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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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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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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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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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찬송
322장 /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기도
성경봉독
서론
우리가 이번 한 주 동안 살펴 보았듯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말씀을 통해
삶의 구체적인 부분에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그 지침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받을 때에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그렇게 행동하는 그 동기와 의도이다.
다시 말해 그 일을 해도 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
그 답 자체보다도 그 답을 택하게 된 그 과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껍데기만 흉내내는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금 배우고 돌아보는 복된 시간 되기를 소원한다.
본론
1-5절
바울은 10장을 시작하면서 먼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구체적으로는 모세를 통해 출애굽을 경험하고
광야 40년 생활을 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광야 세대라고도 불리는 이 사람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이적을 경험했다.
갈라진 홍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가기도 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함을 받으며 광야길을 걷기도 하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기도 하고 반석에서 솟아나오는 물을 마시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의 결말이 어떠한가?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인해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바울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계속해서 6-11절 말씀을 읽어보자.
6-11절
구약 말씀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귀한 교훈을 준다.
바울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던 이스라엘의 광야 세대의 죄악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들은 우상 숭배를 하고, 음행을 행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러한 죄로 인해 광야에서 죽게 된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우상 숭배와 음행을 행하지 말고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원망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 깊이 깨닫지 못하고
죄를 짓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6장에서도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하면서
죄 짓는 것에 대해 경계했던 바울이
여기서는 좀 더 구체적인 구약의 실례를 들며 권면하고 있다.
바울은 11절에서 ‘말세를 만난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부터 예수님의 재림 사이의 기간이 바로 ‘말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계속해서 12-13절 말씀이다
12-13절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잘하면 ‘구원'받고, 내가 잘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잘해서 ‘구원'받았는데,
구원받은 이후에 내가 잘못하면 받은 구원을 빼앗기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풀어주시는 것이고,
구원얻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우리가 받은 구원을 지키시고 이끄시는 분 또한 하나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이 편지의 서두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해
우리의 구원 또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12절의 말씀의 의미를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받은 구원을 다시 빼앗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매일 매순간을 내가 받은 구원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과 염려 속에 살라고 주신 말씀도 결코 아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영적전투를 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영적으로 깨어 살아가라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성령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때때로 죄의 유혹과 시험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죄에 빠지지 않고 믿음의 길을 경주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이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 원한다.
계속해서 14-18절 말씀이다.
14-18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권면한다.
바울을 그들을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다.
바울이 얼마나 그들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을 향한 이 충고와 권면이 얼마나 진심어린 것인지 잘 보여주는 말이다.
‘우상 숭배'를 왜 피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제정하신 성찬식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시며
그 자리에서 성찬예식을 제정하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잔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는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성찬식에서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것은
단순히 떡과 포도즙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그 자리에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은
예수님의 몸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몸과 하나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18절 말씀에서 바울은 구약 제사 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에는
제물을 가져다가 성전 제단 위에 올려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드린 제물은 그 제사의 성격에 따라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먹기도 했고,
제사를 드린 사람과 이웃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 먹기도 했다.
이렇게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제물이 바쳐진 제단에 참여하는 것이고
곧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나 우상에게 제사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19-22절 말씀이다.
19-22절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4절에서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라고 선언하였다.
다시 말해 우상은 그 실체가 없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20절 말씀에는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가?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분명 앞에서는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우상숭배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상이 실제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우상 뒤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 귀신이 있다는 말이다.
타락한 영인 사탄과 귀신들은 실제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여전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 사이에서 역사하여
그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 그 이면에는 이러한 사탄의 역사가 숨어 있다.
바로 우상 숭배의 그 이면에도 이러한 사탄과 귀신의 역사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교묘히 이용해 우상을 만들게 하고
그 우상에 매여 살아가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며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다.
우상을 섬기며 그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귀신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이다.
그런 우리가 어찌 귀신과 교제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노하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가 감히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주의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8장에서는 바울이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더니
여기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듯 우상을 섬기며 우상에게 제사하고 그 제물을 먹는 것을 금하라는 말이다.
반면에 8장에서 이야기하는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상의 제물’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2가지를 다 고려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우상은 실제하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다른 음식을 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이나 아직 그 영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그 우상과 그 너머에서 역사하는 귀신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과 관련해서
8장에 이어 한 번 더 정리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23-30절 말씀이다.
23-30절
바울은 8장 1절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씀했다.
다시 말해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자랑하고 그것에 따라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사랑의 마음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덕을 세우는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이다.
바울은 여기서도 동일하게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무슨 뜻인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우리는 진리 안에서 자유를 얻었고
그 자유 안에서 우리는 모든 일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유익함'과 ‘덕'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행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유익함과 덕은 나를 위한 유익함과 덕이 아니라
나의 형제자매와 나의 이웃들의 유익함과 덕을 의미한다.
바울은 24절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씀한다.
그것이 사랑의 마음인 것이다.
바울은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멀리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덕을 세우는 일에 관심가져야 한다.
나의 행동이 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그들을 위해 나의 행동을 기꺼이 절제하며 나의 자유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상의 제물과 관련된 몇 가지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지난 시간에 설명한 것처럼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 지역에서는
시장에서 내다 파는 고기나 음식 중의 상당수는 이방 신전에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다.
바울은 시장에서 파는 음식을 먹을 때에는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말하는 양심은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의 양심이 아니라
그 음식을 파는 사람이나 함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양심을 가리킨다.
만약 그 자리에서 이 음식이 우상의 제물이냐고 질문해서
그렇다는 대답을 듣게 된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에 연약한 믿음을 갖고 있는 이들은
그 음식을 먹는 것에 양심의 거리낌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26절에서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혹여나 그 시장에서 파는 음식이 우상의 제물이었다 하더라도
그 또한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기에
감사함으로 그 음식을 먹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또다른 상황을 예로 든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의 초대를 받아 그 곳에서 음식을 먹게 된다면
그 음식의 출처를 묻지 말고 감사함으로 먹으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만약 그 자리에 함께 한 이들 중에 누군가가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이라고 말하게 된다면
그것을 말한 사람의 양심을 위해 그 음식을 먹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왜 그런가?
누군가가 그 음식이 제물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 사람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 양심상 거리낌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 음식을 먹게 된다면
그 말을 꺼낸 사람의 양심은 상함을 받게 될 것이다.
비록 나 자신은 우상의 제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지식도 갖고 있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자유로운 양심으로 그 음식을 먹을 수도 있지만
함께 하고 있는 그 사람이 그러한 나의 행동을 보고
양심에 상처를 받게 된다면 그 사람을 위해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동의 기준이 어떠해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31-33절 말씀이다.
31-33절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하는 것을
자신의 삶과 행동의 첫번째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교회의 재정집행 첫번째 원칙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이다.
너무나도 성경적인 재정집행 원칙이다.
우리는 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먹을까 하는 일에서부터
우리의 하는 모든 일의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야 하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가 하는 것을
자신의 삶과 행동의 두번째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유익할뿐만 아니라
세상의 믿지 않는 이웃에게도 유익한 일을 우리는 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함인 것이다.
결론
바라기는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사람들에게 유익한 삶 되기를 축복한다.
죄를 멀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복된 삶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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