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서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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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부 수련회 설교2 / 2021.08.01
본문 : 시편 32편
제목 : 죄에서 하나님께
설교자 : 윤영준 목사
주제: 우리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죄때문이다.
죄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자.
[천로역정 영상] 어깨의 짐이 굴러 떨어지는 장면
우리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언제인가요?
프로포즈에 성공했을때? 결혼할 때? 자녀를 낳았을때?
대학에 합격했을 때? 원하는 꿈이 이루어졌을 때?
이 모든 순간들이 기쁨의 순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순간은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기쁨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나는 자유다!”라고 외치는 그 순간을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최고의 행운아는 로또를 맞은 사람이 아니라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사하심을 받은 사람
=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가 보기보다는 잘 씻는 사람이다.
하루에 두 번 샤워할 때도 있고, 한 때는 매주, 2주에 한 번 목욕탕에 가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코로나라서 공중목욕탕에 못간지 너무 오래되었다.
육체를 못 씻는 찝찝함보다 더 한 것은 마음의 찝찝함이다.
[로스쿨]이라는 드라마에는 한 명의 검사가 뺑소니를 사고를 내고 수습도 치지 않은채 도망갔다. 증거들도 없애고, 증인들도 없어서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
그런데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찜찜함, 양심의 찔림, 내 범죄가 발각될것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이 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의 무게가 점점 거대해져서 수십년동안 그의 인생을 파괴해나가고, 오히려 죄를 고백했을 때 자유함을 경험할 정도이다.
육신의 때를 벗겨내는 것보다 더한 쾌감과 자유함이 죄를 고백한 사람에게 있다.
모든 사람들은 벗어던질 때의 개운함 /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죄인이 아닌 사람은 없다.
이 시를 쓴 사람이 누구일까요?
시를 보면 굉장한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보인다.
3-4절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죄의 짐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고 눌러서 그의 몸의 뼈가 가루가 될 정도가 되었다고 말한다.
도저히 한마디의 말도 할 수없을 정도로 괴로워서 신음만 내고 있으며, 생명의 진액이 다 말라 죽어가는 상태라고 말한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악인인것 같다.
놀랍게도 이 시를 쓴 사람은 다윗이에요.
어제 우리가 함께 나누었잖아요.
다윗은 자신이 죽음에 처해있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찾았던 사람이에요.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갔던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다 이게 맞아! 이건 정당한거야! 정당방위야! 해도,
하나님 뜻이 내게 더 귀해라고 고백했던 사람이에요.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다윗은 자신의 부하인 우리야를 죽음으로 몰고 나서 그의 아내를 취한 후
죄의 고통을 느끼면서 쓴 시가 이 시이다.
다윗은 양아치다. 힘이 있는 양야치이다. 만약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손가락질하고 욕하며 내쫓을 것이다. 이런 다윗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나요?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나요? 다윗같은 죄를 저지른 사람은 평생 죄책감을 자지고 살아가다가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서 3장 10절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죄를 용서받지 못할 사람은 없다.
세상 밖에 사는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 “나는 안돼!” 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교회는 마치 깨끗한 순백색의 옷을 입은 깨끗한 사람들만 다닌다고 생각하는거죠. 나처럼 더럽고 새까만 옷을 입고 다니는 죄를 저지른 죄인은 다닐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가요? 우리 중고등부는 아무나 누구든지 들어 올 수 있는 공동체인가요?
미국의 어떤 교회는 현관에 시꺼먼 페인트통을 가지고 와서 잔뜩 쏟아서 부어버렸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요? 메시지를 주는 거에요.
“교회는 깨끗한 사람만 오는 곳이 아닙니다. 모든 죄인들이 올 수 있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라는 메시지죠.
우리나라에는 ‘양떼 커뮤니티’라는 곳이 있다.
‘양떼’하면, 음매에 우는 양을 떠올리겠지만, 양떼의 약자는 양아치떼거리들의 약자이다.
그야말로 사회에서 내어놓은 친구들, 사회에서도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내놓은 친구들.
그리고 그 친구들을 품고 사역하시는 분이 계시고, 그 분이 사역하는 곳에서도 열매가 나타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우리를 한 줄로 세워놓으시고,
자~ 보자! 여기까지는 통과 !! 저놈은 저거저거저거저거 안돼 탈락 !!
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어요. 왜요?
우리를 죄에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해서에요. 우리의 죄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서 깨끗게 해주시시기 위해서에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경험해주도록 하기 위해서에요. 우리에게 진정한 죄로부터의 벗어남이 무엇인지 /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시기 위해서에요.
저 언덕에는 누가 설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설 수 있다. 십자가 앞에는 우리 모두 설 수 있다.
“하나님, 내 잘못을 모두 털어놓습니다.” 고백할 수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주님을 찬양하자!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기도제목이 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자신들이 알지 못하나이다.”
우리 같으면 죽어가는 그 상황에서, 나를 위한 기도, 나와 가까운 사람을 위한 기도를 하겠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가장 먼저 하신 기도가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리고 그 기도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었던 사람 두 명이 있었다.
바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 죄인 두 명이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의 강도는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되었다.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들 사이에서 당연하지 않은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죄를 짓지 않은 한 사람 / 그리고 그 형벌을 받으면서도 원수들을 향해 기도하는 한 사람.
예수. 우리 곁에서 당연하지 않은 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강도가 진정으로 변화된 까닭은 그 죄에 대한 정죄와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받도록 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과 용서가 담긴 예수님의 한 마디였다.
“하나님,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그 십자가에서 받으신 예수님의 죄의 값과
원수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사랑받을 것 없는 그들을 사랑 안으로 초대하였다.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초대되었다.
지금까지 강도는
“너는 벌을 받아 마땅한 자야.
너는 벌을 받아야되는 죄인이야.”
라는 말을 남들에게 들으며 살아왔고,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여겼다는 것이죠.
지금까지는 내 상황에 대한 불평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불만이 강도 안에 가득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강도를 사로잡았다. 강도 자신은 그 가운데 사라지고, 예수님이 그 안에서 살아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죠.
“벌을 받아 마땅한 너도 사랑한다.
벌을 받아야 되는 죄인인 너를 위해 내가 이 십자가에 달렸고,
이 사랑으로 너를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강도의 고백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작은 소망 - 혹시라도 당신이 그 나라에 갈 때에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마치 강도의 고백을 기다렸다는듯이
예수님은 강도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
강도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갖게 된 작은 소망이
사실은 예수님이 간절히 바라셨던 소망이였기 때문이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보다 내가 더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늦은 때라는 것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고백할 수 있다.
그 작은 소원이 나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으로부터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기다리고 계신다.
예수님은 내 입술로 작은 고백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그 믿음을 가지고 내 삶의 작은 고백을 예수님께 올려드리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를 기다렸단다. 이제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가장 행운아는 죄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
하나님께 용서받고 깨끗해진 사람이다.
[기도제목1]
누가 십자가 앞에 서야 할까요?
내가 싫어하는 그 친구?
아니면 맨날 방구석에서 게임만 한다고
맨날 싸돌아다닌다고 잔소리하는 우리 엄마 아빠?
아니죠. 십자가 앞에서는 내가 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원수된 나를 향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 앞에 서줄 수 없다.
주님은 “OO아, OO아” 부르고 계신다.
그래! 바로 내가 주님 앞에 설 사람이다.
오늘 내가 주님 앞에 엎드리고, 주님 앞에 나의 죄를 고백하며, 주님이 나를 용서해주신다.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친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James L. 멜톤이라는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군대나 무력을 동원해 정복하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심령 속에 사랑을 심으심으로 이기셨다.”
[기도제목2]
천로역정에서 ‘십자가’를 대면하는 장면은 언제나오는가?
영화 마지막이 아니라 영화 초반에 나온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신앙의 길을 걸어간다.
하나님과 그 길을 걸어간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간다.
나는 혼자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함께 해야 가능하다.
우리 중고등부가 그런 공동체가 되어가길 원한다.
함께 걸어가는 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