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생각 사이에서

역사서 강해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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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amuel 24:1–7 NKRV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서론

오늘 이 시간에는 사무엘상 24장의 내용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다윗의 이야기이다.
만약 저에게 다윗의 인생 스토리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2군데를 꼽으라고 한다면
사무엘상 17장에 나오는 골리앗을 무찌르는 장면과 함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의 옷자락을 베는 장면을 꼽을 것 같다.
멋지지 않은가?
자신의 원수이자 적이 자기 눈 앞에 있는데
그를 죽이지 않고 살려보내주면서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고 말하는 다윗의 모습은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 같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대인배와 멋진 영웅과도 같은 모습이다.
다윗은 어떻게 이렇게 말해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오늘 이 시간에는
이 다윗의 인간적인 면모 뒤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교훈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교제목을 ‘말씀과 생각 사이에서’라고 이름지었다.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생각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생각 사이에서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말씀을 택하겠는가? 아니면 생각을 택하겠는가? 질문을 한다면
당연히 ‘말씀’을 택한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치게 될 때,
막상 그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때,
우리는 말씀보다는 생각을 택하기 쉽다.
그게 우리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말씀과 생각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시 한번 묵상하며 결단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 되길 소원한다.

본론

본문 설명

주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24장의 내용을 살펴보자.
1절을 보면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왔다'고 이야기한다.
앞의 본문인 사무엘상 23장 말씀을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해 십 광야 수풀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밀고하게 되고,
사울은 사람들을 데리고 십 광야 마온 황무지까지 좇아가 다윗을 붙잡으려고 했다.
이 때 다윗과 그 일행은 사울의 손에 거의 붙잡힐뻔 하였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전령이 와서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침노하고 있다는 소식을 사울에게 전해준다.
이에 사울은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에 침입한 블레셋 사람들을 몰아내고
사울은 아마 그의 왕궁이 있는 기브아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사울에게 다윗의 소식이 들렸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와서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사해 근처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이에 사울은 정예 군사 삼천 명을 뽑아
다윗을 잡으로 엔게디로 향한다.
그리고 그 근처 들염소 바위라고 불리는 곳까지 이른다.
이 곳 이름을 들염소 바위라고 부른 이유는
아마 그 곳에 야생 염소와 산양이 많이 살고 있는 산악지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이 곳에는 산양과 들염소들이 많이 살고 있다.
‘엔게디’라는 지명도 야생염소나 산양과 관련된 이름이다.
‘엔게디’는 ‘게디의 샘물’이라는 뜻인데
‘게디’가 바로 새끼염소나 어린 산양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다시 말해 이 곳에 샘물이 솟아나는데
이 근처에 사는 산양과 들염소들이 그곳에 찾아와
목을 축이는 데에서 지명이 유래한 것이다.
사울은 들염소 바위로 가는 길 중간에 잠시 휴식을 취한다.
3절에 보면 그 곳에 굴이 있었는데
사울은 그곳으로 ‘뒤를 보러 들어간다'고 말한다.
여기서 ‘뒤를 보러 갔다’는 말은 ‘용변을 보러 갔다',
쉽게 말해 ‘화장실을 갔다’는 말이다.
이전 성경인 개역한글판을 보면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라고 되어 있다.
이건 히브리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이 표현 자체가 은유적이고 완곡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개역개정판에서는 이것의 의미를 조금 더 풀어놓은 것이다.
사울은 동굴에 들어가 한 곳에 자신의 칼과 갑옷, 외투 등을 벗어 두고
다른 쪽에 가서 용변을 보았을 것이다.
분명 사울은 그 곳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편안히 일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너무나도 극적인 일이 벌어지게 된다.
바로 그 동굴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죽이려고 찾아다녔던 다윗과 그 일행이
그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도 모른채
사울은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완전 무장해제 상태로
홀로 그 곳에 있었던 것이다.
다윗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며
다윗에게 사울을 죽이라고 부추긴다.
순간 다윗의 마음에도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의 말처럼 사울을 죽일까 하는 마음도 들었던 것 같다.
다윗은 일어나 사울이 있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는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다윗이 향한 곳은
사울이 아니라 그가 벗어놓은 옷이 있는 쪽이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이 벗어놓은 겉옷자락 일부를 자르고 조심스럽게 돌아온다.
아마 다윗과 함께 있던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가서 사울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다윗을 가리켜 ‘겁쟁이’라고, ‘용기없는 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부하들이 사울을 해하려고 하는 것 또한 막아선다.
한편 사울은 지금 자신의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볼일을 마치고 다시 옷을 입고 동굴 밖으로 나간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읽은 7절까지의 말씀이고,
그 뒤의 이야기도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울이 굴에서 어느 정도 밖으로 나간 후에
다윗은 굴에서 나가 사울을 부르며 그에게 절을 한다.
그리고 자신은 사울을 죽일 마음이 전혀 없다고 이야기한다.
혹여나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모함이고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벤 사울의 겉옷자락을 보이면서
자신이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앞으로도 자신은 결코 사울을 해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울은
무척 당황하며 소리를 높여 울며 이야기한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악함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은 다윗을 학대하였지만 다윗은 자신을 선대하였다며,
다윗이 자신보다 의롭다고 인정한다.
그러면서 사울은 다윗이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
다윗에게 자신의 후손을 끊지 않고 멸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사울의 부탁을 받은 다윗은 사울에게 맹세하고
둘은 서로 헤어지면서 24장은 마무리된다.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이고,
다윗의 멋진 영웅담이라 할 수 있다.

1. 원수인가, 주인가? - 관계 설정에 관하여

이 이야기를 ‘말씀과 생각 사이에서’라는 관점에서 몇 가지 주제를 살펴보자.
먼저 생각해 볼 주제는
상대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다시 말해 ‘사람과의 관계설정’에 대한 부분이다.
다윗에게 있어 사울은 어떤 존재인가?
4절에서 다윗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4절을 다같이 읽어보자
1 Samuel 24:4 NKRV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다윗의 사람들은 이 말을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신 말씀'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윗에게 주셨을까?
그런데 성경을 찾아보면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찾기 어렵다.
아마도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이 다윗 개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이라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과 원수들을 무찌르게 하시고
그들 위에 우뚝서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일 것이다.
다윗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인용하며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라고 말한다.
무슨 뜻인가?
사울이 ‘원수’라는 것이다.
사울이 다윗의 원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6절을 보자.
1 Samuel 24:6 NKRV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은 사울을 가리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부른다.
여기서 ‘기름 부름을 받은 자’는 ‘메시야’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구별하여 세움을 받은 자라는 말이다.
8절에서는 무엇이라 부르는가?
‘내 주 왕’이라고 부른다.
1 Samuel 24:8 NKRV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을 가리켜 ‘내 주’라고, ‘내 왕’이라고 다윗은 부른다.
심지어 11절에서는 ‘내 아버지'라고 부른다.
1 Samuel 24:11 NKRV
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이야기하면
둘 중 하나이다.
‘친구' 아니면 ‘원수'의 관계가 된다.
나에게 잘해 주면 ‘친구'인 것이고,
나에게 잘 못해주면 ‘원수'인 것이다.
이것은 나를 중심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사울은 다윗의 ‘원수'가 맞다.
그것도 철천지 원수라 할 수 있다.
지금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사무엘상 19장에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라고 자신의 신하들에게 명령한 이후,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좇아 다니고 있다.
다윗의 집으로, 라마 나욧으로, 그일라로, 십 광야로,
다윗이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를 잡기 위해
군사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좇고 있다.
오늘 본문인 24장도 마찬가지이다.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
사울이 정예 군사 삼천 명을 데리고 엔게디 광야 들염소 바위까지 찾아왔다.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자를 가리켜 ‘친구'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다윗을 입장에서 보자면 분명 사울은 ‘원수'이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원수'라고 부르지 않는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나의 주’, ‘나의 주 왕’, 심지어 ‘나의 아버지’라 부른다.
다윗은 사울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그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가 왕으로 세움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가 이스라엘의 주권자이며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자를 어떻게 나의 주, 나의 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다윗의 인격이 좋아서, 성격이 좋아서 가능한가?
아니다.
다윗이 사울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다윗은 자신과 사울의 관계 사이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과 생각 사이에서 말씀을 택한 것이다.
사울만 놓고 보면 어떤가?
충분히 그는 왕의 자격이 없다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실제로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선언하셨고,
다윗은 사울을 대신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향해
당신은 자격이 없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권위와 자격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6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1 Samuel 24:6 NKRV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은 ‘여호와'라는 말을 여러번 반복하고 있다.
단순히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아니라,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라고 강조하고 있다.
10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 Samuel 24:10 NKRV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여기서도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윗이 사울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사울이 그런 자격이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를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울과 직접적으로 1대 1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 사이에 놓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사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12절 말씀을 보면 이러한 다윗의 생각이 명확히 드러난다.
12절을 같이 읽어보자
1 Samuel 24:12 NKRV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다윗은 자신과 사울 사이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고 이야기한다.
사울의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일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행위를 심판하실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지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15절도 마찬가지이다.
1 Samuel 24:15 NKRV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13절에서는 사울 왕의 행위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했다면,
15절에서는 다윗 자신의 억울함과 구원을 이야기한다.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는 일이 사울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구의 손에 있다고 말하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사울의 손에서 자신을 건져주실 분도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우리는 다윗과 반대되는 예 하나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이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났을 때 그를 무엇이라 부르는지 기억하는가?
열왕기상 18장 17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1 Kings 18:17 NKRV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아합의 눈에는
엘리야가 선지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의 눈에는 이스라엘 땅에 가뭄과 기근을 가져온 자로만 보였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니
엘리야의 선지자로서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 없이 엘리야를 바라볼 때,
아합에게 엘리야는 선지자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자신을 괴롭게 하는 자일 뿐이었다.
때때로 우리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을 빼고' 바라보려고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도
‘성령충만'하지 못하고 육신 가운데 있을 때 그런 우를 범하게 된다.
그것은 말씀과 생각 사이에서 생각을 선택한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우리들이 되길 원한다.
혹시 남편이나 아내가 ‘원수’로 보이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 부모와 자녀가 ‘원수’로 보이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서로의 권위와 관계를 인정하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 원한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나라의 지도자와 국민, 직장의 상사와 부하...
이 모든 관계 속에서
그 관계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나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들이 되길 원하다.

2. 말씀과 생각 사이에서 -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
그 말씀에 나의 생각, 자기의 생각을 집어넣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을 경우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는 것은
그 잘못을 쉽게 깨닫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를 보자.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3장에서 하와는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다고 이야기한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으며
말씀 자체를 왜곡해 버렸다.
대표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분명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틈을 타서 사탄인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거짓된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오늘 본문 4절을 다시 살펴보자.
1 Samuel 24:4 NKRV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다윗의 사람들은 이 말씀에 자신들의 생각을 집어넣어
원래의 뜻과 의미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아버린다.
먼저 ‘원수’라는 말에 사울을 포함시킨다.
이 말씀에는 원수가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다윗의 사람들은 이 말씀에 나오는 ‘원수'가
바로 사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그리고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라는 말을
‘살인'해도 괜찮다는 식으로 해석해 버린다.
그들이 말하는 살인은
전쟁터에서 적군을 정당하게 무찌르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행위인 것이다.
다윗의 사람들은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라는 말씀에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서 그 뜻과 의미를 왜곡해 버린다.
‘사울을 죽여도 괜찮다.’
‘하나님이 사울을 죽이도록 허락하셨다’라는 식으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
원래의 뜻과는 분명 거리가 먼 해석이며 왜곡인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해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는다.
6절에서 다윗은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어떤 면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크로스 체킹’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서 ‘원수’가 사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네 생각에 좋은 대로 행하라’가 살인하라는 의미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한 것이다.
다윗은 이 과정을 통해 말씀 해석에 숨겨져 있는
인간적인 생각들을 벗겨내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뜻과 의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거기에 순종한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예수님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에게 3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그 중 한 가지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는 것이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면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사탄은 그 근거로 성경구절을 인용한다.
마태복음 4장 6절 말씀이다.
Matthew 4:6 NKRV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이 때 사탄이 인용한 말씀은 시편 91편 11-12절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 예수님을 유혹하고 시험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은 신명기 6장 16절 말씀으로 사탄을 꾸짖는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사탄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 욕망을 합리화하기 위해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기도 한다.
자기 생각을 집어넣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교묘히 비틀기도 하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의도와 목적을 벗어나
잘못된 적용과 잘못된 해석으로
자기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우리의 생각을 섞는 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말씀 속에 섞여 들어가 있는 우리의 생각을 부지런히 걷어내야 한다.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한다.

3. 나의 때인가, 하나님의 때인가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주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나의 때를 따라 살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지금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로 고난의 때를 보내고 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사울을 죽이면 그 고난의 때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고난을 좋아하고 즐거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면
누구나 빨리 그 시절이 지나가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다 때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전도서 3장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에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의 때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있고,
그 일을 때를 따라 이루어가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아멘인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의 때를 주셨다면
분명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 7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Psalm 119:71 NKRV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학교에 나를 입학시키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졸업시키시는 분 또한 하나님이시다.
내가 할 일은 그 과정에서 배워야 할 것을 잘 배워나가는 것이다.
서둘러 빨리 그 과정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지금 다윗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도망자의 신세를 벗어나 자유를 얻을 절호의 기회가 눈 앞에 있다.
지금 사울을 죽인다면 더 이상 도망다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주변의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때를 맡긴다.
1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1 Samuel 24:15 NKRV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마음 같아서는 하루 빨리 이 고난의 때를 벗어나고 싶지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방법으로
그 고난을 벗어나지는 않겠다는 다짐인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겠다는 말이다.
이것이 말씀과 생각 사이에서 말씀을 택한 다윗의 모습이다.
다윗은 이 사건 이후로 한참 동안을 도망자 신세로 지내야 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다윗을 쫓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한 사울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윗을 잡으려고 했고,
결국 다윗은 그를 피해 블레셋 땅으로 숨어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사울이 전쟁터에서 죽을 때까지 망명자의 신세로 지내야 했다.
하지만 다윗은 겸손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 하나님의 때가 찾아오고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베드로전서 5장 5-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1 Peter 5:5–6 NKRV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나의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겸손히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한다.

결론

오늘 이 시간 우리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배웠다.
우리는 말씀과 생각 사이에서 말씀을 택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을 통해 사람들을 바라본다.
나에게 잘해주냐 못해주냐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이 맺게 하신 관계와 그 권위 아래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인정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을 섞지 않는다.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의 의미와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부지런히 찾고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합하고 순종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때를 겸손히 기다린다.
하나님이 정하신 순리를 따라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삶을 맡기며 살아간다.
우리 모두 말씀과 생각 사이에서
나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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