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자인가 훼방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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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은 다윗에게 힘을 붇돋아 주었으나 사울은 여전히 다윗을 죽이고자 한다

Notes
Transcript

성경봉독

1 Samuel 23:15–18 NKRV
15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서론

오늘이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 설
설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
비록 코로나로 인해 가족 친지와 마음껏 만나 마음껏 즐길 수는 없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기쁨이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있길 소망.
땅과 하늘에서 풀리는 2021년 한해가 되길 소망.
마이더스의 손
원래 이 표현은 ‘인간의 탐욕스러움’을 나타내는 부정적인 말
마이더스, 즉 미다스라 불리는 그리스 왕이 있었다.
그는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이루었지만
결국 그 소원 때문에
먹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딸마저 황금으로 변하는 슬픔을 겪게 되었다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그런데 오늘날에는 ‘하는 것마다, 손 대는 것마다 다 성공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긍정적인 표현
여기에 반대되는 표현이 있다.
마이너스의 손.
플러스가 아니라 마이너스가 된다는 뜻.
마이더스의 손에 빗대어서 ‘손 대는 것마다 다 실패하는 사람'을 가리킴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는가?
마이더스의 손? 마이너스의 손?
재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줄 믿는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님들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시길 원한다.
재물과 관련해서 ‘마이더스의 손’과 ‘마이너스의 손'이 있다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그냥 함께 있기만 해도 기분 좋은 사람이 있다.
속상하고 안좋은 일이 있어도 그 사람 말 한마디로 기분이 다 풀리고 좋아진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사람.
감사하게 되고 찬양하게 된다.
이런 사람을 ‘위로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반대의 사람
기분이 좋다가도 이 사람을 만나거나 이야기 나누면 좋던 감정이 다 사라짐.
함께 있거나 이야기 나누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어려워진다.
불평이 쌓이고 원망하게 된다.
이런 사람을 ‘훼방자'라고 이름지어 보았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위로자, 플러스가 되어 주는 사람인가?
훼방자, 마이너스가 되는 사람인가?
오늘 우리는 말씀 속에서 한 위로자를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요나단'이다.
오늘 말씀 속에서
위로자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우리가 위로자가 될 수 있는지 배우는 은혜의 시간 되기를 원한다.

본론

배경설명

잘 아시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배경을 잠깐 살펴보자.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움 받은 ‘사울’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버림받게 됨.
하나님은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왕으로 세우심.
사울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왕의 자리에 앉아 있음.
심지어 다윗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자로 여기고 그를 죽이고자 함.
다윗의 절친이자 멘토였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밑에 있으면서도 다윗을 도와줌.
다윗은 그의 일행과 함께 사울을 피해 여기 저기 도망다니고 있었다.
오늘 본문 15절 앞에 나오는 14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광야의 요새’와 ‘십 광야 산골’ 등을 왔다 갔다 하며 몸을 숨겼다.
이러한 배경 속에 오늘 본문은 시작한다.
15-16절을 살펴보자.

15-16절

1 Samuel 23:15–16 NKRV
15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당시 다윗은 사울을 피해 ‘십 광야 수풀'에 숨어 있었다.
히브리어로 ‘지프’라 불리는 이곳.
마온 지방 산간 지대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한 성읍
인구가 별로 없는 대초원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도망자들이 쉽게 숨을 수 있는 곳.
수풀
히브리어로 ‘헤레스 / 호르샤'
나무가 우거진 숲이나 수풀을 가리키는 일반명사
그러나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광야지역에 숲이 있다는 것은 흔치 않다.
십 광야 어딘가에 있는 숲이 우거진 한 곳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이해할 수도 있다.
나무가 우거진 수풀은 몸을 숨기기에 좋은 피난처였을 것이다.
다윗은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사울을 피해 이곳 ‘십 광야 수풀'에 숨어 있었다.
이곳으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찾아온다.
아마 목숨을 건 모험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사울의 눈도 피해야 한다.
적과 내통한 역적이 되는 것이다.
이미 사울이 의심의 눈초리로 요나단을 지켜보고 있었다.
또한 다윗의 일행에 의해 적으로 오인받아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다윗을 찾아 나섰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신의 생명같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과 그 우정이 변하지 않았다.
요나단이 다윗을 찾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백방으로 다윗이 어디에 있는지 수소문해서 그 정보를 모았음을 의미.
그런데 정확한 위치는 아마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아마 지금 다윗에게는 위로자가 필요했던 것 같다.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는 시간도 점점 길어지면서 몸도 마음도 지쳐갔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이 방랑의 시간 앞에 두려움과 절망도 생겼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힘을 북돋아 주시기 위해 요나단을 위로자로 보내 주신 것이다.
분명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었다.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또한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다윗도 누군가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다.
하나님은 직접 일하시기도 하지만,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도 하신다.
지금 하나님은 요나단을 통해 다윗을 위로하신다.
혹시 지금 위로가 필요한가? 격려가 필요한가?
하나님께서 위로자, 격려자를 보내주시길 원한다.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 위로자 되신다는 사실로 위로받을 뿐 아니라
사람을 통해, 환경을 통해 우리를 위로해 주시길 원한다.
혹시 우리 주변에 위로와 격려가 필요해 보이는 이가 있는가?
우리가 그들의 위로자, 격려자가 되어 주길 원한다.
Matthew 25:35–36 NKRV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로자가 되라 말씀한다.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우리 교회를 소개하는 글 중에
“한국교회는 우는 이와 함께 울고 웃는 이와 함께 웃습니다.”라는 문구.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가 우리 서울광염교회
대외적으로, 대내적으로 힘쓰고 있고 있다.
이번 설을 맞아 우리 교회에서는
각 교구별로 위로가 필요한 성도님들에게 설 선물을 전달하는 시간.
저도 처음으로 참여해 보았다.
코로나 상황이라 쉽지 않았지만,
교회의 사랑을 전하며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며 위로하는 시간을 가지니 참 좋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로자가 되길 원하신다.
‘서로 위로하라'로 명하신다.
그런 우리 되길 소망한다.
그런 우리 교회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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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서 요나단은 다윗을 위로한다.
분명 다윗은 요나단을 만나 큰 위로와 힘을 얻었을 것이다.
어쩌면 다윗의 억울함과 처지를 가장 잘 이해해 줄 유일한 사람, 요나단
그런 요나단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자신의 속을 다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이자 멘토를 만났을 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는가?
그 험한 길을 뚫고, 위험을 무릎쓰고 자신을 찾아온 요나단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
큰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나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한다.
16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1 Samuel 23:16 NKRV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힘 있게 의지하게 하다”
히브리어 원문 직역 - ‘손을 강하게 하다’.
다시 말해, 요나단은 다윗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그의 손을 강하게 했다.
우리 모두에게는 위로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위로자는 하나님이시다.
결코 사람의 위로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다.
유한한 인간이 주는 한시적인 위로로는,
무한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위로를 대신할 수 없다.
요나단은 다윗이 우리의 영원한 위로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다시 힘을 불어넣어 준다.
어떻게 요나단은 다윗을 위로하는가?
이어지는 17절 말씀을 보자.

17절

1 Samuel 23:17 NKRV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이 말 속에는 생략된 말이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요나단의 이 말은 상황을 보고 한 말이 아니다.
지금 돌아가는 판세를 살펴보니,
아버지 사울이 너를 잡으려고는 하지만 결국 실패할 것 같아 보인다.
너 다윗은 비록 지금 도망다니고 있지만 왕이 될 확률이 더 커 보인다.
승산이 있으니까 조금만 더 버티고 힘 내라.
이런 식의 말이 아니다.
믿음으로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선포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한다.
삼상 15장에서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
이에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을 향해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이야기함(삼상 15:26).
그리고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다고 선언(삼상 15:28)
아마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은 이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또 삼상 20장을 살펴보면
요나단은 사울을 피해 왕과의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다윗을 변호한다.
그 때 사울은 요나단에게 화를 내면서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삼상 20:31)라고 말함.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자신의 왕위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그 대상이 다윗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러 정황들을 볼 때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을 대신해 하나님께서 택한 자가 다윗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면 요나단은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요나단은 자신이 아버지 사울을 이어 왕이 되지 못하고,
다윗이 왕이 될 것임을 인정했다.
그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인정했다.
이 모습은 마치 세례 요한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요 3장에서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예수님께로 다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요 3:27-30).
John 3:27–30 NKRV
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의 태도이다.
사실 누군가의 ‘위로자'가 되어 준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좋은 친구 사이에도 ‘사소한 이해 관계'가 충돌되어 서로 원수가 되는 게 우리 인간의 모습.
위로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내 것을 포기해야 한다.
만약 요나단에게 ‘사심'이 있었다면,
아버지를 이어 내가 왕이 되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결코 다윗을 위로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다윗의 위로자, 격려자가 되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기에 분명 요나단도 아쉬움과 섭섭함이 있었을 것이다.
왕의 아들이지만 왕이 되지 못한다는 자신의 현실을 납득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왕의 아들이 왕이 된다는 그 권한을 내려놓기가, 포기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단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생각을 굴복했다.
요나단의 위대함이 여기 있다.
이를 통해 요나단은 다윗의 진정한 ‘위로자'가 될 수 있었다.
이 모습 속에서 우리의 참된 위로자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빌 2:5-8의 말씀
Philippians 2:5–8 NKRV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우리의 위로자 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은 이 땅에 임하셨다.
낮추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 예수님이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의 위로자이시다.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시험받음을 다 체휼하시며 이해하시는 분이다.
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자.
예수님 안에서 참된 위로함을 받는 우리들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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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절 말씀 속에 제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구절이 하나 있다.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는 말씀.
아들 요나단은 다윗의 위로자가 되는 반면,
아버지 사울은 다윗의 훼방자로 등장하고 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인가? 결코 아니다.
그러함에도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대적하고 있다.
왜? 자신의 권력을, 자신의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이익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사울의 모습은 바로 죄인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롬 1:18-23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Romans 1:18–23 NKRV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인생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 결과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영광스러운 자들이 동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 되어 버린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동일한 자였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우리의 옛 성품과 옛 자아는 아직 남아있다. 롬 8:7-8.
Romans 8:7–8 NKRV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하기에 우리에게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하다.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다.
예수님 안에서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의 위로자가 될 수 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 원한다.
마지막 18절의 말씀.

18절

1 Samuel 23:18 NKRV
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다윗과 요나단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언약한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2인자가 된다는 언약.
이 언약은 다윗과 요나단의 세번째 언약
첫번째 언약
삼상 18:3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의 부하가 되었을 때.
두번째 언약
삼상 20:16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도망쳐 라마 나욧까지 갔다가
요나단을 만나러 갔을 때.
그리고 이제 오늘 본문에서 다윗과 요나단은 세번째 언약을 맺는다.
이 세번째 언약은 다윗 왕국에서 요나단의 위치를 규정하게 된다.
사울의 아들이자 왕의 후계자인 요나단을 통해 다윗의 왕위를 정당하게 확증받은 것이다.
이렇게 해서 둘은 헤어진다.
다윗은 십 광야 수풀에 머무르고,
요나단은 자기 집, 즉 기브아로 돌아간다.
안타깝게도 이 만남이 다윗과 요나단의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만다.
성경은 더 이상 요나단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삼상 31장에서 아버지 사울과 함께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사실만 간단히 언급한다.
요나단은 다윗과 함께 하기보다,
아버지 사울 곁에서 아들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를 선택한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요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것’ 대신 ‘다윗과 함께’ 남아 있었다면
그의 인생이,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결론

말씀을 맺는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 ‘위로자가 어떤 사람인지 묵상해 보았다.
우리 모두 위로자가 되길 원한다.
가족간에 - 부모님에게,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친구들에게, 회사 동료들에게,
성도들에게, 이웃에게,
진정한 위로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도와주실 때 가능하다.
성령 안에서,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위로자 되기 원한다.
또한 영원한 위로자이신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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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절

시 54편
표제어 -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Psalm 54 NKRV
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3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7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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