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을 넘어 부흥으로(행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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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본문 : 사도행전 2:1-13
[도입]
기독교 역사에 참으로 많은 부흥의 역사가 있지만, 아무래도 국내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또 많은 사람들이 들어봤을 법한 부흥은 ‘평양대부흥’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평양대부흥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또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저는 오늘 설교를 들어감에 앞서 여러분들에게 평양대부흥 운동에 대한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찬양 중 ‘어게인 1907’이라는 찬양이 있을만큼 기독교 역사에 있어 이 운동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많은 이들에게 도전이 되었고 또 많은 이들에게 이때의 부흥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품게 했습니다. 찬양의 제목처럼 평양대부흥 운동은 190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 기간 중에 ‘화이트 맥컬리 하디’ 선교사를 초청하게 되는데, 하디 선교사는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교만함과 신앙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든 이들 앞에서 회개합니다. 그 자리에 모인 자들이 하디의 자백과 회개,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목도하고 그들 또한 동일하게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부흥이야기를 들어보면 한국교회는 이미 충분히 부흥이 이루어지기까지 좋은 환경이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는 생각보다 부흥을 이루지 못하고 정체기에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부흥의 큰 꿈을 안고 대한민국의 땅을 밟았지만, 사실 한국의 기독교는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었습니다. 서양사람에 대한 신기함, 또 궁금증이 있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긴 했지만 그들의 종교에 있어서는 큰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쩌면 선교사들의 입장에 있어 승부수를 띄운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평양대부흥 운동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하디 선교사의 간증과 회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국은 마치 오늘 본문에 기록된 것처럼 뜨거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흥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오늘 날 우리는 그때의 뜨거운 부흥을 또 한 번의 목적으로 또는 소망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묻습니다. 그땐 지금과 같은 코로나가 없어 사회적 어려움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저 복음화율이 낮았던 것 뿐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그때 대한민국은 코로나의 질병으로부터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876년 강화도 조약,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역, 1907년 고종의 퇴위 등 조선의 역사는 비운의 역사를 걷고 있었습니다. 코로나라는 질병은 그 당시 없었지만, 주변 국가들로부터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시달릴 때였습니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괴롭고 힘든 상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평양대부흥 운동이 이들에게 펼쳐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 이 시기를 ‘크리스천’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여러분들과 오늘의 말씀을 가지고 함께 나눠보고자 합니다.
[오순절의 의미]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일 것입니다. 또는 소제목이라도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2장 1절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그들이 오순절 날이 이르러 한 곳에 모여있는 상황입니다. 당시 오순절은 두 가지의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먼저 농업적인 측면에서 오순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날은 유월절이 지난 지 7주 후 또는 50일 후에 지켜졌기에, 이 오순절이라는 날은 첫 추수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측면으로 볼 수 있음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이 오순절이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은 날, 즉 출애굽한지 50일째 되는 날 그 일이 벌어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 역사에 있어 오순절은 추수와 또 율법 수여의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기독교 선교의 첫 열매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초대 기독교 역사의 교부 중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크리소스톰은 이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설명합니다. “말씀의 낫을 댈 때가 다가왔다. 왜냐하면 여기서 날카로운 날을 지닌 낫과도 같이 성령이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오시면 성도들의 마음이 움직여지고, 또 그 움직여진 마음으로 성령을 받은 자들을 향해 낫을 가지고 추수해야 한다. 즉 선교의 첫 열매를 이룰 수 있다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날짜가 오순절이라는 시간과 또 성령이 강림했다는 특수환경 속에서 낫을 대어 추수한다 말하였지만, 우리의 삶에 오순절을 생각해보면 1년의 단 한 번 뿐입니다. 또 성령님이 강림하는 사건을 우리는 목격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이상 낫을 대어 첫 열매를 이룰 수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꼭 그날, 그 상황 속에서만 첫 열매를 수확하고자 단정지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오순절의 마음으로, 또 날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첫 열매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바라옵기로는 코로나로 침체된 상황 속에서 우리도 함께 침체될 것이 아니라, 첫 열매에 기뻐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힘써 복음을 전하는 귀한 청년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코로나라는 시기 속 기독교의 위상은 바닥을 찍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향한 신뢰도가 지난 1월 76%로 급락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신자들이 교회를 찾아옵니다. 또 복음을 듣고자 하는 자들이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이는 어찌 가능한 것입니까? 여전히 첫 열매의 수확을 위해 힘쓰는 크리스천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또 이를 위해 함께 힘써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에 가능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개독교라 욕합니다. 마음 아픈 일이지만, 목회자인 저조차도 가끔은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져 개독교라 말하는 자들의 마음이 때론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복음이 정말 필요한, 하나님의 사랑, 이웃 사랑이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자들이 숨겨져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자들을 향해 사랑의 손길을 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위로와 배려 그리고 인내와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첫 열매를 기뻐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동행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복음을 전해야 할 때가 반드시 주어질 것이고, 또 생각보다 자주 찾아올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복음을 자랑스러워 해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이기에 우리가 자랑스러워 해야 합니까?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부끄러워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구원받아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이 창피하십니까? 그 사실이 여러분을 불편하게 합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구원받은 천국 백성이라는 그 사실이 여러분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 합니까? 왜 우리는 복음 전하기를 꺼려합니까? 바라옵기로는 복음을 전해야 할 때, 그 기회가 저와 여러분들을 찾아올 때 놓치지 마시고 기쁨으로 전하길 소망합니다. 그 복음에 의하여 누군가 소망을 발견한다면, 누군가 복음을 들려주길 기다리고 있던 자였더라면 그들과 우리, 또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날마다 오순절의 수확을 누리는 귀한 청년 공동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누가가 집중한 세 가지 사건]
오순절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이 오순절의 이중적 의미에 있어 큰 중점을 둔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이 날에 한 곳에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이후에 벌어질 세 가지 사건에 조금 더 큰 초점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가 있어 그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건은 ‘그들에게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눈에 보이게 나타났는데, 그것은 각 사람에게 임하여, 각 사람의 소유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누가가 중점을 두었던 사건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놀라운 일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부는 바람에 관련된, 불에 관련된 것이기에 자연적인 일 아닌가 라고 반문을 하지만, 자연적이나 이 모든 것들은 그 이상의 것, 즉 초자연적인 일이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람 소리같지만 바람이 아닌 무엇인가가, 불같지만 불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은 참 많은 혼란을 주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모든 일이 펼쳐지자 12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모두가 놀랐습니다. 당황했습니다. 자연적이나 그 이상의 것, 초자연적인 일이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지니 놀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놀라운 사건들은 ‘성령이 시작하신 새 시대와 또 주님께서 행하러 오신 새 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람같은 소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을 보니,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즉 예수님이 그들에게 증거를 위해 보내 주시겠다 약속하신 것을 보여주신 것. 또 불같은 광경이 펼쳐짐은 정결을 의미하는데, 이사야 6장 6절과 7절을 보면,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를 깨끗하게 했던 핀 숯과 같은 정결함으로 말미암아 불과 같은 정결을 보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나라 말로 하는, 즉 방언의 현장은 기독교 교회가 모든 언어로 말미암아 복음이 선포될 것, 보편성을 상징합니다. 특히 누가는 마지막 사건인, 방언에 초점을 두어 추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세 가지 사건 중 방언]
어떤 설명을 이어갑니까? 6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모든 일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방언으로 말미암아 선포가 됩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 해서 모든 민족이 이 모임 안에 존재했다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하여 주변 국가들, 각자의 언어를 쓰는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방언을 많은 이들이 접했고 바라보았습니다. 또 많이들 당황했을 것입니다.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12절과 같은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방언에 대한 부정적 반응들이 이들로부터 있었습니다. 먼저는 이들이 술취한 것 아니냐 물은 것입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15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취했다 말하지만, 그들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잘못들었다. 청각적으로 오류가 있었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도 이는 충분히 변증이 가능합니다. 6절을 보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또 8절을 보니,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마지막으로 11절을 보니,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결코 잘못들은 것이 아닌 방언이었음을 세 구절을 통해 검증 또 검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마지막으로 발음의 오류로 앞뒤가 다른 말을 한 것이라 말합니다. 발음 중 혀가 꼬여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사용한 것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사용된 방언의 원어를 살펴볼 때 이마저도 충분히 변증함을 볼 수 있습니다.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서도 보여지지만 10장에서도 19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서도 방언이란 단어를 사용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는데, 우리는 이 차이를 통해 발음의 오류가 있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에서 사용된 방언은 ‘방향과 특성’의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포함한 사도행전의 경우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는데 방향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들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고린도전서의 경우 ‘하나님을 향한 방언’이었기에 다른 이들의 통역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순절 성령강림 받은 자들의 방언에 발음의 오류가 있다 주장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며, 무엇보다 이 모든 반박에 있어 이들의 태도를 보면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13절 초반부를 보니,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애당초 이들의 태도는 조롱을 기초로 한 태도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령강림 받은 자들을 비웃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술취했다 말합니다. 이때만 그렇습니까? 오늘 날 신앙생활하는 우리를 향해서도 여전히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사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사도행전 2장 41절입니다.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베드로의 단 한번의 설교로 말미암아 삼천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이 중에 과연 베드로를 조롱하던 사람이 없었을까요? 오로지 듣는 자들만이 그 자리를 채웠을까요? 14절과 15절을 보니, 그 자리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일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조롱하던 자, 취했다 비판하던 자들이 신자로 변하는 역사가 이 자리 가운데 있었습니다.
[쯔빙글리와 흑사병]
스위스의 빌트하우스에서 행정관의 아들로 태어나 1500년부터 1502년까지 비엔나 대학에서 고전학을, 1502년부터는 바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며 인문학에 지식을 쌓았던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쯔빙글리. 그는 도덕개혁을 부르짖던 인문자였으며, 스위스의 애국지사였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그는 사제로써 활동을 했는데, 그 당시 그는 바울서신을 필사하고 해설하는데에 충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그는 ‘지성적 신학’을 지닌 자로써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을 겪기 전까지 말입니다.
1519년 8월 취리히에 흑사병이 상륙하여 9월경에는 대유행의 정점에 도달했었습니다. 그리고 1520년 2월, 흑사병이 멈추기까지 취리히 전체 인구의 1/3이 목숨을 잃게 되는 최악의 경험, 그들 머리 속에 결코 지울 수 없는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쯔빙글리 역시 9월경 흑사병에 감염되어 죽을 위기를 맞았었으며, 그의 동생 안드레아스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이는 쯔빙글리에게 있어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10월 13일자로 동생 안드레아스는 쯔빙글리를 향해 편지에 ‘아직 전염병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기록했었기에, 동생의 죽음은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그는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으로부터 죽다 살아내 생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사제로 시작하였으나 인문학자로써의 변화를 꾀했고 흑사병을 경험했지만, 애당초 그는 종교개혁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머리로만 아는 신학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흑사병을 경험하고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역병가를 제작하여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였고, 그렇게 그는 머리에 있던 바울신학을 가슴으로 내려오기까지 만들어 냅니다.
동생을 잃고 자신의 모든 것이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 바울서신을 통해 배웠던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 및 섭리에 대해서 직접 경험한 것이 쯔빙글리로 하여금 담대함을 가지게 하였고, 종교개혁자로서 많은 위험을 무릎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지성적 신학’에서 ‘마음의 신학’으로써의 변화를 꾀했습니다. 그의 개혁은 이후 불링거에게까지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자 칼빈과 마르틴 루터에게까지 이어져 오늘 날의 기독교의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흑사병으로서의 회복을 뛰어넘어 긴 시간이 걸렸지만, 그렇게 부흥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코로나의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가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아마 ‘내 신앙부터 회복해야지.’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 건강하십니까? 정말 회복해나가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떳떳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여러분 애석하게도 제 잘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와 하나님 둘 사이에 있는 것이지, 제가 그 관계 속에 개입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회복에 있어 얼마나 힘쓰고 계십니까? 날마다 말씀 붙들고 살아가고자 목숨 거십니까?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여러분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의 삶은 그 위협으로부터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세상의 조롱과 비웃음 속에서 베드로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회복을 꾀했습니다. 그리고 삼천명이라는 부흥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쯔빙글리 역시 흑사병이라는 전염병이 취리히 전체 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참담한 상황 속에 있었음에도 신앙의 회복을 꾀했고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종교개혁으로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오늘 날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우리는 위협합니다. 벌써 2년의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저와 여러분. 2년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정말 나의 신앙 회복하기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까? 이제는 저와 여러분이 말로만 하는 ‘지성적 신학’을 지닌 자가 아닌 ‘마음의 신학’을 지닌 자로 변화되길 소망합니다. 정말 회복해야 합니다. 이러다 정말 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함에 있어 우리의 신앙, 과연 건강했는가? 회복했는가? 생각해봅시다. 또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고, 여전히 하나님과 거리두기 하는 중이라면 함께 회복합시다. 그리고 함께 부흥합시다.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 기도와 찬양을 가까이 함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남은 시간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걸어가도록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청년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 지난 날 하나님과 거리두기 한 나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 신앙의 회복의 대로를 걸어가 한 해를 조금은 하나님과 가까워짐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 나를 통해 삶과 가정 그리고 청년부와 교회에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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