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적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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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비유는 본문 위의 소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열 처녀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일상적 인 결혼 관습에 따라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열 처녀에 관한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예 수님께서 재림이라는 미래적 종말에 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종말을 기다 리는 제자들의 자세에 관해서 교훈하고 계십니다.
열 처녀 비유는 마태복음에 있는 큰 다섯 가지의 가르침 중 24장과 25장의 성전 파괴와 종말에 관한 예 수님의 교훈을 언급하는 마지막 부분에 속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다가가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며 질문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마지막 심판과 종말의 때에 대해 답해주신 내용 중에 오늘 열 처녀 비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열 처녀 비유는 인자의 재림의 징조에 관한 예수님의 답변이라는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 뿐만 아니라 24장 에 나타나는 도둑 비유와 신실한 종과 신실하지 않은 종에 관한 비유도 인자의 재림의 징조에 관한 예수님 의 답변의 일부입니다.
이 비유들은 인자의 재림의 때가 알려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인자의 재림이 예기치 않게 일어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4장의 도둑 비유의 결론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 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이런 문맥 속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 비유의 배경은 결혼 식입니다. 본문 1절과 2절 말씀을 보시면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결혼식은 지금 과는 무척 다른 모습을 띄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결혼 문화에 비추어서 본문을 이해하려고 하면 올바 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결혼 문화는 결혼 당사자 가족끼리 미리 결혼식을 준비하고 하객들을 초대하면, 결혼식 당일에 가서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주는 방식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결혼식은 성경의 표현대로 결혼 잔치 였습니다. 이 결혼 잔치는 대체로 신랑의 집에서 밤에 진행되었습니다. 이 결혼식의 첫 번째 절차는 밤에 신랑과 그의 친구들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신부의 들러리들은 신랑 을 영접한 뒤 횃불을 들고 행렬을 지어 신랑 신부와 함께 신랑의 집까지 함께 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신랑 의 집에서 결혼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본문 가운데 “등”이라고 번역된 말은 사실 “횃불”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 번역입니다. 당시 거리는 요즘과 같이 가로등이 있어서 거리가 밝거나, 주변 건물에서 나오는 빛들 때문에 거리가 어둡지 않은 것이 아니라 완전한 어두움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부 들러리들이 등을 가지고서는 신랑과 신부 가 안전하게 신랑의 집까지 갈 수가 없습니다. 등은 바람이 불면 잘 꺼지기 때문에 실내에서 사용된 것이었고, 결혼식과 같이 외부에서 사용되는 것은 횃불이었습니다. 이 횃불은 사극 드라마를 보시면 종종 등장 하는 것과 거의 같은 모양인데, 막대기 끝에 헝겊 뭉치를 매달고 기름을 적셔서 불을 붙이는 그런 모양이 었습니다. 이 횃불을 가지고 들러리들이 신랑의 집까지 가는 잔치 행렬을 비춰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횃불을 계속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자주 기름을 적셔 주어야 했고, 그만큼 충분한 양의 기름이 필요 했습니다.
유대 사회의 결혼 문화에 대해 잘 모르면 우리가 이 비유를 읽으면서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저도 제법 오랜 시간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던 부분인데 비유에 등장하는 열 명의 처녀가 신부 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앞서 결혼 문화를 설명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부가 아니라 신부 들러리입니다. 막연히 우리의 결혼 문화만을 생각하고 열 명의 처녀라고 하니 모든 사람이 신부라고 착각 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나 본문 내용 가운데 ‘신부’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착각이 더 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당시 결혼식에서 주인공인 신부는 횃불과 기름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횃불과 기름은 신부의 친구 들인 들러리들이 준비하는 것이었고, 이 들러리들이 신부의 집에서부터 결혼식이 진행되는 신랑의 집이나 신랑의 부모의 집까지 신부와 함께 불을 비춰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열 처녀를 열 명의 신부로 보 든지 신부 들러리들로 보든지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주요 내용을 파악하는데는 큰 문제가 없지만,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기에 우리는 성경을 읽 을 때 항상 본문 당시의 문화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만 합니다. 잘못하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 과 전혀 다르게 이해하여 본문을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충성된 종과 악한 종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천국 의 원리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주의할 점은 천국과 열 처녀가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 다. 천국, 즉 하늘나라는 예수님이 이 이야기에서 말씀하시는 전체 과정과 같은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에 서는 천국의 도래와 신랑의 도착 사이에, 그리고 천국의 도래를 기다리는 신자들과 신랑의 도착을 기다리 는 처녀들 사이에 일치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도래할 그 때 벌어질 상황이 본문의 비유에서 신랑이 도착했을 때 두 부류의 처녀들이 보여주는 상황과 같다는 것입니다.
열 처녀 비유의 본문에서 중요한 요소들이 몇 가지 있는데, 신랑과 슬기로운 처녀들, 미련한 처녀들입니 다. 신랑은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과 함께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신랑되 신 예수님의 오심을 적절하게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미련한 처녀들은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슬기로운”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신중함’이나 ‘분별력 있음’을 의미합니다. 상황을 잘 이해하고 그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처신하는 것입니다. 즉 신랑이 오기까지 기다리면서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처신 하며 기다린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미련한”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마태복음 7장 26절과 27절에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예 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즉 잘못된 결정을 내리 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처녀들이 미련한 처녀들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가운데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더디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았고, 미련하게도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채 횃불만 가져왔습니다. 반면 슬기로운 처녀들은 횃불과 함께 그릇에 여분 의 기름을 담아서 왔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해 늦을 수 있음을 예상하고, 그것에 대비하여 기름을 따로 준비해서 온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의 예상처럼 실제로 신랑은 예상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열 처녀는 “졸며 잤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결혼식 들러리로 갔으니 여러모로 신경이 쓰여 피곤한데 신랑이 올 것이라고 예상한 시간에 오지 않으니 기다리다 지쳐 졸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던 중 신랑이 드디어 신부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누군가가 “신랑이 왔으니 맞으러 나오라”며 외쳤습 니다. 이 소리에 잠에서 깬 신부 들러리들이 일어나 횃불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미련한 처녀들의 횃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나눠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습 니다. 나누어서 쓰기에는 기름의 양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기름을 조금 나누어 주지 않은 것은 한편으로 조금 놀랍게 느껴집니다. 자신의 소유를 나누고 서로 도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비유는 나눔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종말의 때에 슬기로운 처녀들이 준비한 것은 미련한 처녀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종말의 때에 관한 영적인 준비는 다른 사람에게 이전하거나 나누어줄 수 없다는 것이 비유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종말의 때에 주님 앞에서 신자 개인이 자신에 대해서 책임져야 함을 알 려주고 계십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경건이나 믿음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급히 기름을 사러 나갔지만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신랑이 신부의 집에 도착한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영접하여 횃불을 들고 행렬을 지어 신부와 함께 신랑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신랑의 집에서 혼인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들이 준비한 여분의 기름 때문에 문제 없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랑의 집에 문이 굳 게 닫히며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뒤늦게 신랑의 집에 도착해 문을 두르리며 열어달라 고 말했지만, 신랑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하며 냉정하게 반응했습니다.
사실 신랑의 반응은 실제 마을의 혼인 잔치와는 맞지 않습니다. 마을 잔치에서는 조금 늦게 도착하더라 도 문이 열려 있어서 얼마든지 잔치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종말의 때에는 문이 닫힐 것이고 신랑은 잔치 에 늦은 자들에게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선언할 것입니다. 신랑의 거부, 즉 예수님의 거부는 겉으로는 준 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천국의 도래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거부입니 다. 신랑의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미련한 다섯 처녀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횃불을 들고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다렸지만, 주님과 아무런 인격 적인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비극적인 모습입니까.
이 말씀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종교적인 행위를 한 자들에 관해 말씀하신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주님의 참된 제자라는 것을 입증하지는 못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23절을 보시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 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 냈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했했다고 말할 때 예수님은 그 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자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의 일을 한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나를 떠 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 되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을 나의 참 주님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 나의 영광을 위해 살고 나 의 영광을 위해 주의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결 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열 처녀 비유의 교훈입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육신의 잠을 자지 말고 계속해서 깨어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의 재림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깨어있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언제쯤 되면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다리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 보다 훨씬 늦게 오실 수 있기에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재림의 지체를 염두해 두고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을 준비하라고 하시는데 이 비유만을 보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는 구체적 으로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다음에 두 비유를 이어서 말씀하시며 재림을 기다 리는 신자들이 준비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사명을 주시고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는 기회와 은사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들 을 수 있도록 맡기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 비유를 통해 믿음의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시면서, 지극히 작 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을 자신에게 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천국의 도래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고, 형제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우 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랑되신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 나지 못한 사람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될 것입 니다. 한 평생 주를 위해 살았는데 마지막 그 때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시면 얼 마나 우리의 삶이 비참하겠습니까. 그렇게 주를 위해 사역하고, 예배드리며, 전도하고, 찬양하고, 헌신하 며, 봉사했는데,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이 그저 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는 다 헛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신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준비입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콩고라는 나라를 아십니까. 이 나라는 물이 귀해서 항상 오염된 물만 먹고 살아가는데, 어느날 콩코의 한 사람이 미국 여행 중에 호텔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호텔에 있으면서 수도꼭지를 돌리니 물이 나오는데 깨끗한 물이 한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콩고 사람이 ‘이 수도꼭지를 떼어서 고향 에 가져가면 물 걱정은 없겠다’고 생각하고는 밖에서 렌치를 사와서 수도꼭지를 떼어서 고향으로 돌아갔 습니다. 고향에 오자마자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서 “이제 내가 우리 동네의 물은 다 책임지겠다”고 외 치며 수도꼭지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물이 나왔겠습니까. 단 한방울도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 원지와 분리되어버린 이 수도꼭지는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재림을 준비할 때의 모습도 이 수도꼭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교회에서 예배 드리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전도하는 것을 통해서 겉보기는 멀쩡한 이 수도꼭지와 같다고 할지라 도, 우리의 생명의 근원되시고 구원되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수원지와 분리된 수도꼭지처럼, 포도나무되신 예수님께 접붙임되지 않고 떨어져 있는 나무가 지처럼 가치없고 버려질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냥 습관에 따라서 예배 드리고, 주변 환경 때문에 예배 드리지 않으시길 바랍니 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 위에서 예배도 드리시고, 봉사도 하시고, 전도도 하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 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 없이 그냥 열심만 내면 그 결과는 “너희를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 게서 떠나가라”는 예수님의 무서운 대답 뿐입니다. 항상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주의 말씀에 순종하 고, 세상에 물들지 않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시는 저와 모든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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