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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설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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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286장 찬양하심으로 1월 25일 화요일 새벽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다같이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오늘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긍휼하심을 바라보며,
이른 시간 성전으로 나왔습니다. 순수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이 자리에 나온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말씀과 기도의 힘으로 오늘 하루를 감당하고자 합니다. 기도하는 주의 자녀들에게 평안함과 형통함을 허락해 주옵소서. 오늘도 저마다 간구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들으시고, 친히 응답하시고, 위로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 누가복음 7장 11~17절 (신약 101p)
오늘 본문에서는 두 무리가 만나게 됩니다.
한 무리는 가버나움에서 나인성으로 들어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무리입니다.
또 다른 한 무리는 나인성에서 밖으로 나가고 있는 장례를 치르는 무리입니다.
장례를 치르고 있는 무리의 사정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이 장례는 어떤 한 청년의 장례입니다.
어떤 장례든 슬프지 않고, 마음 아프지 않은 장례가 없지만,
이 청년의 죽음이 더욱 슬픈 이유는, 이 청년은 어머니의 독자였기 때문이고,
아들을 잃은 이 어머니는 이미 남편을 잃은 과부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청년이라는 꽃다운 나이에 죽은 아들이었습니다.
이 모자가 평소에 인간관계가 좋았던지, 아니면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측은히 여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청년의 장례 행렬에 나인성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들을 잃은 과부를 위로하며 함께 장례 행렬에 동참했지만,
과부는 어느 누구에게도 위로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누가, 어떻게, 진심으로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남편도 없고, 아들 하나 키우면서, 삶의 의미를 이어나갔을 과부 여인에게
이제 남은 희망은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삶의 시간 동안, 이 과부 여인은 얼마나 큰 아픔과 고통 속에 살게 될까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그 장례 무리들을 향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지나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14절 15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예수님께서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녀를 위로해 주시고,
죽었던 아들까지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수많은 무리들이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이야기하며,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인성 과부를 위로하시고, 그 아들을 살려주신 성경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위로와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소망하며,
이 시간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장례 행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아들을 잃은 과부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여인에게 진정한 위로를 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불쌍히 여기다 라는 말을 헬라어 원어로 보면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아픔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남의 슬픔을 자기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며 아파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의 모든 것을 속속히 알고계시는 하나님만이,
인간의 아픔과 슬픔,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로 인해 사망의 고통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인간의 아픔과 고통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그 아픔과 고통을 함께하며,
인간의 눈물과, 아픔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나인성 과부와 같이 절대적으로 고독하고, 외로운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누구도 내게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친구도, 가족도, 자녀도, 내 마음을 몰라주고,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실 수 있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밀려올 때, 마음속에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온전히 이해하시고, 위로해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저 단순히 과부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는 것으로 그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녀를 위로해주시고,
그녀의 아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예수님께 죽은 청년을 살려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무리들은 청년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잃은 과부나, 그 장례 행렬에 참가한 어떤 사람도,
아들을 살려달라고 요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과부 여인의 슬픔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과부 여인이 먼저 예수님을 찾아간 것도 아니었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먼저 요청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과부가 예수님을 보기도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가시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말도 못했지만 먼저 살려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과부 여인만 예수님께 큰 사랑을 받은 것 같지만, 사실 이미 우리가 다 받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죄와 사망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아, 천국과 영생이라는 소망과 기쁨을 얻게 된 것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더라도,
죄인 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먼저 찾아오시고, 만나주신 예수님의 긍휼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본 것이 아니라, 과부를 긍휼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사랑의 눈이,
먼저 우리를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의로움이나, 공로가 있어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긍휼한 마음으로 우리를 보시고,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디도서 3장 4절 5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나타났을 때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자비 때문이다.
그분은 거듭나게 씻어 주시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인해 구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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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가 요청하기도 전에 과부의 슬픔의 눈물을 보시고 찾아가
위로와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가 흘리는 아픔과 슬픔의 눈물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과부의 눈물을 지나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위로하시고,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오늘도 예수님의 이름만 간절히 붙잡고 기도함으로,
근심과 한숨, 눈물과 아픔이,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변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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