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life Sermons

새 설교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4 views
Notes
Transcript
첫째, 성경에 나오는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 병들었던 사람들을 해명할 길이 없게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스스로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쇠사슬에 묶여 로마에 도착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다. 실상 거지의 모습과 진배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나사로는 태어날 때부터 평생을 부자의 집 대문 앞에서 거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뒤 나사로는 천국에 갔고, 나사로가 밥을 빌어먹던 집 주인은 지옥에 갔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울은 몸에 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것을 은혜로 생각했습니다. 기복주의자들의 관점에서는 이런 내용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구약에서 가장 기적을 많이 행한 엘리사는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왕하 13:14). 그런데 그는 살아생전에 단 한 번도 자기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죽음이 축복입니다. 왜입니까? 믿는 사람에게는 죽음의 순간에 천국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병이 낫는 것만이 축복이라면, 병이 낫지 않은 사람은 실패자가 되는 셈이 됩니다. 실제로 기복주의자들은 수만 명을 모아 놓고 치유 집회를 할 때 ‘병이 낫는 사람이 몇 명이냐’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진리를 알게 하셨으며 하나님과 더불어 누릴 수 있는 수많은 복을 주셨는데, 자신이 소원하는 것 하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평생을 실패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이겠습니까?
셋째, 복 자체가 목적이 되어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게 됩니다. 진실로 화평과 희락을 누리고 절제와 온유의 삶으로 성령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적·도덕적 의무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복 받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기 때문에 복을 달라는 절규의 소리만 커집니다. 그래서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도 세월이 갈수록 더 이기적인 모습만 드러날 뿐, 거룩을 찾아 볼 수 없게 됩니다. 가정에서나 사무실에서나 존경할 만한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외적인 모습에만 초점을 맞춰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세가 이집트의 바로 왕을 찾아가 ‘내 백성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재앙이 임할 것이다’라고 선포한 것이나,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불의를 행치 말라. 하나님의 의를 행하라’고 꾸짖은 것에만 주목하여 세상을 향해 잘못된 것을 소리 높여 꾸짖으면서, 그 과정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세勢를 과시하곤 합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이 생각하는 의를 위해 폭력적인 방법도 불사합니다.
이처럼 외적인 관점에서만 성경을 해석하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한 번도 세를 과시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폭력적인 방법을 한 번도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 의해 찢기셨습니다. 전혀 방법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찢기며 포용하자 오히려 상대가 거꾸러지고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외적 관점에서만 볼 때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이 실종되고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분명한 안경을 가지고 봐야 합니다. 그 안경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분명한 안경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계명 중에 어떤 계명이 제일 큰지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각 명쾌한 답변을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여기서 ‘율법’은 율법서, 즉 모세오경을 말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예언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당시 성경의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의 관점으로 볼 때에만 올바로 해석될 수 있고, 그 관점으로만 하나님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으며, 우리 삶의 목적과 방법이 바르게 세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왜 가난을 주십니까? 왜 때로는 질병을 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건강을 주십니까? 왜 명예를 주십니까? 왜 복을 주십니까? 나 혼자 잘 살라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도구로 삼으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자신의 권리만을 더욱 주장할 것이 아니라, 지위가 높아지고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윤리적으로 더욱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내 안에 정립될 때, 이 세상의 그 무엇이 주어져도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과 본체가 같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잠시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본을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아 피 흘리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치며 돌아가셨습니다. 왜입니까?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 사랑 + 사람 사랑 =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일 수 없고, 사람을 사랑한다면서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 역시 참된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 언제든지 함께 맞물려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분명하게 터득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지난 시간에 상고했듯이 바울이 다메섹으로 향할 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동료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서 동료들은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주님의 모습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바울 혼자만 구원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바울만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아무것도 해드린 것이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울이기에 하나님께 진 사랑의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본문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헬라인’이란 헬라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야만인’은 헬라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을 뜻합니다. 당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때이지만, 그 이전에 알렉산더가 헬라제국을 만들고 헬라문명이 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에 라틴어보다는 헬라어가 공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를 못 쓰는 사람은 야만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한 야만인에게든 어리석은 사람에게든 모두 빚을 졌으며, 저들을 다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빚을 갚는 길임을 바울은 명확하게 인지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갚고자 하는데,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나와 사상이 같은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가진 사람이든 못 가진 사람이든 내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갚는 것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각正覺, 정행正行에 있습니다. 바르게 깨닫고, 깨달은 것을 바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한다고 해도,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소용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달았다 해도, 바르게 행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기독교인이 25퍼센트를 차지하는데도 이 땅의 화평과 사랑의 열매는 그만큼의 정도로 맺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무척이나 익숙한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아름다운 예배당을 건축하고 장식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사람에게 진 빚을 갚는 데는 인색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앞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75퍼센트가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도 지금보다 나아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재철. (2015). 이재철 목사의 로마서 1 -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7장) (초판, pp. 45–50). 주식회사 홍성사.
이재철 목사의 로마서 1 -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7장)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

첫째, 8절은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 세상’이란 로마제국을 말합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온 로마제국에 전파되고 복음에 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기독교가 박해받기 전으로, 로마제국이 극도로 타락하고 온 사회에 사치와 부패와 방종이 만연하던 시대였습니다. 공직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부정부패를 일삼고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면 못난 사람으로 치부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조금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정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할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높이고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칭찬받는 모습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잘 보지 못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 우리에게 선교하라는 지상 명령을 주신 것은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지 않고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할 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 마음이야말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남을 잘되는 길에서 자꾸 끌어내리려 하고 모함하고 과소평가하는 사람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Related Media
Related Ser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