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손은 안전합니다

역사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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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은 다윗에게 힘을 붇돋아 주었으나 사울은 여전히 다윗을 죽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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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Samuel 23:24–29 NKRV
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29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서론

외쳐보자
하나님의 손은 안전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안전합니다.
봉독은 사무엘상 23장 24-29절까지, 본문은 19-29절까지의 말씀
‘하나님의 손은 안전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 나누고자 한다.
2달전 이 시간. ‘위로자인가 훼방자인가'라는 제목으로 설교. 기억하시는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여기저기 도망다니고 있는 다윗을 요나단이 찾아온다.
요나단은 다윗을 위로하고 그가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도와준다.
우리도 요나단과 같은 위로자되길 원한다.
우리의 참된 위로자되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가 되길 원한다.
오늘 본문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렇게 요나단이 다윗을 위로하고 돌아간 뒤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울은 다윗의 행방을 쫓아 다녔고, 다윗은 사울을 피해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이 찾아온다.
다윗의 은신처를 누군가가 사울에게 밀고를 하고 사울은 부하들을 이끌고 그곳을 급습한다.
꼼짝없이 다윗이 붙잡히게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벌어진다.
그런데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사람과 상황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펼쳐진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손 안에 있는 다윗을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이 시간 그 말씀 속으로 함께 들어가보기 원한다.

본론

19-20절

1 Samuel 23:19–20 NKRV
19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20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울은 다윗을 찾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마 사울은 다윗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소문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다녔을 것이다.
삼상 23:14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1 Samuel 23:14 NKRV
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사울은 매일 매일 다윗을 찾아 헤맸다.
앉아도 다윗 생각, 일어서도 다윗 생각
누워도 다윗 생각, 깨어나도 다윗 생각. 온통 다윗 생각뿐이었다.
좋은 생각이면 참 좋겠는데,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기와 살인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윗을 없애야 내가 왕의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수 있는데...
다윗을 없애야 내 왕위를 내 아들에게 물려 줄 수 있는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해야할 많은 일들은 뒤로 한 채 다윗을 찾아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다윗을 찾아 해맸지만 다윗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제 너무 지쳐서 다윗 찾기를 포기할만한 그런 상태였을지 모른다.
그런 사울에게 어떤 사람들이 찾아온다.
바로 ‘십'이라는 성읍에 살고 있는 사람들
‘십'은 헤브론 남동쪽 황무지, 광야에 위치한 성읍
이스라엘의 유대 지파에 속한 성읍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성읍 중 하나였다.
다윗이 자기들 성읍 근처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사울에게 알린 것이다.
그들은 사울에게 ‘다윗을 왕의 손에 넘기는 것이 바로 자신들의 의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왕의 반역자를 찾아내 죽이는 것이 백성된 당연한 의무라는 것이다.
왕에게 충성하는 것은 백성의 당연한 의무이다.
충성된 왕의 백성처럼 보인다.
심지어 ‘십' 사람들은 바로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 사람들이다.
베냐민 지파 출신인 사울에게 자기 지파 출신인 다윗을 넘겨 주려고 한다.
그들은 지파와 혈연을 뛰어 넘어 왕에게 충성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그들의 동기가 무엇인지는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어쩌면 진짜 다윗이 왕을 배신한 반역자라 여겼을 가능성도 있다.
사울이 가짜뉴스를 만들어 소문을 내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다.
자신을 선한 왕으로, 다윗을 왕을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시도한 반역자로 말하고 다녔을 것이다.
거기에 순진한 십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 충성심으로 무고한 다윗을 고발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오히려 다윗 때문에 자신들이 위험에 처해질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사무엘상 22장을 보면
다윗에게 떡과 칼을 주었다는 이유로 제사장 아히멜렉을 비롯한 놉에 있는 모든 성읍 사람들이 몰살당한다.
사건은 온 이스라엘에 소문이 났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23장에도 다윗은 자신이 구한 그일라 성읍을 사울이 와서 멸할 것을 염려한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자신들이 살고 있는 부근에 다윗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십 사람들도 두려웠을 것이다.
사실과 상관없이 다윗에게 은신처를 제공했고 동조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울에게 충분히 몰살당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사울 편에 서기로 결정한 십 사람들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선택이고, 올바른 행동이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할 것인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21-23절

1 Samuel 23:21–23 NKRV
21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22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23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십 사람들로부터 다윗의 행방을 들은 사울은 무척 기뻐한다.
마치 가뭄에 비를 만난 사람처럼 기뻐한다.
사울은 그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를 불쌍히 여겼다.
이 말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백성이 왕에게 할 말이지 왕이 백성에게 할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왕인 사울은 백성인 십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다'라고 말한다.
지금 사울의 심정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얼마나 초조했는지...
지금 사울은 심리적으로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22장 8절을 보면 사울은 자신의 신하들을 모아 놓고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또 사울은 매일 다윗을 찾아 다녔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의 편에 서서 도와주는 사람도 없어 보이고, 다윗도 잡을 듯이 잡을 수 없었다.
그럴 때 십 사람들이 찾아와 자기 편에 서 주었을 뿐 아니라 다윗의 행방을 알려준 것이다.
정말 십 사람들이 고마웠을 것이다.
사울은 더 나아가 그들에게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말한다.
이 말만 들으면 너무나 경건한 말이다.
사울이 신앙심 깊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사울은 어떤 사람이며 그의 마음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다.
그의 마음에는 시기와 살인의 마음이 가득 차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증오하시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그에게 없다.
그럼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십 사람들에게 축복의 말을 전한다.
십 사람들이 한 일이 복 받을 일인가?
의인을 악인에게 팔아 넘기는 것이 복 받을 일인가.
전혀 아니다.
진정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무엇을 기뻐하는지 안다면,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경외한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울의 이 말은 종교로 치장된 거짓이다. 속임이다. 위선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경고하셨다. 마 7:15; 눅 11:39.
Matthew 7:15 NKRV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Luke 11:39 NKRV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들의 모습이 이러했다.
겉으로는 종교적 예식과 겉치례로 경건한 척, 거룩한 척, 신실한 척 했지만
그들의 속에는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Matthew 23:27 NKRV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러나 사실 정도의 차이일 뿐 이 땅의 죄인된 모든 사람들의 실상이 이러하다.
겉으로는 착한 척, 의인인 척 하지만 본성부터 타락한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3:10-18 에서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말씀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하나님께 복을 받을 자격도 없고 하나님께 복을 빌 자격도 없는 죄인이 우리의 모습이었다.
아무튼 사울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섣불리 움직여 다윗이 미리 알아채고 도망칠 것을 염려한다.
그래서 은밀하게 다윗의 은신처와 관련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한다.
이 장면은 마치 헤롯대왕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었을 때의 반응을 연상케 한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고 예루살렘을 찾아왔다.
그들을 만나 헤롯은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말한다.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마 2:8)
실상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하면서도 겉으로는 그에게 경배하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짧은 내용 속에서 온갖 모략술수로 자신의 죄악된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모습.
그러면서도 헛되이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모습.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도구와 수단으로 삼는 어리석은 모습.

24-26절

1 Samuel 23:24–26 NKRV
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이렇게 십 사람들과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해 길을 떠난다.
사울 편에 선 사람들이 있었다면, 반대로 다윗 편에 서서 다윗을 돕는 사람들도 있었다.
25절 -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을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린다.
원문을 보면 ‘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다.
어쩌면 십 사람들 중에서 자신들이 한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만약 이 사람들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다윗은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붙잡혔을 것이다.
사울은 십 사람들로부터 다윗이 있던 장소를 정확히 알고 그 곳에 은밀하게 접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사울을 피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로 이동한다.
더 남쪽으로 사해를 따라 유대 광야로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워낙 사울이 가까이 접근했기 때문에 그들의 추격을 따돌리기가 어려웠다.
26절 - 사울과 그 일행이 산 이쪽으로 가면, 다윗과 그 일행은 산 저쪽으로 갔다.
마치 술래잡기와 같은 상황이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 이리로 피하고 저리고 피하고 있는 모습이다.
탈출할 수 있는 곳은 보이지 않은 채 점점 포위망이 좁혀 오고 있었다.
다윗은 필사적으로 사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26절 -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다.”
여기서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라는 구절 원문을 직역하면 ‘다윗은 사울의 얼굴을 피하여'이다.
다시 말해 “다윗은 사울의 얼굴을 피하여 급히 도망쳤다"이다.
일종의 의역인 것이다.
창 3:8 -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와 동일한 표현.
참고로 사무엘상 21장에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지역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삼상 21:10 -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이 본문도 ‘사울을 두려워하였다’를 직역하면 ‘사울의 얼굴을 피하였다'이다.
물론 ‘얼굴을 피한다'는 표현에는 ‘두려워서 피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성경은 다윗의 내면의 심리보다는 사울과 다윗 사이에 쫓고 쫓기는 그 긴박한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두려움'이라는 감정 자체가 문제되는 건 아니다.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라는 표현을 두고 ‘다윗이 믿음이 없었다'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다윗은 이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들 속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있다는 뜻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믿음으로 이겨 내라고, 뛰어 넘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셨다고 말씀한다(마 25:28; 막 14:34).
참 하나님이시며 또한 참 사람이신 예수님도 죽음과 그 죽음의 고통 앞에서 큰 감정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기도 가운데 이겨 내신 것이다.
혹여나 어떤 형편과 상황 속에서 ‘두려움'과 ‘염려'의 감정이 들 때 그것 자체를 믿음 없는 걸로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감정을 믿음으로 이겨내기를 원하신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형편과 상황보다도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두려움과 염려를 이겨내는 우리들이 되길 원한다.
사울과 그 부하들은 아라바에서 다윗과 그 수하들을 따라잡는다.
사울과 다윗의 거리는 점점 좁혀진다.
26절 - ‘에워싸고 잡으려’ 했다고 말한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도록 퇴로를 차단하고 둘러싸서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다는 말이다.
사울의 눈 앞에 다윗 일행이 보이고 조금만 더 좇으면 드디어 다윗을 잡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정말 자신의 뜻을 이룰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그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다.

27-29절

1 Samuel 23:27–29 NKRV
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29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다윗과 수하들이 사로잡히기 직전, 전령이 한 소식을 들고 찾아온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공하고 있으니 빨리 와 달라는 급한 전갈이다.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어쩔 수 없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그의 발길을 되돌린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침공한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간다.
지금 되돌아가지 않으면 나라 자체를 빼앗기게 될 상황이 된 것이다.
사울 입장에서는 정말 어려운 결정을 한 셈이다.
한발만 더 내디디면 이제 정말 다윗을 붙잡을 수 있는 상황인데, 다윗을 포기할 것인가.
어쩌면 사울에게 있어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이 때 다윗 잡기를 포기한 것이라 대답할지 모르겠다.
하필 왜 이 때 블레셋이 이스라엘 땅을 침공했을까?
이스라엘 서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던 블레셋은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고 있었다.
오늘 본문인 있는 23장 시작이 블레셋이 이스라엘 땅 그일라를 공격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분명 블레셋에게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잡고자 군사들을 이끌고 이스라엘 동남쪽 사해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마주하고 있는 서쪽 지역의 방비는 분명 허술해졌을 것이다.
블레셋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령이 도착한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하다.
차라리 더 일찍 오거나 더 늦게 왔다면 사울 입장에서 다윗을 잡지 못한 아쉬움이 더 적었을 것이다.
지금은 말 그대로 ‘다 잡은’ 다윗을 그냥 놔주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연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다.
사울의 손에서 다윗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뜻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임한 것이다.
섭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섭리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평범한 생활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 속에도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상황과 조건을 이끌어가신 것이다.
사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인간적인 교만을 꺾으셨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결단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특히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 그런 것 같다.
사울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기름부어 그를 세운 것을 알면서도 그를 죽이기만 하면 자신의 왕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을 자신의 권세로 다 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본디오 빌라도의 예
대제사장 무리에 끌려온 예수님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빌라도는 말한다.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 19:10)
내가 원하면 너를 살릴 수도 있고, 너를 죽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대답 -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다.”(요 19:11)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 특별히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살리고 죽이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다.
신 32:39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Deuteronomy 32:39 NKRV
39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다윗을 인간 사울이 결코 빼앗을 수 없었다.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사건이다.
자신들을 추격하는 사울 무리와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더 도망칠 곳도 없었다.
어쩌면 ‘더 이상은 도망칠 수 없다, 이제는 끝이다.’는 절망감과 두려움이 그들을 엄습했을 것이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자기들을 쫓아오던 사울 군대가 갑자기 추격을 포기하고 스스로 포위망을 풀어버린 것이다.
아마 그 순간에는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야 블레셋 침공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노력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구원'을 그들은 경험했다.
사람들은 이 곳의 이름을 ‘셀라 하마느곳'(히: סֶ֫לַע הַמַּחְלְקוֹת, 셀라 하마흘레코트)이라 부른다.
셀라 - 바위
하마느곳 - 분리하다, 나누다
셀라 하마느곳 - 분리하는 바위, 나누는 바위.
다윗과 사울이 나뉘어진 곳이라는 뜻이다.
도망하던 다윗과 붙잡는 사울이 거의 하나가 될 뻔했는데 그곳에서 나뉘어진 것이다.
다윗이 붙잡혀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던 그 자리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결론

하나님의 손은 안전합니다.
그 하나님의 손 안에 다윗이 있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다윗은 안전했습니다.
사울은 결코 다윗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Proverbs 18:10 NKRV
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Proverbs 29:25 NKRV
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는 줄 믿는다.
마지막으로 다윗의 시 하나를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고자 한다.
시편 54편
시 54편의 표제어 -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바로 다윗이 오늘 본문의 상황 속에서 지은 시이다.
그의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시 54편
Psalm 54:1–7 NKRV
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3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7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다윗의 이 귀한 믿음대로 하나님은 다윗을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이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안전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안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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