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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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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자녀들처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텔레비전의 뉴스나 인터넷에서 들려오는 많은 뉴스들은 ‘요즘 세상이 참으로 악하고 어둡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온갖 종류의 악행들과 범죄들이 여전히 이 땅 가운데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하는 SNS라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이런 상황이 더 심각하게 나타납니다. 폭력적인 것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이 보였고, 온갖 유사 성행위에 대한 동영상들이 인터넷에 돌아다닙 니다. 심지어 성매매 광고까지도 무분별하게 노출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나이 구분 없 이 노인이나 청년, 심지어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도 노출되고 있습니다. 술 담배 문제에서도 우리 아이들 이 이미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미디어에 노출된 청소년과 청년들이 이런 일들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고 있고, 또한 이미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할 때 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회의 악한 모습들을 향해 오늘 본문 말씀을 어두움이라 고 말합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모습들을 행하는 자들을 가리켜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말 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허물과 죄로 죽 었던 자’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 행하며, 세상의 풍조를 따라 무분별 한 삶을 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삶. 이런 삶은 그 안에 빛이 없는 어둠 가운데 거하는 삶이라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 도전합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가십시오” “이제 당신들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니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십시오”라고 간절히 말하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들이라는 표 현은 불순종의 아들들이라는 표현과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 역시 과거에는 하 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의 아들들이었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살아다가 결국은 멸망당할 진노의 자녀들이 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들은 빛의 자녀들입니다. 주 안에서 빛이 되었고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빛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이라는 새로운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가 되었으니 빛의 자녀 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면서 빛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빛의 열매라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빛의 열매란 주 안에서 빛이 된 성도 들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행실이나 행동을 말합니다. 이 행동은 구체적으로 ‘모든 착함과 의 로움과 진실함’입니다. ‘착함’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어질고 관대한 모든 행실’을 뜻합니다. ‘의로움’은 ‘불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로운 뜻을 따르는 행실’을, ‘진실함’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하며 의로우며 진실한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 령 안에서 죄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선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실제로 선하고 의로우며 진실한 사람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빛의 열매는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는 어느 사람들만 맺는 것이 아 니라,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반드시 맺어야 하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이 무엇인지 시험해 보아야 한다고 10절 말 씀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기준은 주님의 영광이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 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리 좋아 보이는 것이라고 할지라 도, 내가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고 계산해보고 합리적인 결과라고 생각되는 그 어떤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 도,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생각과 판단보다, 사람들이 말하 는 그 어떤 좋은 것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지에 대한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10절 말씀은 우리가 마치 ‘하나님을 테스트해 보라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여 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 된 ‘시험하다’ 라는 단어는 어떤 것이 참인지 결정하기 위해 면밀하게 ‘조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 아가면서 어떤 일을 행할 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결정하기 위해서 면밀하게 조사하고 확인한 후에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일상 생활의 다양한 상황에서 성도들이 지켜 야 할 규범들을 상세하게 기록해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마음 같아서는 이럴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하라고 성경에 딱 기록해 두면 너무나도 좋겠는데, 성경은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무엇이며, 주님의 뜻과 일치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지극히 선 한 것이 무엇이며 좋은 것은 또 무엇인지 성도 스스로가 고민하고 분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 니다. 성령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내 나름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분별한 그 행위가 하나님의 기쁨으로 위장한 나의 기쁨이 되고 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 역시 매 순간 성령으로 마음이 새로 워지지 않으면 자기중심적인 성향과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마음이 욕심으로 어두워진 사람은 결코 주님의 뜻을 바로 인식할 수 없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마음이 새롭게 되어 변화를 받아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며 자기 유익보다 교회와 이웃의 유익을 먼저 고려해야 합니다. 이처럼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의 진리와 성경의 교훈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매 주일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복음과 성경에 대해 알아가야 합니다. 그 기초 위에서만 우리는 바른 잣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기초 위에 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분별하고 그렇게 행함으로 빛의 열매를 맺어가는 저와 여 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행하며,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 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둘째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하는 어두움의 일들에 동참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이나 탐욕은 그 이름조차 입에 올리 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모두 비슷한 의미의 말들처럼 보이는데 ‘음행’은 ‘성적 부도덕 중에서 간음 과 매춘’을 뜻하는 말입니다. ‘더러운 것’은 ‘무절제한 성적인 행동’을, ‘탐욕’은 ‘성적인 욕망을 포함하는 자 기만족을 추구하는 모든 육체적 욕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3절에 나타난 세 단어는 모두 부도덕한 성적 인 행동입니다.
작년 질병관리본부에서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성관계 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보았는데 그 결과가 너무나
도 충격적이게 나왔습니다. 청소년 6만명을 대상으로 여러 조사들을 실시했는데,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 100명 중에서 5명은 이미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고등학생들만 보면 100명 중에서 8명이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이들이 성관계를 시작한 나이입니다. 이 아이들이 몇 살 때 쯤에 처음으로 성관계를 했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평균으로 13.6세입니다. 13세라는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나이입니다. 평균을 잡은것이니 6학년이 되기 이전에 이미 성관계를 가진 아이들도 있다는 의미입 니다.
이런 성적인 문제는 매우 심각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것들을 생각하고 입에 올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이런 죄들을 가볍게 여기게 되고, 이런 죄들을 지을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집니다. 우리나라의 청소 년들이 이런 죄에 일찍부터 빠져 있는 것도 이들이 이전보다 더 일찍, 그리고 더 쉽게 잘못된 성적인 것들 에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이런 성적인 문제들로부터 멀어지고, 언급조차 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 니까? 다른 도덕적인 이유들도 많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성도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게 하려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미 거룩한 존재가 되었고, 또 계속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성도들에게 음행과 더러운 것들과 탐욕 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것들의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성적인 것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부도덕한 말들에 대해서도 권면하고 있습니다.
엡 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누추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일반적으로 ‘누추하다’라고 말할 때의 의미가 아니라 ‘음탕한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리석은 말’은 성도가 공동체를 세우는데 있어서 아무런 유익이 없는 ‘어리 석은 말’을 뜻하고, ‘희롱의 말’은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고 당황하게 만드는 ‘상스러운 농담’을 뜻합니다. 이 모든 말들을 거룩한 존재로 부름 받은 성도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들입니다. 이 말들은 우리에게도 좋 지 않고, 우리의 이웃들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만을 불러오는 것들입니다.
빛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이런 부도덕한 말들이 아니라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이 감사는 서로를 향한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의 말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말합 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알 수 있는 사실들, 그리고 에베소서의 앞선 본문들에서 알 수 있는 사실들 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시고 예정하셨으며,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여 영광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 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 우리의 입에 있어야 하는 감사의 말입니다. 우리 안에 온갖 종류의 더러운 말 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말들이 넘쳐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앞서 말한 더러운 말들을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로 5절 말씀을 말합니다.
엡 5: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음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는 아무런 부끄 러움이나 뉘우침 없이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양식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을 뜻합니다. ‘탐하는 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자기만족을 위해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 중 탐하는 자를 향해 바울 은 ‘우상 숭배자’라고 말합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대신 물질과 쾌락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도된 우리들을 향해 속삭입니다. 오랜 시간 이런 일들을 해 왔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제껏 해왔지 만 아무런 심판도 나에게 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이런 헛된 말에 속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부도덕한 성적인 행동들과 부도덕한 말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게 됩니다. 성도가 저 헛된 말들에 속아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면 함께 심판 받는 자가 되고 맙니다. 결코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7절의 “함께하는 자”라는 말은 ‘다른 사람과 소유물이나 관계를 공유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함께하는 자 가 되지 말라고 말했으니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접촉하지 말고 어떤 관계도 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그들과 함께 죄짓는 일에 동참하지 않 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빛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 어떻게 믿지 않는 자들과 어울려서 죄짓는 일에 ‘함께 하는 자들’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비록 전에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어둠 가운데 거하던 자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
으로 부름 받았고 빛이 되었습니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어두움의 일에 함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쉽지 않겠 지만 우리 대구청구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어둠에 함께하는 자가 아니라 빛과 함께하는 자,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빛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들이 행하는 어두움의 일들을 폭로해야 합니다.

성도 된 우리는 어두움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들을 폭로해야 합니다.
엡 5: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은 우리가 맺어야 하는 ‘빛의 열매’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이 방인들의 더럽고 부끄러운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은 빛의 자녀가 되었기에 더이상 열매 없는 어둠
의 일에 참여해서는 안됩니다.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적극적으로 그런 일들을 폭로해야 합니 다. 세상의 죄와 불의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그것들에 담대히 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11 절 본문에서 ‘책망하다’라는 단어는 ‘폭로하다’, ‘드러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어두움의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하는 어두움의 일들을 폭로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행위에 대한 폭로입니다. 왜냐하면 폭로의 목적이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어두움의 일의 실상을 깨닫고 돌이키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어두움의 일들을 폭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말로 폭로하는 것이 아니라, 경 건한 행실로 폭로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악한 행실에 가담하지 않고, 질적으로 다른 삶을 보여줄 때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빛이 되어서 부도덕한 행위들의 실상을 드러내게 됩니다. 성도들의 선한 행실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 다. 하지만 우리들의 경건한 행실만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돌이키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형제 가 죄를 범하면 찾아가서 권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나 이웃의 죄를 드러내고 바로잡기 위해서는 말로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 역시 필요합니다. 경건한 행실을 보여주고 복음의 진리를 통해 그들의 잘 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이 폭로 함에 있어서 우리가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렇게 하려면 우리가 먼저 복음의 진리에 따라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지 않으 면 안됩니다. 우리가 먼저 경건한 삶으로 보여주어야만 우리가 하는 폭로가 설득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의 저자 홍세화는 ‘교회와 이성’이라는 글에서 “과연 숱한 십자가들이 이웃사랑을 증거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충고 아 닌 충고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교회의 개혁이 무엇보다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의 해방’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는 점을 시사한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조찬 기도회나 부흥회 차원에서 벗어나야 하고, 거기 에 머물러선 안된다. “부자 되세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따위가 보여주는 ‘물질 우상숭배’ 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이 따라야 한다. 실상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물신숭배를 부추긴 측면이 있었 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의 장래는 한국 사회의 이성과 정신 건강의 회복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에 좌우될 것이다.
홍세화 작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믿지 않는 지식인들의 뼈아픈 비판과 충고를 접 할 때,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을 폭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선뜻 순종할 수 없는 참담한 지경에 빠져 있 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여기며 다른이들을 폭로할 수 있다면 차라리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개혁의 대상으로 손가락질 받고 있는 처지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 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원리와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기보다는 세속적인 시대 정신과 가치관을 따라 살
아가고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들은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기는 커녕, 이기적인 모습들로 인해 세 상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 세상의 판단을 받는 일들이 넘쳐나고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을 폭로하기에 앞서, 세상의 어두움에 오염되어 세속적인 성공과 번영을 추구하고 살아갔던 우리의 모습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감 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우리의 잘못된 부분들을 고쳐 나가 야 합니다.
대학교 시절 한 교수님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왜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잘못에 대해서 그렇게 비판적인지 아느냐. 절에서도 성당에서도 잘못된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들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비판적이지 않 다. 유독 교회의 잘못에 대해서만 사람들은 힘써 비판한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 한켠에 그래도 교회는 그 러면 안되지, 그래도 교회는 올바른 모습을 보여 줘야지, 그래도 교회는, 그래도 교회는…” 다른 모든 종교 가 어둠에 빠지고 악행을 저지른다 할지라도 그래도 교회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둔 세상 가운 데서 교회가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된 자로서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부름을 받은 빛의 자녀들이라는 거룩한 소명 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빛의 자녀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부름대로 빛의 자녀다워지지 않는 한 인류의 현재 상황에 유효한 해답이 없다”라고 달라스 윌라드라는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빛 의 자녀다워지지 않으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어둠에 대한 어떤 해답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 당장 우리가 빛의 자녀라는 분명한 자기 인식을 가지고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참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 잠에서 깨어 일어나 세상의 어두움을 폭로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의 자녀들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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