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품꾼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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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 전 인터넷 상에서 당황과 황당의 차이에 대해 사람들이 많은 글을 올렸던 적이 있습니다. 사과를 먹는데 벌레가 나오면 황당한 일이고, 벌레의 반쪽만 나오면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길을 가다 화장실이 너 무 급해 트럭 뒤에서 몰래 일을 보는데 트럭이 갑자기 앞으로 출발하면 황당한 일이고, 그 트럭이 후진해 서 나에게 다가오면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려고 하는데 방귀가 나오면 황당한 일이 고, 방귀를 끼려는데 묵직한게 같이 나오면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당황스럽고 황당한 일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겪은 사람 은 바로 포도원에서 일한 품꾼들이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사회 관념과 달리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행동 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품꾼 비유는 19장 23절부터 이어지는 흐름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재 림 때와 천국에 관해서 이야기하실 때 베드로가 가졌던 한 의문으로 인해 본문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들 려 주셨습니다. 천국의 원리에 대해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던 중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포도원 의 품꾼들 이야기를 통해 천국이 어떤 곳인지 쉽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비유는 포도원에 필요한 품꾼을 구하러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을 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예 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노동 시간은 해가 뜨는 시간인 아침 6시부터 해가 지는 시간인 오후 6시까지였습 니다. 오늘 본문의 시간을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으로 바꾸려면 본문의 시간에서 여섯 시간을 더하면 우리 가 사용하는 시간이 됩니다. 즉 주인은 이른 아침이라 표현하는 오전 6시,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오후 5시에 포도원에서 일할 품꾼을 구하기 위해 직접 장터로 나갔습니다.
농장의 주인이 일꾼들을 찾기 위해 직접 장터로 나가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매일 일을 해서 먹고 사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주인이 직접 나가지 않아도 일꾼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청지기를 보내 품꾼을 고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 만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직접 품꾼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 온을 주기로 계약을 하고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이렇게만 해도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주인의 모습이었는데, 이 주인은 이후에 3시간 단위로 장터에 직접 나가서 놀고 있는 자들에게 상당하게 줄 것을 말하며 포도원 품꾼으로 그들을 불렀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추석 때 집에서 가만히 있다 보니 평소보다 뉴스를 많이 보게 되었는데, 오늘 비유처럼 품꾼에 관한 내용 을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기자가 해가 뜨기 한참 전인 4시에 인력사무소가 밀집한 사거리에 나갔습니다. 이미 그 거리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공사장에 가서 일하려 해도 일거리가 별로 없다고 말합니다. 안그래도 힘든데 코로나 때문에 일거리가 더 줄어서 확실히 일을 잡으려 면 새벽 3시에는 나와서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보통 1/3정도는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모습처럼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도 상황은 같았 습니다. 일하고 싶은 사람들이 넘쳐났고, 몇몇은 일거리를 얻지 못해 그 거리에서 그냥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 주인은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이른 아침에 해가 뜨기 전부터 장터에 나가 자신의 포도 원에서 일할 품꾼을 찾았습니다. 해 뜨기 전, 일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의 품꾼을 다 데리 고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전 6시부터해서 다섯 번이나 장터에 나가 사람을 계속 고용합니다. 하루 노동시간인 12시간 중에서 11시간이 흘러서도 장터에 나가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할 사람을 더 고용합니 다. 이야기를 듣는 제자들로 하여금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그런 행동을 주인이 보인 것입니다.
해가 지며 하루가 마무리 되고 이제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앞선 주인의 적극적인 모습과 다르게 주인은 청지기를 시켜 품꾼들에게 삯을 지불하기 시작합니다. 일상적인 모습, 즉 정상적인 임금 지불의 순서는 먼저 일한 사람에게 먼저 임금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청 지기를 통해서 제일 나중에 온 사람에게 먼저 임금을 지불하고, 이른 아침부터 나와 일한 사람에게 마지막 으로 임금을 지불하게 했습니다. 거기다가 마지막에 와서 1시간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는 데, 아침부터 일하여 12시간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대의 노동 규칙이든 오늘날의 노동 규칙에서 보든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임금이라는 것은 노동시간에 비례하여 주 는 것이고, 임금 지불 순서 역시 일한 순서에 따라 주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인이 청지기에게 임금 지불 순서를 바꾸어서 지불하게 한 것은 제일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이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보게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만약 일반적인 순서를 따라 먼저 온사람에게 약속 했던 한 데나리온을 주고 집에 보냈다면 그들은 기분 좋게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열심히 일했고, 자신에 게 약속된 임금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먼저 온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임금을 주어서, 앞에서 자신보다 훨씬 더 적게 일한 자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이라 기대하게 하였습니다. 한 시간 일한 자가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니 이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처음 온 사람들의 기대 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열 두 배 더 일했으니 열 두 배의 임금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몇배는 더 받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고작 한 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비록 주인과 처음 약속한 대로 한 데나 리온을 받기는 했지만, 더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졌을 때 이들은 당황했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의 불만은 12절을 보시면 두 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먼저 온 자들은 “나 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 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째 불만은 제일 나중에 온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 다는 것입니다. 먼저 온 자들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12시간을 일했는데 자신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면 마지막에 온 사람들은 당연히 1/12 데나리온을 받아야만 하는데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그들에 게 준 것이 부당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불만은 주인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면 종일 수고하고 더위를 이기며 일한 자신들에게도 동일하게 은혜를 베풀어 더 많이 주어야 하는데 1시간 일한 자들과 동등하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정하게 하려면 똑같이 공정하게 대하든지, 은혜를 베풀려면 똑같이 베풀어야 되는데 주인은 하루 종일 일한 자신들에게 는 공정의 원칙을 적용하고, 늦게 와서 1시간 일한 자들에게는 은혜의 원칙을 적용하니 부당하다는 것입 니다. 왜 저 사람은 많이 주고 난 작게 주냐고 일한 시간만큼 줘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강하게 반발하는 것 입니다.
뒤이어 나올 예수님의 말씀을 이미 아는 우리의 머리 속에는 자연스럽게 먼저 온 자들을 향해 비판의 목 소리가 나옵니다. ‘아니 원래 한 데나리온 받기로 하고 일했고 그렇게 받았는데 뭐가 그리 불만이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지금 저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라고 먼저 온 품꾼들처럼 원망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분이 계십니까? 제가 저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해보니 저도 분명히 화가 났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만 났을 뿐 아니라 온갖 원망이라 는 원망은 다 하고 뒤에서 호박씨 까듯이 포도원 주인을 욕하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아니 내가 새벽부터 나와서 12시간을 뙤약볕에서 더위를 견디며 일했는데, 고작 1시간 일한 사람에게 일당으로 10만원을 줬 으면 단순히 계산하면 나에게는 120만원을 줘야하는 것 아닙니까? 하루 일하고 120만원은 많으니 그 반 인 60만원이라도 아니 30만원이라도 줘야 주인이 착해서 늦게 온 사람에게 일당인 10만원을 준 것이구 나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포도원 주인은 이런 품꾼들의 원망에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 까? 원래 한 데나리온을 일당으로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자신의 돈으로 나중 온 자에게 그 렇게 주는 것은 자신의 뜻인데, 선한 일을 했다고 악하게 보는 품꾼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온 품꾼들의 마음이 너무나도 이해가 되지만 그들이 주인을 부당한 사람으로 여긴 것이 잘못된 것 이라는 사실을 주인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주인은 노동자와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대로 어김 없이 공정하게 임금을 지불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주인을 부당하게 여긴 것은 주인이 자신들 에게 부당하게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시간만 일한 나중 온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주인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부당한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 입니다. 즉 그들은 자신의 시기심 때문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기존의 공정성이라는 그 원리 때문에 주 인을 부당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원망한 것입니다.
비유에 나타난 인물 중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또는 예수님입니다. 구약에서는 종종 하나님을 포도원 주 인이라 불렀고, 비유에서 주인이 처음에는 낮아졌다가 다시 높아져서 심판하는 분으로 나타나는 것은 예 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예수님이라면 오늘 비유의 핵심 인물인 처음 고용되어 온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학자들의 많은 견해가 있지만 문맥적으로 가장 합당한 것 은 이들을 예수님의 제자들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유대적 관 념과 종교관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판단했던 제자들이 바로 첫번째 고용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위인 19장 27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 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합니다. 공동번역성경은 이 부분을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게 되었습니까?”라고 번역합니다. 예수님 을 따르던 제자들 안에 ‘나의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분명히 어떤 큰 보상이 있을거야’라는 생 각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생각을 잘 아셨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이 자신을 따르면서도 계속해서 가지고 있던 보상주의와 공로주의의 위험성을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하 나님 나라의 원리가 그런 것에 있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 생각을 빨리 벗어버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통해 알 수 있는 천국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부름을 받았냐, 누가 얼마나 일을 많 이 했느냐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인 은혜에 대하여 그 어떤 개인적인 공로를 첨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되지 못하게 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있는 것이지 사람이 무엇을 얼마 나 했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천국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보상과 공로에 대한 우리 의 잘못된 관념을 철저히 부수고 제거해야만 합니다. 나의 신앙적인 열심과 고집, 내 방식의 계산, 자기 방 식의 평가에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유를 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특이한 실험을 했습니다. 어느 동네의 한 구역을 선택해서 집집마다 매일 백 달러 씩 가져다 놓은 후 그 결과를 관찰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실험 첫날 사람들은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닌가 의 아해하면서도 슬그머니 돈을 집어 갔습니다. 자기 집 앞에 돈을 두고 가니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면서도 돈 은 챙긴 것입니다. 이렇게 삼 일이 지나자 백 달러를 집 앞에 두고 가는 사람 이야기로 동네가 떠들썩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을 시작한지 2주일 쯤 지났을 때는 아예 집 앞에 나와 돈을 기다리는 사람이 생기기 시 작했고, 셋째주가 되자 돈을 받는 것을 이상해하지 않게 되었고, 넷째주가 되자 아주 당연한 것처럼 돈을 집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실험 기간인 한 달이 지나자 심리학자는 돈을 집 앞에 놓지 않고 그냥 동네를 지나갔습니다. 이 때 사람 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으십니까? 그냥 지나가는 심리학자를 보고 사람들은 매우 불쾌해 하며 “왜 오늘은 돈을 주지 않고 그냥 가냐?!”고 따졌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유 없이 베풀었던 그 은혜를 당연한 것 처럼 생각하게 되었고, 그 은혜에 고마워하고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제 그것을 주지 않는다며 서운해 하며 불쾌하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자신이 받고 있던 것이 자신의 노동의 댓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실험의 마지막에 이 르러서는 그것이 자신의 것인 것 마냥 불평과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그저 베풀어진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 하고 더이상 주지 않자 거기에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그저 자신의 기준과 습관을 따라 돈을 주지 않은 학 자에게 불만을 쏟은 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자신의 기준에 따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라 생각했기에 오랜 시간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푼 학자에게 불 만을 쏟아내게 된 것입니다.
이 실험과 본문의 비유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세상적인 기준과 원리가 그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따라 하나님 나라가 움직입니다. 자신의 기준과 관점을 따라 생각하면 불만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관점이 아니라 이 땅의 원리와 관점에 따라 평가하니 당연히 세상적인 불만과 불평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마지막 시간, 즉 1시간 남은 그 시간에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자 신이 아침부터 부름을 받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내 기준을 따라 생각하기 때문입 니다. 내 인생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이 부르신 시간대를 계산합니다. 모태신앙이면 아침 일찍 부른 사람 이고, 인생의 늘그막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1시간 남았을 때 부름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서 일찍 부름을 받은 나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쏟아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1시간 남았을 그 때에 부름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1시간 남았을 때 부름 받았음 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일한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될 줄 믿습니다. 나의 잘남이나 나의 섬김, 나의 헌신을 자랑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이상 이런 것들을 나의 공로라 여기며 자랑거리로 삼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저 앞서 와서 일한 자들과 똑같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함께 이런 삶을 살아가기 소망합니다. 이제는 더이상 나의 것, 나의 헌신, 나의 섬김, 나의 노력, 나의 어떠함을 자랑하지 맙시다. 대신 은혜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 하신 하나님을 자랑합시다. 그리하여서 불평과 불만 대신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억 하며, 그 은혜에 감격하여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 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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