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함을 받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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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함을 받으셨습니까?”라는 제목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비유의 내용입니다. 비유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비유이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본질 은 임금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혼인 잔치 이야기를 통해서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듣는 자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본질은 ‘천국’이 어떤 곳인지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천국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면 듣는 자들이 온전히 이 해할 수 없기에, 비유를 들어 쉽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어느날 예수님께서 제자와 무리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당대 유대 정치, 종교 지도자들 과의 갈등 가운데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후 가장 먼저 성전에 가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돈을 바꿔주고 제물들을 파는 행위를 통 해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많은 이익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청결 사건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 과의 직접적인 갈등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성전 철결 사건은 단순히 성전에 있던 잡상인들을 쫓으신 것 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을 치부와 부패의 온상으로 삼고 있던 당대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의 상징 이었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종교와 제사 행위 자체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을 상징하던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써 자신을 영접하기는 커녕 도 리어 거부하고, 나아가 십자가 죽음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될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아니더라도 당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탐탁치 않게 여겨왔는데, 자신들의 중 심지인 예루살렘에 와서 이런 일들을 행하니 그들이 많이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1장 23절에 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며 항의합 니다. 쉽게 말하자면 ‘네가 도대체 뭔데 이런 일들을 하냐’면서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항의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은 마태복음 21장 후반부에 두 아들의 비유와 악한 포도원 농부들에 관한 비유, 그 리고 오늘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천국’에 관해 예수님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임금은 성부 하나님을, 아들은 성자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비유의 큰 흐름인 아들을 위한 혼인 잔 치는 ‘천국 잔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비유 가운데 임금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열었습니다. 3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을 보시면 초청에 대한 손님들의 반응과 이에 대한 임금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잔치를 베푼 임금은 기쁜 마음으로 종들을 보내 초청한 손님들에게 잔치에 참석하라고 연락을 합니다. 하지만 3절을 보시면 이 손님들은 혼인 잔치에 “오 기를 싫어”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싫어하다’라는 표현의 원어는 ‘미완료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반복 된 거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손님들이 임금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모욕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 자신의 말을 전하게 합니다. 4절 말씀을 보시면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라고 전하라고 종 들을 보냈습니다. 임금은 화가 나는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다시 종을 보내 손님들이 마음을 바꾸고 잔치에 참여하라며 두 번째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와서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으니 부디 와 서 이 잔치를 즐기라고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가운데 ‘오찬’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원래 이른 아침이나 점심을 가리키는 것인데, 본문에서는 중요한 식사로서 정찬이나 만찬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소들과 살진 짐승들을 잡았다’는 것은 이 잔 치가 얼마나 성대하고 풍성한 잔치인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25장에 선포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한 귀한 포도주로 성대하게 베푸실 메시아적 연회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손님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임금의 거듭된 권유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의 반응은 이 초청에 관 심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일을 보러 떠나버립니다. 한 사람은 자기의 밭으로, 또 한 사람은 자기의 사업을 하러 떠나버립니다. 마치 미리 초청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갑자기 초청받아 자신의 일을 하러 가야만 하 는 그런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남은 사람들의 반응은 더 심각합니다. 6절 말씀은 남은 사람들이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였다’ 고 말합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임금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7절을 보시면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 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살랐다’고 말합니다. 군인 몇을 보내어 살인자들을 처벌하기 만 해도 될 일을 임금은 진노하여서 군대를 보내 살인자들을 다 죽이고, 심지어 그 동네까지 불살라버렸다 고 말합니다.
임금의 진노로 모든 심판이 끝난 후 임금은 다시금 손님들을 초청합니다. 8-10절까지를 보시면 이 내용 이 나타나는데 임금은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초청하라고 말합니다. ‘네거리 길’이라는 말은 원래 ‘길들의 출구들’이라는 뜻입니다. 주도로가 마을의 경계를 지나 벌판으로 이어지는 지 점 즉 동네의 외곽에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앞서 임금의 진노에 대한 결과로 동네가 모두 불타버렸기 때 문에 보냄을 받은 종들은 동네의 외곽에 있는 길에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종들은 이 길 에서 악한 자나 선한 자들 모두 가리지 않고 만나는대로 모두 그들을 데려왔고, 마침내 혼인 잔치에 사람 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11-13절의 말씀을 보시면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하자 임금은 잔치에 온 사람들을 둘러보기 위해서 연회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눈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보였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연회장에서 본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 근동 사회에서 혼인 잔치에 참석할 때 좋은 옷, 즉 예복을 갖춰 입는 것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예복은 임금이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또 는 손님 각자가 깨끗한 예복을 미리 준비해야 했습니다. 비유 자체에 예복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주지 않 지만, 분명한 것은 예복을 입지 않음으로써 그 사람이 임금을 모욕했다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은 결혼을 하셨고 자녀의 결혼식도 치르신 분들이 많으실텐데, 나의 결혼식이나 자녀의 결혼식에 온 손님이 깨끗한 옷이 아니라 어디서 일하고 왔는지 흙이 묻은 옷이나, 허름한 옷을 입 고 결혼식에 왔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행동은 결혼식에 초대받은 사람으로서 피해야할 행동입 니다. 그런 행동이 초대한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의 내용에서 임금이 받은 기분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입니다. 그냥 사람인 우리도 그런 불쾌함을 가지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임금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왔으니 얼 마나 그 사람이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고 임금이 느꼈겠습니까. 사실 거리에서 온 손님들은 많았습니다. 네 거리 길에서 종들이 초청해 온 사람들로 혼인 잔치에 손님이 가득했다고 본문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1절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았을 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가 갑자기 잔치에 초청되었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예복을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그 한 사람만 취하지 않았으니 이 사람이 임금을 제대로 모욕한 것입니다.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게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친구’라는 말은 어느정도 친분이나 관련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임금이 처음 본 자를 향해 ‘친구’ 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 예복을 입지 않은 자도 손님으로 일단 인정했음을 뜻합니다.
본문의 비유에 나타난 ‘예복’에 대한 많은 견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비유의 내용을 자세히 보시면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예복’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비유의 어느 부분에도 예복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끔 하는 단서가 전혀 없습니다. 이 예복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비유의 어느 부분에서도 말하지 않기에 확실 치 않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잔치에 초대 받았지만 잔치를 위해 적절히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길에 있다가 갑자기 종들에 의해 초청받았지 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단 한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결론인 14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 ‘예 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청함을 받았으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 사람은 임금의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는 질문에 아무 말도 하 지 못합니다.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혼인 잔치의 손님으로서 마땅 히 입어야 할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임금은 사환들에게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 라고 말합니다. 13절에 나타나는 ‘바깥 어두운 데’와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이미지는 마태복음의 많은 부 분에서 영원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잔치에서 쫓겨나 영원토록 슬피 울며 이를 갈며 지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14절 말씀을 통해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 는 적으니라” 이 한 문장이 오늘 혼인 잔치 비유의 핵심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입은 자는 명백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상황에서 이 결론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 백성의 일부로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천국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님의 인격과 사 역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는 그 유대 종교 지도자들 역시 청 함을 받은 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이 자신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며 말하고 다니며 자존감을 가지고 살았지만, 정작 이 종교 지도자들은 ‘택함을 입은 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일차적인 의도는 자신의 인격과 사역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 청을 거부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택함을 입은 자’가 아니며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모든 청중들을 향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라는 영적 인 교훈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 교훈은 천국에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도전하고 계십니다. 과연 너희는 택함을 입은 자들이냐? 그 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이 택함 받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이 선택은 온전히 성부 하나님 께 속한 것입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미리 아신 지식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누가 선택을 받았는지 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하지만 선택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합당한 인격과 삶의 변 화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이전에 한번 소개해 드린 내용입니다만 신대원 수업 중 박우택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는 행위의 조건이 붙지 않는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그러나 구원받 은 자로서 나타나야 하는 삶의 열매와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과연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구원 받은 자는 말씀을 들으면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반응하게 하시 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는 것, 즉 택함을 입은 자의 조건에 사실 사람의 행위에 대한 조건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에베 소서 2장 8절 말씀처럼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서 난 것 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자, 택함을 입은 자에게서 보이는 분명한 것 은 삶의 열매와 결과입니다.구원 받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하는 그런 행위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우리의 행위가 이전과 다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이와 동일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오늘 날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는 택함을 입은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 가 바로 택함을 입은 자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당신에 대한 믿음의 반응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택함을 입은 자로서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한번 던져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택함을 입은 자인 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자 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게 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변화된 의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갈망이 자신 안에 있음을 택함을 입은 자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택 함을 입은 자라고 믿습니다. 무더운 여름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죄와 싸우 며, 유혹을 물리치며, 택함을 입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몸무림치며 나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 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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