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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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 사람을 대표하는 삼손 2. 구별된 우리와 삼손 3. 나실인의 삶 실패 4. 기도하지 않는 삼손과 우리 5. 패배하는 듯 보이는 삼손과 예수님 6. 패배를 승리로 바꾸시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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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간적인 사사 - 삼손

오늘 나누고자 하는 삼손은 우리와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들 중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기도 합니다. 삼손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또 그럼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상황을 맞이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다양한 선택을 합니다. 그 선택이 옳을 때도 있지만 때론 실수하고 틀릴 때도 있습니다. 왜 우리의 선택이 바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까요? 그것은 그 상황에 대해 진짜 답. 정확한 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우리의 경험과 여러 조언들을 통해 조합한, 내가 생각하기에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기에 여러 변수가 발생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지 않고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내 선택에 대한 어려움 혹은 문제가 생겼을 때 혹시 내가 하나님과 가깝기만 했다면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기만 했다면, 그 상황들 속에서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길을 선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왜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등등의 이런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우리는 늘 실패하고 넘어지고 좌절합니다. 그리고 별 것 아닌 이야기들에 마음이 막 동요하고 감정이 요동칩니다. 화도 내고 짜증도 내고 울기도 합니다.
그게 인간이죠. 같은 상황인데 오늘의 나의 컨디션과 기분 상태에 따라 화를 내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상처 받습니다. 도대체 왜 이럴까? 고민하기도 하죠. 우리의 삶은 늘 이렇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삼촌과 우리는 비슷한 점이 참 많습니다. 삼손은 다른 사사들과 다르게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떤가요? 저도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선택하셨습니다. 삼손을 나실인으로 선택하셨던 것처럼, 자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려고 이미 선택하셨습니다. 미리 선택하셨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우리를 선택해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데로 말하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실수하고 넘어지고 매일 상처받는 것이죠.
삼손은 어땠을까요? 삼손은 나실인이었죠. 나실인에 대한 이야기는 민수기 6장 1-12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나실인은 ‘나지르'라는 히브리어인데, “거룩하게 되는", “구별되어진" 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나실인은 그 공동체 안에서도 구별되어진 존재를 이야기해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살아가고 있으나, 구별되어진 존재, 조금은 다른 존재이죠.
우리와 똑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역시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과 구별되어진 존재'이거든요. 죄로 물들어진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우리는 절대 그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하나님의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것처럼 삼손도 우리도 구별되어진 존재입니다. 거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죠. 죄에 빠져 허덕이며 살아가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구별되어지 삼손. 그의 역할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말로, 행동으로, 그의 모든 삶으로 보여주어야 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어쩌면 고대의 이스라엘보다 더한 죄들로 가득찬 현재를 살아가요.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모든 것이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요. 삼손처럼, 사사들처럼 말과 행동 그리고 삶으로 힘껏 하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구별되어진 존재들이니까요.
그런데 삼손도 우리도, 구별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나실인인듯 아닌 듯 한 삼손

나실인은 보통 세 가지 기본 규정을 가져요. 서원한 기간 동안 ‘머리를 자르지 말아야'하고 ‘술이든 아니든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어떤 것도 마시지 말아야'했고, ‘시체와 접촉을 하면 안됐’어요.
나실인은 자신의 삶을 매일 돌아보고, 조심하면서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도움을 구해야만 했어요. 머리를 자르지 않고, 포도나무 열매를 먹지 않고, 시체와 접촉하지 않는 이런 행동들은요. 어떤 목표를 향해 ‘근신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에요. 하나님께 묻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며 나는 겸손하게 나의 삶을 제한하면서 그분의 ‘답’을 ‘기다린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민수기 6장에 기록된 나실인과 삼손은 좀 달라요. 원래 나실인은 나기 전부터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스스로가 하나님께 서원. 반드시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에요. 근신하고 집중하며 하나님의 답을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께 약속을 하고 기간을 정해놓는 것. 그것이 나실인이었어요.
삼손은 자발적으로 나실인이 되지 않았어요. 비자발적이에요. 태어나니까 나실인으로 살아야 한데요. 삼손은 기한을 정한 일반적은 나실인과 달랐어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나실인의 삶을 하나님께서 그만 하라 하실 때까지 살아야 했어요.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라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죠.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셨어요. 삼손이 앞으로 나실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해요. 우리는요? 그리스도인답게!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이런 예배와 또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으며 살아가야해요.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야 해요. 그것이 삼손과 우리가 해야 하는 모습이죠.
나실인으로 부름 받았고 그렇게 구별된 사람으로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의무를 가졌던 삼손을 잘 보면요. 그 의무를 다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았어요.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들 중 가장 흠이 많은 인물이었어요. 폭력적이고 충동적이고 정서적으로 미성숙한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사람이었어요.
그는요. 같은 민족인 이스라엘과 결혼을 해야 했어요. 더군다나 구별되어진 나실인이잖아요? 선택받은 민족과 결혼을 하며 거룩한 생활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 지금 그가 블레셋 여자를 선택해요. 고집을 부리기 시작해요. “나를 위해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그 여자가 내 눈에 맞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해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 삶을 열심히 살아갔어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사 삼손이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삼손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들은 자기 눈에 옳은 것을 선택했어요. 하나님이 그것을 악하다 말씀하셔도, 내 눈과 마음에 들면 그 것은 무조건 옳은 것, 맞는 것이었어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사사로 섰을 때에는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과 가까웠어요. 하지만 그 반대일 경우 이스라엘은 사사를 따라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영적 지도자인 삼손이 지금 자신의 눈에 옳은데로 자신의 마음과 방법대로 여자를 막 선택합니다. 다른 이스라엘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충동적이에요. 혈기가 올라오면 하고 싶은데로 다 선택하고 일단 지르고 봤어요. 그리고 그 누구의 조언도 말도 듣지 않았어요. 누군가 바른 것, 옳은 것을 알려줘도 듣지 않아요. 왜요? 충동적이기 때문이에요. 감정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 별 것 아닌 것에 “화르르르" 불 타올라서 화를 내고 쏘아 붙여요. 하고 싶은데로 멋대로 일을 질러버려요. 이스라엘의 영적 모습을 대표하는 삼손의 모습이 이스라엘의 현주소였어요.

너 도대체 뭐야?

사사기에 다양한 사사들이 등장합니다. 차분히 말씀을 읽어보면 다른 사사들과 삼손의 차이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결정적인 한 가지가 다릅니다. 이스라엘이 늘 고통 속에 힘들어하며 부르짖을 때 사사가 나타났습니다.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고 있을 때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해 사사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이야기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스라엘이 힘들다고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15장 11절을 보면 유다 사람들이 삼손을 찾아가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며, 그들을 다 진멸시키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진멸시키시도 못했습니다. 않았습니다. 그들을 살려두었죠. 그 결과 가나안 민족 중 하나인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도 문제인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방민족의 지배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받아드리고 있다는 것이에요.
이전에는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으며 괴로워하다, 하나님을 떠올리고 찾고 구원해달라고 외쳤던 이스라엘이요. 이제는 그냥 그 삶에 순응하고 있어요. 블레셋의 지배를 받아드리고 마치 그 지배 안에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 보여요. 블레셋의 가치, 풍습, 우상 그들의 도덕적 타락 등 모든 것을 완전히 받아드리고 순응한 삶을 살아가요.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방인인지 모르겠어요.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고 지배하는 민족이 되어야 했는데, 역으로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몰라요. 자신들이 이 땅에 주인인데, 주인처럼 살지 않아요. 누군가가 자신들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빼앗아가는데오 그냥 받아드리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말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블레셋과 다를바 없어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살아가요. 제가 예전에 선교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있어요. 중국인이세요? 일본인이세요? 한국인? 이라는 말이었어요. 비슷하거나 같은 문화권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닮아 있어요. 그것처럼 이스라엘도 블레셋과 같아졌어요. 선택받은 민족인 것인지,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민족인지 이제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무려 40년 동안 블레셋의 통치를 받았어요. 40년은 사사기에서도 역대급으로 긴 이방인의 통치 기간이에요. 그 다음으로 긴 시간이 드보라와 바락시대에 있었던 20년이었어요. 그 때보다 2배 더 긴 시기를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죠.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가 컸다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몰라요. 자신들이 왜 이렇게 블레셋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살아가죠. 혹시 주위 사람들이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아니 내가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언행이 등장한다면요. 우리도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그들과 같아요. 세상의 지배를 받고, 마귀에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죄가 더 익숙해져버렸거든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이전처럼 생기지 않고, 예전처럼 믿어지지 않게 되어버렸거든요.
삼손과 이스라엘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반드시 돌아보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에 실패한 사사 삼손

삼손은 다른 사사들처럼 이스라엘은 구원하지 못했어요. 블레셋의 지배에서 같은 민족을 구해내지 못했어요. 오히려 그들의 형제들보다 더 타락했고 악해지기 시작했어요. 그가 들리라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죠. 그리고 그 여인을 통해 머리가 싹 다 밀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삼손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잡혀갑니다. 강한 삼손이 너무 어이없게 잡혀갔습니다.
삼손의 힘은 엄청났었죠? 지나가다 사자를 만났어요. 도망갔을까요? 사자를 봐도 무섭지 않은 사람이 삼손이었어요. 제가 예전에 선교지에서 한 지역을 여행하던 중 ‘몽키 신전'이라는 곳을 가기 위해 산을 올라가고 있었어요. 반절 정도 올라갔을까요? 갑자기 정말 눈이 빨갛고 침을 질질 흘리는 큰 들개 5마리가 산 위에서 내려오면서 제 앞에서 으르렁 거리며 서더라구요. 그 때 저는 느꼈어요.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개밥이 될 수도 있겠구나. 오늘 내가 여기서 개들에게 물려 죽으면 한국에 계시는 우리 부모님은 내 시체도 찾지 못하겠구나 등의 생각을 하며 난 죽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내가 먼저 달려들면서 가방을 휘두르고 한 마리를 발로 차고 도망갈까? 아니면 팔 하나 물리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하나 등등의 상상을 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근데 갑자기 몽키 신전 쪽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는거에요. 신전을 다녀오던 사람이 저를 발견하고 제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더니 타라고 외쳤어요. 저는 그 오토바이를 타고 산 아래로 도망쳐 내려왔는데 내려오고 나니 온 몸이 땀으로 젖어있었더라구요.
들개 5마리 때문에 저는 죽음을 직감했어요. 그런데 삼손은요? 그와는 비교도 안되는 사자를 만났어요. 일반적이면 도망가거나 피해야 하죠. 근데 삼손은 아기랑 놀듯 사자에게 달려 들었어요. 사자의 입을 잦고 오징어 찢듯 죽 찢었어요. 그게 다일까요? 여우 삼백마리를 잡아다 꼬리에 꼬리를 묶고 불을 붙여서 블레셋에 풀어버렸어요. 꼬리가 묵였는데 불이 붙었으니 여우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뜨거운데 풀리지 않으니까 정신없이 달리고 뒹굴고 하면서 그 밭을 다 태워버렸어요.
또 삼손은 나귀의 턱뼈를 들고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어요. 나귀 턱뼈가 아무리 튼튼해도 사람 천명을 때려 죽일 수 없을거에요. 천명을 죽이기 전에 뼈가 깨지거나 갈라져야 했을텐데 삼손은 그것을 해냈어요. 그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랬던 그가 들릴라라는 여인의 유혹에 빠졌고, 머리카락이 다 밀려버렸어요. 그 후 자신을 잡으러 온 블레셋 사람들에게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체 끌려갔어요. 삼손이 잡혀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머리카락이 다 밀려버렸기 때문일까요. 머리카락이 밀리고 힘을 쓰지 못하고 잡혀갔으니, 힘의 원천이 머리카락이라 생각할 수 있어요. 나중에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 3천명을 죽이고 본인도 죽게 되는데, 그 때 삼손의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그의 힘의 원천은 머리카락이라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그의 힘의 원천은 머리카락이 아니었죠. 삼손이 사자와 싸우기 전, 30명을 죽이기 전, 나귀 턱뼈로 천명을 죽이지 전, 그 앞에 등장하던 표현이 있었어요.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힘의 원천은 ‘하나님의 영'이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하나님이 주셨기에 그는 이런 괴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죠.
삶의 모습의 결과
삼손의 머리카락이 밀렸고,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해 잡혀갔다는 것은 그의 삶의 모습의 결과에요. 그는 하나님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생각했고, 자신감이 넘쳤고 교만했어요. 하나님이 주신 힘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강함과 대단함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어요. 하나님과의 약속을 무시하고 살아왔어요. 그는 자신은 나실인이기에, 하나님이 주신 힘은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어요.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답데 여기지 않고, 그 은혜에 의존하며 살지 않았어요. 오직 자신의 힘과 생각을 의지했던 것이죠.
삼손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서 힘을 잃은게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떠나셨기 때문’이에요. 그 결과 삼손은 잡혀갔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죠. 삼손을 생포한 것을 기념하는 종교적인 축제를 열기 위해 다곤의 신당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요. 자연스럽게 밀렸던 머리들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자라난 머리를 블레셋 사람들이 보고도 아무 신경쓰지 않고 그대로 두었어요.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에요. 머리카락이 그의 힘의 원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블레셋도 나실인의 존재에 대해 알았어요. 나실인은 하나님과 약속한 시간동안 머리를 길렀어요. 그리고 약속의 기간이 끝나면 사람들은 머리를 스스로 밀었어요.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더 이상 나실인이 아니며, 약속한 기한이 지났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에요. 삼손의 머리카락이 밀렸어요. 블레셋은 이제 삼손은 더 이상 나실인이 아니라 판단했을 것입니. 그래서 그의 머리카락이 자랐음에도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았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삼손이 다시 힘을 사용해서 삼천명의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머리카락이 자랐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삼손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떠나간 하나님의 영을 찾았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처음이자 마지막 기도
블레셋 사람들은 지금 다곤의 신전에서 삼손을 잡아두고 조롱합니다. 그런데 이 조롱은 삼손을 넘어 삼손에게 힘을 주셨던 하나님에 대한 조롱과도 같아요. 삼손에게 힘을 주는 신 여호와는 우리 다곤보다 약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광고하고 있는 것과 같거든요. 성경에서 다곤 신은 곡물의 신이에요. 농사의 신이에요. 그런 농사의 신. 전쟁과는 상관도 없는 신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찬양하고 있는 것이죠.
이 찬양의 시간이 무르익자 사람들이 삼손을 감옥에서 끌어내어 자신들 앞에 세웁니다. 그리고 재주를 부리라 외칩니다. 나귀턱뼈로 1000명을 죽이고 사자를 찢어 죽이던 영웅이 눈이 뽑혔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죠. 옆에 있는 어린 소년을 의지해 다곤 신전의 기둥을 잡게 되었다는 것은 그가 참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둥에 기대 선 삼손은 여호와께 매우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사사기 16장 28절 드디어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나를 강하게 하소서" 드디어 그가 하나님을 찾습니다. 평생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고 살아가던 삼손이 드디어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저는 이 기도가 그의 믿음이 ‘여호와의 영이 돌아오게 만들었다.’ 생각합니다.
사실 이 기도는 그가 사사로써의 소명을 자각해서 나온 기도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위해,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복수를 위해 기도하고 있거든요. 그가 기도하는 내용을 원문으로 보면 ‘나'라는 단어가 꽤 많이 나와요. 자기 중심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죠. 20년 동안 사사였던 삼손. 그의 마지막 역시 자신이 중심이 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삼손의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삼손은 거의 처음으로 하나님을 의지 한 것이거든요. 하나님께 부르짖었어요. 교만투성이었던 그가 드디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죽을 때가 되어서!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그는 두 기둥을 힘껏 안았고, 기둥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다 건물에 깔려 죽었어요.
태어나기 전부터 구분이 되어 모태에서부터 하나님께 나실인으로 드려졌던 삼손. 그러나 거룩한 소명에 걸맞는 삶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삼손. 그의 마지막은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죽는 것이었습니다,
서두에 저는 삼손은 우리와 같은 일반적인 인가들을 대표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삼손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선택 받았으나 선택받은 사람답게 살지 않습니다.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었고, 삶의 주도권을 잡고 살아갑니다. 나실인으로 지켜야하는 것, 구원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여전히 우리는 나에게 익숙한 것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사사면서, 구원받은 백성이면서 하나님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삼손을 통해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삼손을 통해 나의 모습을 객관화하여 보아야 합니다.
삼손의 전 생애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 그 순간은 바로 ‘그의 죽음'이었습니다. 그가 가장 신실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 하나님을 찾고 의지했고 그분께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맡긴 그 때는 ‘죽음'의 순간이었습니다. 그의 삶에서 일어났던 최고의 승리 역시 그의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가장 마지막의 그의 모습은요. 진정한 사사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을 이루는 사람.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을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기 시작한 것이죠.
위대한 패배
삼손이 몰락했던 이유는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이 되어서야, 죽음의 순간에 서서야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위대합니다. 그의 모습은 초라합니다. 두 눈이 뽑혔고 포로가 되었고 그가 누려오던 모든 것들을 하나도 할 수 없습니다. 패배자의 모습으로 형편없고 초라하게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지나가며 그를 비웃었습니다. 그렇게 역사에서 잊혀져 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 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신 분이 또 한 분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삼손의 마지막 죽음을 통해 우리는 구원자 되신 그리스도 예수를 떠올려야 합니다. 삼손의 죽음. 그의 위대한 죽음은요. 예수님의 죽음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자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자신의 동족인 유다와 사랑했던 들릴라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졌고 고문당하고 조롱당했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졌고, 고문당하고 조롱 받았어요. 삼손과 예수님 모두 적에게 잡혀간 패배자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을 세상을 구원하러 왔지만 그의 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다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삼손과 예수님 모두 죽음을 통해 승리를 가져왔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과 그들이 믿던 신 다곤을, 예수님은 원수인 마귀,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삼손과 예수님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사들은 동역자와 함께 싸워 이스라엘을 구원했어요. 하지만 삼손은 혼자. 마지막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만 의지했고 결국 혼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위대한 패배를 경험한 삼손이 있었기에, 위대한 패배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들의 죽음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모여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삼손. 멋대로 살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사람.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했던 사람. 구별 된 존재였으나 스스로 그 삶을 살기를 거절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익숙한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주위 사람을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세상에 살아가며 나도 모르게 나의 마음들이 오염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거절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분의 피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요. 우리 지금 너무나 잘하고 계시지만 지금 보다 더 한발자국을 내딛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길 바래요. 그분과의 관계가 회복되길 바래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상황 속에서 감정적으로 선택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선택해놓고 내가 상처받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실패해도 괜찮고 넘어져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겐 그러한 실패와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삼손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오늘 하루 그리고 한 주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개인의 경건생활을 통해 객관적으로 나를 돌아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삼손을 통해 그리고 객관화 시킨 나의 생각을 통해 하나님 앞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모습.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회복되고, 그 회복을 통해 매일의 삶 속에 하나님과 즐겁게 동행하며살아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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