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에서 벗어나 충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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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착각에서 벗어나 충성으로
본문 : 디모데전서 1:12-17
[도입]
오늘날 우리가 목자를 맡는 것에 있어 부담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 일 것입니다. 내게 맡겨진 목원들을 케어해야만 하며, 또 그들을 향해 때로는 쓴소리도, 때로는 격려와 위로도 해주어야 하는 일종의 감정소모가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자가 가지는 역할에 대한 부분에서 오는 부담감도 있지만, 단순히 그 부담감 때문에 우리는 목자를 꺼리는 것일까? 목자를 감당하기 위해선 목원들 케어를 위해 날마다 말씀을 묵상해야 하고, 날마다 기도할 수 있어야 하며, 또 목자모임과 목장모임 등 준비해야하는 외적인 부분에서도 너무나 많은 과정과 일들이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원하든 원치않든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럼 그 안에서 업무에 따라 직분의 상승을 누리기도 하고, 물질적 보상을 얻기도 합니다. 물론 직분의 상승이 있을 때 우리는 더 넓은 시야로 업무를 바라보기에 더 큰 부담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감당해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를 감당해낼 때, 비로소 우리에게 물질적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5일이라는 시간을 각자의 위치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주말에 쉼을 얻어야 다음 한 주를 살아내는데, 교회에 와서 목자를 맡아라, 또는 찬양팀을 섬겨라, 임원으로 섬겨라 등 사역의 자리를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주일 지키는 것도 벅찬데 목자라니요? 임원이라니요? 찬양팀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주일에 예배 드리는 것만 해도 저는 감사할따름인걸요.’ 어쩌면 이 모습이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있는 마음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시기적절한 하나님의 메세지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의 배경]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디모데전서, 이 서신의 수신자는 디모데입니다. 1장 2절에 기록된 바,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라 기록함으로 우리는 이 편지의 수신자가 디모데임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서신을 디모데에게 한 것으로 우리와 관련이 없다 말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디모데전서 마지막 장인 6장을 볼 때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6장 21절, 마지막장 마지막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그 은혜가 어디까지 함께 하십니까? ‘너희와’ 즉 오늘날 이 말씀을 보고 은혜를 구하는 우리에게까지 이 말씀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로는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또 내게 주시는 은혜요 하나님의 메세지로 귀히 듣는 시간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수신자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런 그가 사역을 감당하는 지역이 어디입니까? 디모데가 사역을 감당하던 지역은 바로 ‘에베소’입니다. 우리는 에베소에 대해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난 겨울 수련회를 통해서, 또 종종 에베소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에베소가 어떤 지역인지 자주 접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기억력은 언제나 한계가 있습니다. 마치 우리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어제 배운 것을 우리는 종종 다음날 까먹게 됩니다. 다음날도 길다 여깁니다. 쉬는시간 종이 울리면 방금 배운 수업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 기억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정도면 학교 종소리가 우리에게 기억상실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되지만, 어찌되었든 우리는 들어도 들어도 까먹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설명하며 여러분들과 함께 오늘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 같은 배경 속에서 은혜를 구해 나가길 소망합니다.
에베소는 로마의 매우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지중해가 에베소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상 시스템이 크게 발달한 지역이 바로 에베소 입니다. 해상으로 이루어지는 교통에 있어 요충지이기도 했으며, 해상무역 또한 크게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무역활동이 활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많은 타지역 사람들이 유입이 됩니다. 로마사람뿐 아니라 많은 지역의 사람들이 에베소의 땅을 밟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에베소 지역에 어떤 문화가 생기게 됩니까? 타종교, 타지역문화가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이태원을 가보면 확실히 개방된 문화가 담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옮겨져 평택을 가면 미군문화를 주변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국민이 아닌 타지역 사람들이 넘어올 때에는 그들의 문화와 또 종교가 자연스럽게 따라오며 자리를 잡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가 그랬습니다. 해상무역이 활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곳에 이방문화와 이방신들이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방신 중 정말 유명한 것이 이 에베소 지역에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아데미’신전이 이곳에 있었습니다. 출산을 상징하는 아데미가 가장 유명한 이방신으로 존재했고, 또 그 아데미를 향해 예배할 수 있는 신전이 에베소에 있었으니, 어떤 일이 자연스레 생기게 됩니까? 이를 구경하기 위해, 또 아데미 앞에 나아가 예배하기 위한 일종의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이 물밀듯 몰려오게 됩니다. 그럼 자연스레 생기는 것이 그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숙소가 발달하게 되고, 그들을 통해 기념품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마치 우리가 많은 관광지에서 지내면 알 수 있듯, 타지사람들 입맛에 맞춘 문화들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게 현 에베소의 모습이었고 시점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지금 디모데는 사역자로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또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여러분, 여름이 되면 놀러다니던 동남아를 생각해보십시오. 보라카이를 함께 생각해봅시다. 코로나가 끝나 보라카이로 휴양을 갔습니다. 얼마나 행복합니까?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저렴한 가격에 즐비합니다. 또 바다가 끝이 없습니다. 언제든 빠져 바다수영을 즐길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라카이에는 3대 선셋이 있지 않습니까? 노을이 지는 그 시각, 해변에 앉아 또는 요트에 앉아 그 선셋을 구경한다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고 상상만 해도 행복해 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라카이의 기독교 복음화율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불과 1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보라카이 역시 많은 관광객들과 타지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도 갔을 때 한국사람을 못보는 날이 하루도 없었을정도로 많은 관광객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에베소가 그랬을 것입니다. 많은 타지 사람들이 찾아왔고, 그들 눈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보라카이에 불과 10%도 안되는 복음화율을 위해 힘쓰고 계신 선교사님들 시선에 과연 그곳이 우리의 시각처럼 아름다웠을 것인가? 외관적으론 아름다울 수 있지만, 사역자의 입장으로는 너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디모데도 그랬을 것입니다. 에베소는 많은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아름다움만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제주도 좋아하십니까? 제주도 참 좋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제주도를 갈 때 주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아십니까? 제주선교라 말합니다. 같은 한국땅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제주도를 선교하러 간다 표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주도의 복음화율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보라카이보다 저조합니다. 7%에 불과합니다. 주로 신학적으로 10% 미만의 복음화율인 곳에 나아갈 땐, 선교란 단어를 붙입니다. 제주가 7%에 불과하니, 우린 제주를 선교하러 간다 말합니다. 그 아름다운 땅, 쉼과 여유와 회복이 있는 그 땅에 많은 사역자들이 복음을 들고 내려갑니다. 그리고 제주의 텃새와 문화 속에서 고난과 고통을 겪고 금방 올라온다 합니다. 어쩌면 디모데는 지금 제주도와 같은 상황 속에 놓여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디모데가 여전히 믿음 안에서 참 된 아들이라 일컬음 받는 것이 어쩌면 심히 대단한 일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사역을 하게 되었는가? 신분의 변화가 있었다]
우린 이러한 디모데전서를 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지, 또 사역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사역을 해야합니까? 13절을 함께 봅시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의 과거가 드러납니다. 그는 예수를 비방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를 박해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죽이기 위해 힘썼던 자이며, 그를 따르는 자들을 폭행으로 대하던 자였습니다. 모든 예수를 믿고 따르던 자들이 증오하던 자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나의 과거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이는 내가 예수를 믿지 아니하고 알지 못하였을 때’라 말합니다. 그런 그가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역을 하게 된 이유는 ‘신분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그들을 욕하고 괴롭혔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또 백성으로 또 종으로서의 신분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사역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도 바울, 그에게 어떤 모습으로의 신분의 변화가 생겼습니까? 14절 함께 봅시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증오를 받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를 믿고 나니 ‘예수께 은혜 입은 자’로 신분의 변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세상을 보면 사도 바울과 같이 예수를 비방하던 자가 예수를 믿어 은혜 입은 자의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음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김익두 목사님을 아십니까? 그는 초기학국교회사에서 불의 사자라는 별명을 지닌 목사님입니다. 그는 항일운동에 투신하여 조국광복운동에 기치를 높이기도 했으며, 조국이 광복하자 그의 소원인 기독교 박물관을 남산 조선신궁터에 짓기도 했으며, 우리가 잘 아는 마포 삼열 선교사와 함께 한국교회사학회를 창립하기도 했으며, 여러 곳에서 목회함에 힘쓰는 뜨거운 열정과 에너지로 불의 사자라는 별명에 딱 맞는 활동을 해오셨던 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익두 목사님의 걸어오신 발자취를 보며 참으로 뜨겁고 귀한 열정을 맛볼 수 있어 감사하며 또 그 열정이 제게도 심겨지는 것 같아 귀하다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김익두 목사님의 어린 시절을 보면 너무나 마음 아픈 일들이 많아 모든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의 어린시절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중산층의 가정에 태어나 걸인들을 구제하며 노인들을 공경하는 가정에서 자랐으며 6세때부터 서당에서 배움을 시작해 장래가 촉망 받던 자였습니다. 그렇게 학업의 시기를 거쳐 과거시험을 봤을 때 낙방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게 됩니다. 이는 자신에게도 또 아버지에게도 큰 충격이었고, 과거 장질부사라는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이 있었던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시고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그는 눈물로 긴 시간을 보낸 뒤 불교로 귀의했으나, 윤회사상에 큰 환멸을 느끼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김익두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가장으로써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고, 그는 지방 토산물들을 구매해 평양에서 판매하는, 또 평양에서 토산물을 구매해 지방에서 판매하는 모습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하루는 길에 떨어진 돈주머니를 줍게 되는데 그 안에는 큰 돈이 있었고 이를 몇날 몇일 돌아다니며 끝내 주인에게 찾아 주어, 그 주인이 감동을 받았고 마침 그 주인은 읍내 가장 큰 상점을 경영하는 자였으며 김익두의 이런 인간된 모습을 보며 감동하여 지배인으로 고용하기까지 합니다. ‘불행 끝 행복’이라는 말처럼 그의 삶에는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만 같았습니다. 일을 참 잘해 상점의 수익은 날마다 늘어났고 이런 신뢰 속에서 전당포 역할까지 감당하게 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김익두를 향한 혼사처가 들어왔고 그는 2살 연하의 ‘전익선’이라는 여자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의 나이 불과 18세에 말입니다. 승승장구하던 그의 앞에 친구가 다가와 동네에 큰 공장이 들어오는데 이곳에 투자하라는 제안과 부탁에, 그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연대보증에 도장을 찍게 되었고, 그것은 친구의 사기행각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하루아침에 걸인이 되어 세상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한탄하며 술을 가까이 하게 되었고, 술에 취해 거리의 사람들에게 시비와 폭력을 일삼고 장날에는 부녀자들과 할머니들의 노점상을 뒤엎는 행동으로 지역주민들의 공통 기도제목이 ‘오늘 하루는 제발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주세요.’가 될 정도로 그의 상태는 날마다 심각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중 그에게 한 여선교사가 전도지는 나누어 주었고, 그는 ‘서양귀신을 믿으라는 건가?’라며 코를 풀어 바닥에 던졌으며, 그를 본 여선교사는 ‘청년, 전도지로 코를 풀면 코가 썪어요’라며 꾸중을 주었습니다. 그들의 만남은 한 번 더 이루어졌는데, 이 날은 왜인지 그가 전도지를 구겨 주머니에 넣고 집에 돌아와 무심코 그 전도지를 읽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전도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이 꽃과 같으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세세토록’이라는 네 글자와 ‘영원하다’는 네 글자에 충격을 받고 ‘누가 그 말을 했기에 그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인가?’라는 의문점을 품고 몇날몇일 밤잠을 설쳤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친구 박태환이 한 선교사의 부흥회가 있는데 같이 가자 권유하였고, 그는 마치 그 권유를 못이긴 척 부흥회에 참석했다 합니다. 그날은 스왈렌 선교사의 부흥회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못볼 것을 보았다듯이 김익두를 보게 됩니다. 혹여나 무슨 행패를 부릴까 걱정 또한 했다 합니다. 그러나 부흥회를 통해 서양 사람이 한국말에 능숙한 것에 놀랐고, 서양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자 많은 사람이 모인 것에 또 놀라고, 자신 또한 이 곳에 앉아 있단 것에 놀랐다 합니다. 놀람 끝에 자신도 자연스레 부흥회에 녹아들고 있었고 그날 그는 지난날에 대한 회개와 죄용서를 구하는 날이 되었다고 합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과거 세상과 등을 지며, 기독교인들을 서양 귀신을 믿는 자로 여겼으며,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폭행과 비방을 일삼았으며 마치 사도 바울의 과거와 같은 모습을 우리는 김익두 목사님으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함으로 신분의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처럼 그 또한 은혜 입은 자로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로, 사랑을 받는 자로써 변화가 이루어 집니다.
또 어떤 변화가 이루어 집니까? 15절을 함께 봅시다.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기도 하지요.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는 이제 ‘구원 받은 자’로써 신분의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사실 자신의 삶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또 죄인이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나면 어떤 변화가 이루어집니까?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김익두 목사님 또한 스왈렌 선교사의 부흥회를 통해 지난 날 자신의 과오가 스쳐 떠올려지며 자신의 죄인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상인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 받은 자’로의 신분의 변화를 누리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변화가 이루어 지는가? 16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단순히 예수를 믿는 자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본을 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로 변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김익두 목사님도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기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걸인들을 도왔고, 노인들을 섬겼고 약한 자들을 도왔습니다. 국가를 위해 힘써 싸웠습니다. 특히 치유사역에 힘썼는데, 그는 자신의 치유 능력이 자신의 힘이나 능력이 아닌 오직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 선포하며 믿음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에게 치유받은 자들이 약 1만명이 넘는다 하니 자만할 법하나 그는 늘 겸손했고 주님께서 행하셨음을 강조 또 강조 해왔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예수를 닮아가고자 누구보다 힘썼던 인물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사역을 하게 되었는가? 그에게는 신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과거 핍박과 고난을 주던 자였지만 예수를 믿고나니 삶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은혜와 믿음과 사랑 받은 자’로써의 변화가 주어졌습니다. ‘죄에서 구원받은 자’로써 변화가 주어졌습니다. ‘주를 닮아 가는 자’로써 변화가 주어졌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그 신분에 맞게 살아가게 되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는 사역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역을 허락하신 하나님]
그러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7절과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는 모든 사역의 현장에 있어, 또 과정과 결과에 있어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자신이 감옥에 있던 것도, 핍박을 받던 것도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임을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완전히 변한 자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신분의 변화를 경험한 사도 바울은 날마다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영원무궁하신 영광 속에 거하는 자로써 삶을 살아가며 그 안에서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 그가 사역을 감당함에는 신분의 변화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그렇담 그의 마음 속 자진하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사역을 감당했습니까?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사명을 스스로 결단하여 다짐하여 나아갔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변화되었다 하여 스스로 결단하여 나아온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많은 크리스천들은 착각 속에 빠져 살아갑니다. ‘주님. 제가 오늘부터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찬양팀을 섬기겠습니다.’ 또는 ‘주님. 제가 열심을 다해 교회를 치우고 섬기는 사역을 감당하겠습니다.’ 라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임을 압니다. 하지만, 이는 큰 착각에 빠져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명백히 말하건데 여러분. 사역을 결정함에는 ‘내’가 없습니다. 1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여러분 직분을 주시는 이가 누구십니까? 변화된 우리를 향해 사역을 맡기시는 이가 누구십니까? 내 의지며, 내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직분을 감당하게 됨은, 우리가 사역을 감당하게 됨은 내 의지, 내 능력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사 맡기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이러이러한 사역을 감당하겠습니다.’는 하나님이 아닌 나를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잘되면 내탓, 안되면 하나님 탓으로 돌리기 아주 좋은 포지션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나를 능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능력을 허락하셨다 고백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어떻게 기록합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옥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백합니다. 비록 감옥에 있으나 이 안에서도 내가 능력을 행함은 나의 위대함이 아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라 고백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내가 비록 감옥에 갇혀 비참한 신세에 있더라도 이 또한 감당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역을 감당하는 자가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도 바울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실 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기도합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마저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받아들이시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의 기도는 비참한 것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내게 맡겨진 일들에 있어 최선을 다하지만, 주어지는 결과에 따라 좌절하기도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은 계신겁니까?’라며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곤 합니다. 이런 삶 속에서 우리에게 사역은 꿈도 꿀 수 없는 포지션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큰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사역을 하고 말고는 내가 정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인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고, 삶의 변화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은혜 입은 자로, 구원 받은 자로, 주를 닮아가는 자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우리를 향해 사역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허락하신 사역을 감당하면 됩니다. 어떤 능력으로 말입니까? 내 능력으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힘으로 말미암아 그 사역을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부르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지금 당장 네가 게바라 할 것이 아니라 장차 게바라 부르시는 것과 같습니다. 즉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부르셨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다짐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짐 속 주어진 사역과 직분, 우리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주의 능력으로 감당할 때, 그렇담 우리가 취해야 할 모습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4장 2절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충성하는 자로써 최선을 다해 감당하면 됩니다. 그저 그것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 하고 내년 사역을 준비함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위해 최선을 다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내년 사역을 위해, 올해 남은 사역을 위해 그리고 사역을 결정하고 있는 자들은 ‘내 결정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고 허락하심’을 알아 그저 충성으로 감당할 마음을 준비할 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시고 기대하시고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는 청년부 모든 인원이 되길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에 감사하며(은혜 입은 자, 구원 받은 자, 닮아 가는 자)
- 맡겨진 사역에 그저 충성되이 감당할 수 있도록
-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마음과 충성을 허락해 달라고
- 회복을 넘어 부흥의 주역에 내가 서있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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