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life Sermons

베데스다의 비극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20 views
Notes
Transcript

희망고문

희망고문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참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조합해서 만들어낸 단어인데요, 박진영이 그의 책 “미안해”에서 언급한 이후 많이 사용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의 뜻은 이렇습니다. “절망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 뻔한 상황 속에서 작은 희망을 주어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 희망이 아예 없다면 깔끔하게 기대를 포기하고 체념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면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어떻게든 절망스러운 상황을 벗어나려고 애를 쓰게 되지요.
우리의 삶에 이런 희망고문의 상황이 참 많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야구를 참 좋아하신다고 하니 야구 얘기를 한 번 해봅시다. 여기는 다 한화 팬분들이시죠? 한화 팬만큼 희망고문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 없을겁니다. 만년 꼴찌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한화 팬들은 매 경기마다 오늘은 이기겠지…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우리는 이미 승패에 상관 없이 한화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일말의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이없이 실점을 할 때마다 속이 터지고, 질때마다 속상하다는 것은 아직 기대가 있다는 반증이겠죠. 어떠십니까? 한화 이야기를 꺼내니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확 와닿으십니까?
이정도의 희망고문은 그래도 우리의 삶을 크게 힘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짜증이 나긴 하지만 웃어 넘길 수 있는 정도지요.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희망고문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여자가 전혀 사귈 생각도 없으면서 무언가 하나씩 여지를 주는 그런 상황 속에서, (제가 당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잘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어보지만 끝내 찾아오는 절망, 폭락하는 주식 시장에서 반드시 반등한다는 희망을 품어보지만 끝내 찾아오는 절망, 취업 전쟁의 시대에서 열심히하면 반드시 취업하고, 정규직 전환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보지만 끝내 찾아오는 절망, 이러한 종류의 희망 고문은 우리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하고, 좌절에 빠지게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사는 이 무한 경쟁의 사회 자체가 희망고문의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병자도 희망고문을 당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려 38년이라는 세월 동안 병을 짊어지고 살았는데, 지금 38년이라는 숫자가 주는 무게감이 느껴지십니까? 그것은 이 병자가 느꼈을 끝없는 아픔과 좌절과 절망의 무게입니다. 어찌 보면 대단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는 중에 포기하고 체념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 사람은 끝없이 희망을 품고 일어난 사람이니까요. 오늘 우리가 주목해서 보기 원하는 이 사람은 어떤 병을 앓고 있었고, 어떤 희망을 품고 있었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그가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7절을 보면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보건데 아마 그는 절름발이였거나,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을겁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희망을 품고 있었을까요? 그는 천사가 일으키는 기적을 통해서 자신의 병이 낫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휘저은 물에 들어가 몸을 담그면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난다고 하는 그곳, 바로 베데스다가 38년 동안 이 병자가 희망고문을 당하던 곳이자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만나서 고쳐주신 곳입니다.

베데스다와 치유 기적

저는 베데스다라는 말이 참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사실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천사가 일으키는 기적으로 어떤 병자든지 낫게 된다는 이야기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의 이름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만, 성도 여러분 조금만 생각해보십시오. 1등이 아니면 누구도 그런 기적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4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천사가 가끔 여기에 와서 물을 휘저어 움직이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병자들이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물의 움직임만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물의 움직임이 사람들의 눈에 포착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가장 먼저 그 물에 들어가기 위해 병자들 간에 한바탕 전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서로 붙들고, 때리고, 넘어뜨리며, 어떻게든 먼저 물에 들어가려는 소동 속에 어떤 질서도 배려도 사랑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곳이 진정 자비의 집이라 불릴 수 있을까요? 자비의 집이라기 보다는 지옥에 가깝습니다. 천사가 내려와 기적을 일으킬 때마다 지옥의 모습이 펼쳐지는 곳, 그곳이 바로 자비의 집이라 불리는 베데스다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이 베데스다는 사실 못이라기 보다는 댐을 만들어 물을 가두어 놓은 저수지입니다. 이 저수지는 이미 구약시대에 만들어졌었는데요, 비가 올 때 성전과 감람산 사이의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와 고인 물을 저장해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성경 고고학자들은 열왕기하와 이사야서에 나오는 윗못과 동일한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아무튼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고인 웅덩이 주변에 댐을 만들어 물을 저장했고, 여기서부터 성전에까지 수로를 연결하여 깨끗한 물을 사용하도록 하였지요. 시간이 흘러 주전 3세기 말에 이르러서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시몬이 이 댐을 증축하였습니다. 원래 있던 저수지의 남쪽에 두번째 댐을 건설하여 저수지를 두 배로 넓혔고, 본래 있던 수로는 땅 속으로 묻었지요. 그 이후 백 년 쯤 흐르면서 점차 로마의 문화를 따라 이 저수지를 중심으로 식수대와 목욕 시설같은 것들이 생겨나고 당시 깨끗한 물로 목욕하는 것이 병의 치료법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병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천사가 치유의 기적을 일으킨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까지 돌고 있으니, 인근의 수많은 병자들이 이 저수지를 찾았겠지요.
오늘 본문의 2절과 3절에서는 베데스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요 5:2-3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여기에 나오는 행각이라는 것은 기둥 위에 지붕을 얹어 비나 해를 피해 사람이 머물 수 있도록 만든 건축물을 말하는데요, 저는 베데스다 저수지에 다섯개의 행각이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하며 당시 베데스다 저수지를 복원한 모형 사진을 보았고, 이 사진을 보니 한 번에 이해가 가더라구요. 잠시 사진을 함께 보겠습니다. 남쪽 저수지의 네 모퉁이에 행각이 하나씩 있는 것이 보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행각은 남쪽 저수지와 북쪽 저수지 사이의 댐 위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행각들 안에 천사가 물을 휘젓기만을 기다리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지요.
또 오늘 본문에 보니 이 베데스다 저수지는 양문 곁에 있었다고 합니다. 양문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양의 문인데요, 성전의 북쪽에 난 큰 문으로 제물로 쓰일 가축들이 드나드는 문이었습니다. 이 문을 지나면 바로 이방인의 뜰이 나오고,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크게 분노하시며 뒤엎으신 시장, 제사를 드릴 유대인들을 위해 제물을 팔고 환정을 해주던 시장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순례하며 제사에 쓰일 제물을 직접 가지고 오지는 않았습니다만, 인근 지역에서 제사용으로 길러지던 가축들 특히, 베들레헴 인근의 목자들이 제사용 가축들을 많이 길렀는데 그 가축들은 이 문을 통해서 성전으로 공급되었지요. 성전으로 공급되는 가축들은 항상 성전에 들여보내기 전에 이 베데스다 저수지에서 깨끗하게 씻긴 후에 들여보내졌습니다.
이 저수지는 병자들과 제물로 쓰일 가축들만 이용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순례의 여정 가운데 깨끗한 물에 목말랐던 순례자들이 이곳의 식수 시설을 통해 물을 마셨고, 성전에 출입하기 전 몸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이곳의 목욕 시설을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순례객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수많은 바리새인들도 이곳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구요. 수많은 순례객과 바리새인들이 병자들과 함께 베데스다를 이용했다는 것, 우리는 이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 없는 율법주의자

성도 여러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이 병자는 한 해, 두 해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무려 38년 동안을 베데스다에 머물렀습니다. 38년 동안 이 저수지를 사용했던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과연 이 사람에 대해서 모를 수 있었을까요? 이 병자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유명한 자임에 분명합니다. 자그마치 38년입니다. 38년 동안 불편한 몸을 이끌고 베데스다 저수지에 나아와 머무는 자, 38년 동안 끊임없이 물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자, 38년 동안 끝없이 좌절하고 절망했지만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자, 38년 동안 희망고문을 당한 자, 38년 동안 이 자를 마주쳤는데 어떻게 그를 모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수많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 중 그 누구도 이 병자를 도왔던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을 때 병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요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38년 동안 단 한명도 이 사람을 돕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이스라엘의 절기가 되어 예루살렘에 모일 때면 아주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만 해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데 대략 5일에서 7일 정도, 또 갈릴리로 돌아가시는 데에 똑같이 5일에서 7일 정도가 걸리셨을테니, 대략 한 번 순례하는데 넉넉잡아 2주 정도의 시간이 걸렸던 것이지요. 갈릴리보다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도 허다했고 그들에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절기가 되면 엄청나게 많은 인파 가운데 제사를 드리기 위해 아주 바삐 움직여야 했습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라는 학자가 당시 절기에 예루살렘에 모였을 인파를 연구해본 결과에 따르면 대략 성인 남성들 숫자만 13만 명이 되고, 이들과 함께 이동한 가족들의 수를 다 합치면 백만에 가까운 인파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문제는 예루살렘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경계가 가장 넓었을 때를 기준으로 해도 서울 광화문광장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정도 크기의 지역에 백만 명의 인구가 모여 있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또 13만명의 성인 남성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끝없이 성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꼭 해야할 일 외에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혹 누군가 이 사람을 위한 긍휼한 마음이 생겼다 할지라도 함부로 이 사람을 돕기 위해 가까이 가기는 어려웠습니다. 레위기에 정해져 있듯,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하루 동안은 자신도 부정한 자가 되어 성전에 출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부정한 자가 되었을 때 치러야 할 대가가 꽤 큽니다. 일단 만 하루의 시간을 허비해야 하고, 예루살렘에서의 체류비가 하루만큼 더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격리시켜야 하지요. 혹 돌아가는 길에 이 사람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할지라도 이 사람을 돕는 것은 어렵습니다. 천사가 언제 와서 물을 휘저을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늘 이곳에서 활동하는 바리새인들이 도우면 되겠네요?”라고 물어보시는 성도님들도 계실겁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순례객들보다 이들을 도울 가능성이 훨씬 낮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서 율법을 하나하나 아주 철저하게 지키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자들과는 식사하는 자리에조차 함께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이 이 병자를 돕기 위해 그의 몸에 손을 댄다구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예수님께 은혜를 입어 병이 나아 자기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던 병자에게 율법의 조항을 대가며 질책하고 비난한 유대인도 바로 이 바리새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유대교 학자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명하신 율법을 위반하지 않기 위해 어떤 것이 “일”에 해당하는가를 39가지로 규정해두었는데, 그 중에 어떤 것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운반하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순례객들의 모습과 바리새인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발견하실 수 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바쁘고 여유가 없는 이유로, 또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로 이 병자는 자신의 앞을 지나다니는 그 누구에게서도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로 38년을 지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어떠셨습니까? 예수님도 동일하게 수많은 인파들 속의 한 사람으로서 계셨지만, 자신의 바쁘고 여유가 없음을 이유로 또 율법을 자구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이 병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참 바쁜 분이셨습니다. 끝없이 돌아다니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전하시며 사람들을 고치시는 사역을 하는 분이셨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바쁜 일정과 수많은 인파 속에서, 병자를 바라보셨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께 신실하신 그분께서 부정한 자로 여겨지는 그 병자에게 집중하셨습니다. 그리고 주저함 없이 그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바쁜 자신의 스케쥴보다, 율법의 구절 하나하나에 신실하신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셨던 것이지요. 바로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는 일이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신 후에야 이 사람의 긴 세월에 걸친 희망고문이 끝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사람을 끝없이 절망하게 만드는 희망고문의 집인 베데스다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자비의 집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이 서 계신 그곳은 어디든지 바로 그곳이 자비의 집이 됩니다.

자비의 사람, 자비의 집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유대인과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대비되어 드러나고 있는 것이 보이십니까? 자비의 집이라 불리는 곳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기억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참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기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가 되십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 한사람 한사람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누구도 돕지 않는 한 사람을 찾아가 돌보는 자비의 사람이 되어야 하구요,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희망고문이 가득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자비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한 번 돌아봅시다. 우리는 자비의 사람이 맞습니까? 우리 교회는 자비의 집이 맞습니까?
혹 우리의 모습이 38년된 병자를 그냥 지나친 수많은 순례객들과 바리새인 같지는 않습니까? 순례객과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자비의 사람으로 살아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에 집중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던 이 병자에게 유대인들은 어떻게 비춰졌을까요? 그리고 오늘날 이 사회 속에서 간절히 도움을 구하는 자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지금 희망고문을 당하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우리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이 도시에 가득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희망고문을 당하던 자들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힘입어 고통을 그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진정한 자비의 집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한 번 그렇게 살아가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렇게 해보십시다. 우리의 바쁜 상황을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지나치지 맙시다. 그들에게 찾아가서 손을 내밀어주고 그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참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끕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에 이 도시가 다시금 진정한 소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수많은 자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에 힘쓰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충성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하는 모든 성도님들과 신성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원합니다.
Related Media
Related Ser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