에서 언급한 믿음의 시련을
온전히 이루는 자가 얻게 될 것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생명의 면류관'이다.
하나님은 이 생명의 면류관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주실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시련을
기쁨으로 받고 인내하며 나아가길 원한다.
그리하여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우리 모두 되길 축복한다.
그런데 이어지는 13절 말씀을 보면
우리를 약간 당황케 하는 말씀이 있다.
13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우리는 분명 앞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12절까지 나온 시험은 다른 말로 ‘믿음의 시련'을 의미한다.
반면 13-15절에서 이야기하는 시험은 다른 말로 ‘죄의 유혹'을 의미한다.
야고보 사도가 이 구절에서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은 죄의 유혹을 하는 분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죄의 유혹을 의미하는 ‘시험'의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후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며 마귀에게 받으신 시험을 들 수 있다.
굶주림 가운데 있는 예수님은 사단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천사들이 너를 보호해 줄 것이다.
사단에게 엎드려 경배하라.
천하만국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세 가지 시험은 우리 인간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죄된 본성을 잘 드러낸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이러한 욕심과 정욕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다.
사단 마귀는 이러한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고 유혹하여
죄에 넘어지게 하고
결국 우리를 사망, 즉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가는 믿음의 시련이다.
하지만 사단 마귀가 주는 시험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죄의 유혹이다.
그러하기에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16-18절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16-18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빛이시다.
어둠이나 그림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죽음이나 파멸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사와 선물은
우리를 빛으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한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속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혹시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면
이 시간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하고 만나는 은혜가 있길 축복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그 귀한 고백과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길 축복한다.
이러한 생명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영생을 주셨다.
우리는 이 생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18절은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우리 같이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9-27절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21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을 능히 구원해 준다.
그리고 믿는 성도들의 마음에 심어졌다.
25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온전한 율법이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지표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
야고보서는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다.
지금 읽은 말씀을 보아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라
자기 혀를 재갈 물려라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말아라
등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식으로
야고보서가 행위만을 강조하는 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족쇄처럼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아가
듣고 행하는 자가 될 수 있다.
결론
마지막으로 25절 말씀을 함께 읽고 마치고자 한다.
어떤 자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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