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3) 세 친구들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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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욥 8:1-7 찾아 읽어보기

1. 욥기의 구조

1~2장: 배경, 서사
3~37장: 세 친구들과의 논쟁(대화) 3라운드 + 엘리후(제4의 인물)
3장: 욥의 독백(생일 저주)
4~14장: 엘리바스-욥-빌닷-욥-소발-욥
15~21장: 엘리바스-욥-빌닷-욥-소발-욥
22~31장: 엘리바스-욥-빌닷(짧게-25장)-욥(26~31장, 28장-지혜의 장)
32~37장: 엘리후의 말(엘리후는 독특한 인물이다. 그 말에 대한 평가도 분분하다.)
38~41장: 하나님의 등장과 말씀
42장: 결론, 서사
오늘 다룰 본문은 4장부터 25장까지다.
음성이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모든 대화부분(3~41장까지)은 시이다.

2. 세 사람의 공통점

2-1. 동정심

세 사람은 동정심이 있는 친구들이다. 멀리서 찾아와 7일을 침묵하며 같이 아파했다.
욥기 2:11–13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그들의 동정심은 한계를 보였고, 왜곡됐다. 종종 가까운 사람이 더 많은 상처를 준다.

2-2. 종교성(경건)

세 사람은 매우 종교적이다. (좋게 말하면, 경건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
어떻게 보면 욥의 “생일 저주”(3장)때문에 친구들의 논쟁이 시작된다고 볼 수도 있다. 처음 말을 시작한 엘리바스의 요지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욥기 4:3–6 (엘리바스)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욥기 15:4 (엘리바스)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그만두어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욥기 5:8 (엘리바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엘리바스는 조심스럽게 말한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오라는 권면이다. 나쁜 것인가?
세 친구들의 경건(종교심)은 하나님의 “크심과 무한하심”을 강조한다는 데에서 나타난다.
욥기 5:9 (엘리바스, 이어서)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욥기 11:7–9 (소발)
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욥기 25:2–6 (빌닷, 세 친구들 중 마지막 답변)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고, 하나님을 비난하는 듯한 말을 견디지 못한다.
욥기 8:2–3 (빌닷)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빌닷은 엘리바스에 비해 조금 더 직접적이고 공격적이다.

2-3. 전통과 경험(을 중시한다)

가장 연장자인(욥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엘리바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욥기 5:27 (엘리바스)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분석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욥기 15:9–10 (엘리바스)
네가 아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깨달은 것을 우리가 소유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흰 사람도 있고 연로한 사람도 있고 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느니라
욥기 15:17–18 (엘리바스)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내게서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전하여 준 것이니 그들의 조상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빌닷도 비슷
욥기 8:8 (빌닷)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전통과 경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도리어 유익하다. 우리는 옛 선조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역사로부터 배우고, 지혜자들의 격언과 속담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것을 맹신할 때 위험하다.

3. 세 친구의 잘못

3-1. 동정심: 성급하게 “답”을 말한다

세 사람은 연륜있는 선생이다. 그들은 “욥을 위해서” 정답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려움 속에 있는 자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e.g. 아픈 사람에게 “면연력이 떨어져서 그렇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렇다. 운동 안해서 그렇다” 는 정답은 도움이 되지 않는것과 같다. 차라리 “같이 운동하자!”가 낫다.
기독교는 “기도밖에 없어” “기도가 답이다!” “기도하면 다 응답받는다” “믿으면 다 된다” “믿음만이 능력이다” “순종하면 복받는다”
➡︎ 나쁜 의도로 말하지 않았을 지라도, 문제는 보편화, 일반화 시킨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랑의 법”이 없다. 개별화가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군중(대중)으로 묶어서 본다.
그러므로 잘못된 충고(답)를 한다. “다시 하나님을 경외해라. 온전한 길로 돌아와라”
욥기 8:5–7 (빌닷)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7절)
욥 8:7욥 8:20-22 은 “소망”을 말하는 듯하지만, 잘 못된 근거 위에 세워진 거짓 소망일 뿐이다.
욥기 26:2–3 (욥)
네가 힘 없는 자를 참 잘도 도와 주는구나 기력 없는 팔을 참 잘도 구원하여 주는구나
지혜 없는 자를 참 잘도 가르치는구나 큰 지식을 참 잘도 자랑하는구나
➡︎ 우리는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한다(약 1:19).
e.g. 부부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 공감. 남편에게 더욱 필요한 것. (남편도 공감받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아내가 접촉사고를 내서 남편에게 전화한다. 남편의 반응은? “왜 그랬어?” “괜찮아? 놀랐겠다. 내가 갈께”
e.g. 자녀에게, “친구가 나 놀렸어” ➡︎ 너가 뭘 잘못했겠지, 복수 해줘. 놀지마 X, “슬펐겠다. 지금 마음이 어때?”

3-2. 종교성: 결국 자기 의를 드러낸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열심은 결국 자신의 의를 드러낼 뿐이다.
로마서 10:2–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욥기 8:3–4 (빌닷)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두셨나니
문제는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닫는다는 것이다. 여러 번 틀리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틀릴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답은 정해졌다.
**만약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욥의 세 친구를 책망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38~41장)을 다 듣고도 자신들이 옳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그들은 자신들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처럼 주장한다.
욥기 20:18–19 (소발)
[악인은]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 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욥기 20:26–29 (소발)
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
부드러웠던 엘리바스도 결국에는 노골적으로 말한다.
욥기 22:4–9 (엘리바스)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건함 때문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권세 있는 자는 토지를 얻고 존귀한 자는 거기에서 사는구나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
➡︎ 문제는 그들이 “온전한” 욥을 정죄할 뿐 아니라,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다.
요한1서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3-3. 전통/경험: 고정관념-현세적 응과응보를 고집한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인과응보”의 관점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판하기 어려운 관점이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뿌린대로 거둔다”
갈라디아서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욥기 4:8 (엘리바스)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의롭고 공정하게 세상을 다스리신다(심판하신다)는 신념에서 나온다. (도덕적 통치/질서)
➡︎ 그들이 생각하는 “인과응보”는 (1) 현세에서 (2) 일대일로 (3) 즉각적으로 (4) 완전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인간 경험의 핵심은 “인과응보”다. 우리는 고정관념을 깨지못한다. 우리는 그렇게 배워왔다.
“네가 심은대로 거둔다” “콩심은데 콩 나고, 팥심은데 팥난다” “네가 노력한 만큼 얻는다.”
“옛말이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다. (이중 응보: 좋은 사람에게 좋은일이 일어나고 나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다)
욥기 8:20 (빌닷)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시므로
시편 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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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고난에 관한 엘리바스의 해석
욥기 5:17 (엘리바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징계”라는 표현은 위로가 되는 말일 수 있지만, 지금 욥에게는 맞지 않다. 욥은 “까닭 없이”(욥 2:3) 고난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답: 엘리바스의 결론은, “회개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널 구해주실 것이다”
욥기 22:21–23 (엘리바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하건대 너는 하나님의 입에서 교훈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면 네가 지음을 받을 것이며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하리라
이러한 충고는 “종교적”으로 매우 맞는 말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교훈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욥에게는 맞지 않다. 욥은 하나님의 허락하에 “까닭 없이”(욥 2:3) 고난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 문제는 그에게는 “의인을 위한 고난”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해못하는 일을 하시는 것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다.
e.g. 아브라함의 말을 듣는다면, (1) 너가 미쳤다 (2) 하나님/신이 미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해 못할 방법으로 이루실 구원을 예표하셨다.
e.g. 요셉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2) 너가 미쳤다 (2) 하나님/신/꿈이 미쳤다.
요셉의 이야기는 메시야의 구원 사역을 예표한다.
e.g. 예수님의 수난 예고 때, 베드로의 반응
마태복음 16:21–24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질책]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지금도 유대인들은 “고난받는 메시아” 개념을 받아들이지못한다.
“빌닷에게는 구속하는 고난을 위한 자리가 없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에, 빌닷의 체계에는 희생 제사를 위한 자리 가 없다… 빌닷이 지지하는 종교 체계는 은혜가 없는 체계이고, 따라서 위로가 없는 체계다. ” (애쉬)
욥은 하나님께서 “의인”에게도 고난을 주신다는 사실을 배워간다. 이를 통해서 그는 “대속의 원리”를 더듬어 찾아간다. (서론 참고, 욥은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다음 시간에 설명)
➡︎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욥)에게도 구원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배워간다.

4. 적용

4-1. 동정심: “답”이 아니라 “사랑”이다

자식을 망치는 방법: 동정심이 지나쳐서 지나치게 감싸고 돌 때. 떠먹여 줄 때 (마마보이)
자신을 망치는 방법: 자기 연민
노숙잘를 망치는 방법: ? 자립하지 못하게 함, 선교도 마찬가지-교회를 세워주고 재정지원.
e.g. 외국인 도와줄 때, 먹을 것, 도움 필요하지만 그들이 변하는 건 사랑이다.
그들이 문제가 해결되서 사랑을 느끼는게 아니다. 같이 아파해주고 같이 울어서 그렇다.
사랑은 단순히 불쌍히 여기고 떠먹여주는 것이 아니다. 답(해결책)을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고린도전서 13:4, 7
사랑은 오래 참고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e.g.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것을 보라. 고난을 주시며 기다리신다. 깨우쳐 돌아올 때까지
➡︎ 긍휼히 여기는 마음(공감)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함께 아파하고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
우리도 도리어 욥의 친구들처럼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마태복음 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e.g. 노숙자, 무기력한 사람, 우울증에 빠진 사람, 침체된 사람, 신앙적 열심이 없는 사람에 대해
로마서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욥의 친구들이 3장의 욥의 불평과 그 후의 불평을 끝까지 들어줬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가?

4-2. 종교성: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열심이 나쁜 것인가? 기도, 봉사, 전도, 말씀, 심지어 목회/선교/말씀연구, 하나님을 향한 사랑
“겸손”이 필요하다.
“겸손”은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이다. 자신을 아는 일은 하나님을 아는 일과 함께 간다. 즉 창조주 vs. 피조물
친구들은 그것을 알고 찬양하지 않았는가? 높으신 하나님?
문제는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격체”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질적 차이만 강조했다. 크신 하나님, 불가해한 하나님(원리), 그러나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한다. (그들의 찬양?을 보라. 욥기 11:7–9)
사실, 그들은 하나님을 조종하려 한다.
사람은 미래가 불확실한 것을 참지 못한다고 했다. 통제하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계산한 대로 움직여야 한다. “믿은대로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은대로 움직이는 “원리”일 뿐인가?
종교인들은 기도와 정성으로 하나님(원리)을 묶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g. 존 오스틴 “믿음의 원리는 모든 자에게 통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믿음에 의해 움직이는 원리일 뿐이다!
➡︎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목사가 이걸 잘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하거나, 기대한 방식으로만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은 기도응답을 못받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고난에 관해서.
잠언 25:2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야고보서 4:13–16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 미래를 확신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거다”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원하시는 뜻대로 하신다는 것을 받아드려라.
출애굽기 33:19
...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친구들의 “불가해성"과는 다르다. 인격적 고백

4-3. 전통/경험: 복음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는다(복음의 역설)

세상 사람을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고린도전서 1:20–21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서기관]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선포/설교]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복음의 역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
사람은 착한 일을 한 사람이 천국에 가고 나쁜 일을 한 사람이 지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e.g. 시골 할머니, 법 없이도 살 사람, 그러나 복음을 말하면 화낸다.
그래서 그들은 최후 심판 때에 착한 일 vs. 나쁜 일을 비교하여 더 기우는 쪽으로 판결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우리는 “보상”해야 한다. 그러나 반성경적이다.
e.g. 우리도 그런다. 죄를 지으면 우리는 본성적으로 “보상”하려고 한다.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모든(과거-현재-미래) 형벌을 다 받으셨다고 분명히 말한다.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없다.
복음을 받아 들인 자는 “의인의 고난”을 믿는다. “성도의 고난”을 믿는다.
우리는 선교지의 선교사들의 고난은 잘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어떤 고난을 말하는가?
베드로전서 2:19–21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의 작은 고난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겪어야만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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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진리의 역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행동행도“뿌린대로 거둔다”
“너가 노력한 만큼 얻는다”
이 것은 세상의 원리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훈련받았고 경험했으며, 과거로부터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복음은 “역설적”이다. (반대되는 듯하나/모순되는 듯하나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는 의미)
사도행전 20:35
…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마태복음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빌립보서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6:8–10
…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종교지도자들을 조심하라>

이단들이 이 원리를 사용한다. 이단 뿐 아니라 “율법주의적”인 거짓 목사들 이러한 종교적 심리를 이용한다.
e.g. “십일조 안 해서 문제가 생겼다.” “주일성수 안해서 사고가 났다.” “목사님 말을 안 들어서 하나님께서 치셨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걸 (1:1 대응으로) 말하고 그걸로 두려움을 조장하고, 그 두려움에 근거해 행동하게 한다면 그건 사탄의 속임이다.
e.g. “믿음”이 없어서 병이 낫지 않았다. 더 열심히 “기도”하지 않아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정성”이 부족하다. 자녀문제 등. “영적인 원리와 비법들”을 만들어 낸다.
종교는 “정성”으로 신을 감동시켜서 복을 받아 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복을 주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로 반응한다.
로마서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종교는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고 착한 일을 했으니 보상을 받는다고 말한다. (중립적 인간)
그러나
복음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모든 사람이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사람이 받는 “모든” 복은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때문이라고 말한다.
거짓 목사들은 자신들도 감당하지 못할 짐을 교인들에게 지운다.
마태복음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3–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마태복음 23:23 (NKRV)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cf. 외식하는 자[바리새인]의 기도(눅 18:9-14)
➡︎ 하나님의 성도는 하나님의 일군(목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열매[삶]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 20)
성도의 고난을 기다리는 목사를 찾으라. 문제해결의 “정답”을 말해주는(말 잘하는) 목사보다 함께 울어주는 목사를 귀히 여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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