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람들

주일예배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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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8일 1부예배 사회

(묵상기도)

다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묵상기도하심으로
8월 8일 주일 1부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기원)

성삼위 하나님,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이 시간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경배찬송)

다함께 찬송가 1장을 찬양합니다.

(성시교독)

다함께 교독문 64번, 시편 148편을 교독합니다.

(사도신경)

다함께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찬송)

다함께 자리에 앉으셔서
찬송가 365장 찬양합니다.

(기도)

이 시간 김한웅 집사님 나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표기도해 주십니다.

교회소식

⊙예배 1. 이번 주 예배는 예배 장소를 성도들의 각 가정과 예배당 중 한 곳을 정해 드립니다. 8월 9일부터 예배당에서는 좌석의 10%, 최대 99명 범위 안에서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예배 영상은 실시간 중계합니다.
⊙교제 1. 지난주에 등록 신청하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며 소개합니다. 2021-127 서정수님 노원구 중계동 6남성도 ⊙위로 1. 박영민(한순) 집사님 부친, 손성익(조정희) 성도님과 손정익(김윤진) 성도님의 부친, 김재원(백인수) 권사님이 소천했습니다. ⊙서울광염장학생 선발 1.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10대 비전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100명 이상의 사회 각 분야의 최고 지도자를 양성하는 꿈입니다. 2. 장학부(부장 홍진우)에서는 신앙에 모범이 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대상으로 2021년 하반기 서울광염교회 장학생을 선발합니다. 신청 기간은 8월 8일(주일)부터 8월 22일(주일)입니다.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할 수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교회 홈페이지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설립 277호 1. 하나님께서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이주위 섬에 마플라교회(담임 메다르 목사)를 세우십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세우시는 277번째 교회입니다. 개척한지 20여년이 지났으며 약 500명의 성도가 예배드리고 있으나 공간이 좁아 예배당 건축이 필요합니다. 2. 해외선교부(부장 권대현)에서는 교회설립을 위해 지정해 드린 1000만원에 여러분이 드린 십일조에서 1500만원을 더해 2500만원(행정비 10% 포함)을 윤성운 선교사님에게 보내 진행합니다. ⊙아이티 샬롬고아원 학교 교사 월급 지원 1. 아이티에서 50여 명의 고아를 돌보며 이들을 포함해 120여 명의 정규 교육을 하는 샬롬고아원 학교 15명의 교사 월급 1년치의 절반을 지원합니다. 최근 어려운 정세로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는 아이티와 고아들을 위한 사랑입니다. 해외구제부(부장 이재한)에서는 여러분이 드린 십일조에서 1200만원(행정비 10% 포함)을 더 코너 인터내셔널(대표 조항석 목사)로 보내 섬깁니다. ⊙무안노회 전도건빵 지원 1. 무안노회 소속 43개 교회가 사용할 전도건빵 4만 개를 지원합니다. 국내전도부(부장 손철구)에서는 여러분이 드린 십일조에서 400만원(전도건빵 봉투 제작비 별도, 행정비 60만원 포함)을 사용합니다. 2. 전도건빵은 무안노회 자립위원장인 이윤동 목사님에게 보내 소속 교회에 나눕니다. 입원 치료 중인 한미순 사모님 치료비로 100만원을 이 목사님 계좌로 보내 응원하며 위로합니다. ⊙경성교회 음향시설 지원 1. 1군수지원사령부 16보급대대에 있는 군인교회인 경성교회에 장병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음향시설을 지원합니다. 스피커 2개, 믹서, 메인 건반, 일렉기타, 베이스기타, 베이스기타앰프, 찬양악보집을 구입해 지원하고 우리 안에 있던 세컨드 건반과 베이스기타, 모니터스피커를 흘려보냈습니다 . 2. 군선교부(부장 강동화)에서는 이 일을 위해 여러분이 드린 십일조에서 500여만원을 사용했습니다. ⊙교회희망프로젝트 170·171호 1. 한국교회희망프로젝트팀(팀장 박광일)에서는 170호로 경북 의성에 위치한 사미교회(담임 곽병구 목사) 십자가탑 교체를 지원했습니다. 여러분이 드린 십일조에서 400만원을 사용했습니다. 2. 171호로 경남 진주시에 위치한 주뜻교회(담임 김찬성 목사) 낡은 간판과 선팅 교체, 지역 청소년을 돕기 위한 공간의 공기청정기를 지원했습니다. 여러분이 드린 십일조에서 163만 6320원을 사용했습니다. ⊙선교사 가정 위로 1. 코로나19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인도네시아 김상철 선교사님과 한국으로 후송을 기다리는 인도네시아 파푸아 김철구 선교사님 가정에 여러분이 드린 십일조에서 100만원씩 보내 위로했습니다. ⊙이집트 출신 난민의 생업을 위한 냉동고 지원 1. 한국 정부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고 정착 중인 이집트 출신 아나스 씨가 생업을 위해 시작한 빵집 운영을 위한 냉동고 2대를 지원했습니다. 구제부(부장 배상만)에서는 여러분이 드린 십일조에서 122만원을 사용했습니다. ⊙주일학교 온라인 수련회 1. 중등부 (부장 박언국) 여름수련회가 8월 15일(주일)에 있습니다. 수련회는 실시간 중계합니다.

(성경봉독)

이 시간 함께 봉독할 말씀은
사사기 19장 22-30절 말씀입니다.
한절씩 교독합니다.
Judges 19:22–30 NKRV
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26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28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기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오늘 이 시간은 지난 시간에 이어
사사기 19장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는 사사기 17장과 18장에 나오는
미가와 단 지파, 그리고 한 레위 사람의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절에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이 어떠했는지 살펴 보았다.
그리고 오늘 보게 될 사사기 19장에서는
한 레위 사람과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절'에
이스라엘의 도덕적, 윤리적 타락이 어떠했는지를 보게 된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왕되신 하나님은 어떠하신 분이며,
왕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다시금 확인하는 복된 시간 되기를 소원한다.

본론

1절

1절을 같이 읽어보자.
Judges 19:1 NKRV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왕이 없을 그 때에...

19장의 시작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라는 말씀으로 시작된다.
우리 눈에 낯설지가 않는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이미 앞에서도 보았다.
사사기 17장 6절을 같이 찾아보자.
Judges 17:6 NKRV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18장 1절도 찾아보자.
Judges 18:1 NKRV
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사사기 17장, 18장에 이어 오늘 본문인 19장에서도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말은
표면적으로는 이 이야기의 시대배경이 왕이 없는 ‘사사시대’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왕이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자기 정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꼬집는 말이다.
자기 인생에 자기가 ‘왕'이 되어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삶이 어떨 것 같은가?
보기에는 자유로워 보이고, 낭만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그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떤 레위 사람'의 모습을 통해 그 삶을 살펴보자.

레위 사람은...

여러분은 ‘레위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구별된 사람, 좀 특별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구별'된, ‘성별'된 사람들이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12지파를 대표해서 하나님의 성막과 제사를 섬긴 사람들이었다.
신명기 10장 8절은…
Deuteronomy 10:8 NKRV
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이렇게 구별된 레위 사람이기에,
그들은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이스라엘 백성 앞에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레위 사람의 모습은 어떤가?
1절을 다시 읽어보자.
Judges 19:1 NKRV
1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하였더니
이 레위 사람은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고 있었다.
여기서 ‘구석’이라는 말은
멀리 떨어진 곳, 깊은 곳, 경계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가 정확히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자신이 ‘여호와의 집으로 가는 중'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레위 사람은 ‘실로’ 근처 어딘가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며 그 당시 실로에 여호와의 집, 즉 성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레위 사람이 첩을 맞이했다.
자기 동네가 아니라 남쪽에 있는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 사는 한 여자를 첩으로 맞이했다.
다시 말해 이미 그는 결혼하여 아내가 있었는데,
또 다른 여자를 집에 들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셔서 둘이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 이루도록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원리이고 하나님의 질서이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여 타락한 이후,
가인의 후손인 라멕이 처음으로 두 아내를 맞이하면서 이러한 질서가 깨졌다.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가 왕이 되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른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이 레위 사람이 첩을 들여서 그의 삶이 더 행복해졌는가?
그렇지 않았다.
2절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Judges 19:2 NKRV
2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의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서 거기서 넉 달 동안을 지내매
그 첩은 행음하였다.
그리고 남편을 떠나 베들레헴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여기서 ‘행음하다’라는 단어는
‘화를 내다’, ‘몹시 싫어하다', ‘미워하다’는 뜻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여인은
자기의 남편을 사랑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를 미워했다.
그리고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그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
레위 사람뿐 아니라 이 여인도 자신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왕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시대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러했다.
그리고 넉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이 레위 사람에게 행음하고 자기를 떠난 그 여자를 다시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녀를 말로 잘 설득해서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고 그녀를 다시 데려오고자 했다.
이러한 레위 사람의 마음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후에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가 그녀를 진정 마음 깊이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니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필요에 따른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사랑이었지,
서로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는 ‘이타적인' 사랑은 결코 아니었다.
레위 사람은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자기의 집인 에브라임을 떠나 처갓집이 있는 유다 베들레헴으로 갔다.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을 본 그 여인은 남편을 인도하여 아버지 집으로 들였다.
그의 장인이자 그 여자의 아버지도 자기의 사위를 기쁘게 맞이했다.
그리고 삼 일 동안 그를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며 ‘먹고 마시며’ 그의 마음을 즐겁게 했다.
이렇게 손님을 며칠 머무르게 하면서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던 것 같다.
이제 레위 사람은 자신의 첩을 데리고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넷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장인의 집을 떠나려고 하는데,
장인은 좀 더 쉬었다가 출발하라고 그를 불러 앉히고,
시간이 좀 지나자 하룻밤 더 머물다 가라고 간청한다.
이에 레위 사람은 장인의 간청에 못 이겨 하룻밤을 더 묵게 된다.
그 다음 날 아침, 즉 다섯째 날 아침에
레위 사람은 또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나고자 한다.
8절을 같이 읽어보자.
Judges 19:8 NKRV
8 다섯째 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 그 여자의 아버지가 이르되 청하노니 그대의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 하므로 두 사람이 함께 먹고
5절에서도 그렇고, 8절에서도 그렇고,
성경은 반복적으로
이 레위 사람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나려고 했을까?
그것은 당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당연한 모습이었다.
하늘에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기도 없고 가로등도 없는 시대이기에,
해가 지면 깜깜해 길을 가기도 어려울뿐 아니라,
강도를 만나거나 맹수를 만날 위험도 더 커진다.
또한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하룻밤을 묵으려면 가는 길 중에 있는 마을을 찾아 들어가 그 곳에서 머물러야 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레위 사람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다섯째 날 아침에도
그의 장인은 자기의 사위가 떠나려는 것을 만류하며 좀 더 머물기를 요청한다.
사위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딸을 떠나보내는 게 아쉬워서 그런지,
이 장인의 마음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장인의 요청을 이기지 못한 레위 사람은 길을 떠나지 못하고
그날 오후가 될 때가지 길을 떠나지 못하고 장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오후 늦게 되서야 이 레위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나려고 한다.
장인은 이미 날이 저물어 가니 오늘 하룻밤을 더 자고 가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청을 뿌리치고
레위 사람은 자신의 첩과 하인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선택이 이후에 벌어질 끔찍하고 불행한 일의 단초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북쪽에 있는 에브라임을 향해 길을 떠난다.
오후 늦게 출발한 길이기에 많이 가지도 못했는데 벌써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11-14절 말씀을 읽어보자.
Judges 19:11–14 NKRV
11 그들이 여부스에 가까이 갔을 때에 해가 지려 하는지라 종이 주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가 돌이켜 여부스 사람의 이 성읍에 들어가서 유숙하십시다 하니 12 주인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돌이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니 기브아로 나아가리라 하고 13 또 그 종에게 이르되 우리가 기브아나 라마 중 한 곳에 가서 거기서 유숙하자 하고 14 모두 앞으로 나아가더니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가까이 이르러 해가 진지라
여부스는 베들레헴에서 북쪽으로 거리상으로 13km 정도 떨어진 성읍이다.
그렇다면 베들레헴에서 여부스까지 걸어서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
요즘 건강을 생각해서 많은 분들이 ‘걷기 운동'을 한다.
하루 ‘만보 걷기’를 하는 분들도 많다.
사람마다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보통 만보 걷기를 하려면 2시간 정도 걸린다.
그리고 7-8km 정도의 거리를 걷게 된다.
다시 말해 평균 한 시간에 4km 정도 걷는 셈이다.
이걸 기준으로 하면 베들레헴에서 여부스까지는
걸어서 약 3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이다.
아침 일찍 베들레헴에서 길을 떠났다면 훨씬 멀리 갔을텐데,
오후 늦게 출발한 나머지 ‘여부스’라는 마을을 지나칠 즈음에
해가 뉘엇뉘엇 지면서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이 레위 사람의 종은 여부스로 들어가서 하룻밤을 묵자고 제안한다.
그런데 레위 사람은 이 제안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왜일까?
12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기브아는 그 당시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이방 사람의 성읍'이었기 때문이다.
10절에 보면,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이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호수아 18장을 보면,
원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베냐민 지파에 분배된 성읍으로(수 18:16),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여부스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사사시대 동안 이 예루살렘은 가나안 이방 족속이 사는 성읍으로 남아 있었다.
이 땅을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하게 된 것은 다윗 왕 때 이르러서이다.
날이 어두워져가기 때문에 빨리 하룻밤을 묵을 숙소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이 레위 사람은 이방 사람의 성읍인 기브아에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다.
그 대신 좀 더 길을 가서 6km 정도 떨어진,
다시 말해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사는 기브아나 라마에 가서
거기서 하룻밤 묵자고 이야기한다.
이 레위 사람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을 것 같다.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또한 레위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인 기브아 사람들과 함께 하고, 그들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꺼려 한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방 사람들보다는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더 잘 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고민은 애초에 하지 않아도 될 문제였다.
만약 그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났다면
점심 때 쯤이면 이미 여부스와 기브아를 지났을 것이고,
해가 질 저녁에는 그가 사는 곳인 에브라임 산지에 도착했을 것이다.
혹시 길이 좀 지체되었다 할지라도,
최소한 이 레위 사람을 잘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까지는 도착해
손쉽게 하룻밤을 묵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장인의 지나친 호의 때문에,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레위 사람의 고집 때문에,
오후 늦게 길을 나서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전혀 낯선 곳인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계속해서 15절 말씀을 읽어보자
Judges 19:15 NKRV
15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려고 그리로 돌아 들어가서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으나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
당시 기브아에는 여관 같은 숙박시설은 없었다.
다시 말해 여행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브아가 여행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들렸다 가는 장소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 레위 사람은 첩과 종과 함께 기브아에 들어가 성읍 넓은 거리에 앉아 있었다.
성읍 넓은 거리는 ‘광장’과 같은 곳으로
그 성읍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장소였다.
아마 이 레위 사람은 오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하룻밤을 재워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낯선 나그네들을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명 이 레위 사람에게는 내심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비록 자신이 베냐민 지파 사람은 아니지만,
같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들어가면
충분히 하룻밤을 묵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대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서로간에 대한 신뢰가 많이 무너져버린 오늘날 우리 사회는
낯선 사람에 대해 많이 경계하는 것이 사실이다.
자녀들을 교육하면서도 낯선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가르치기까지 한다.
어쩔수 없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서로를 믿지 못하는 오늘날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하나님은 나그네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신명기 10장 18-19절을 보면
하나님은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애굽 땅에서 나그네 삶을 살았던 그 과거를 잊지 말고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베냐민 땅 기브아 사람들은 나그네를 외면했다.
15절은 ‘그를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었더라'고 그 상황을 전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의 뉘앙스를 그대로 따르자면
그들을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하게 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기브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이 레위 사람 일행은 속수무책으로 길거리에서 노숙을 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다행히 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한 사람이 있었다.
16-17절 말씀이다.
Judges 19:16–17 NKRV
16 저녁 때에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거류하는 자요 그 곳 사람들은 베냐민 자손이더라 17 노인이 눈을 들어 성읍 넓은 거리에 나그네가 있는 것을 본지라 노인이 묻되 그대는 어디로 가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사실 그 노인은 기브아 사람이 아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그도 기브아에 정착한 나그네였다.
나그네가 나그네를 알아보고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불쌍히 여긴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하고 돕는다는 말이다.
기브아 사람들이 외면한 나그네를 그 땅에 살던 나그네가 돌아본 것이다.
이 노인의 질문에 레위 사람은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는 먹을 것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이야기한다.
그 말의 뜻은 다른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니
그저 잠만 재워주면 된다는 것이다.
혹여나 ‘이 노인마저 자신들을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담긴 말이다.
그러나 그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20절에서 그 노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Judges 19:20 NKRV
20 그 노인이 이르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쓸 것은 모두 내가 담당할 것이니 거리에서는 유숙하지 말라 하고
이 노인은 불안해 하는 이 레위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킨 뒤,
길거리에서 노숙할뻔 했던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들이고 나귀에게도 먹을 것인다.
레위 사람 일행도 여장을 풀고,
길을 걸으며 더러워진 발도 씻고,
그 노인이 베풀어준 음식을 먹고 마시며 쉼을 누리게 된다.
여기까지만 읽게 되면,
비록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시대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희망과 기대가 있는 시대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산산히 깨어지고 만다.
22절 말씀을 읽어보자.
Judges 19:22 NKRV
22 그들이 마음을 즐겁게 할 때에 그 성읍의 불량배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들기며 집 주인 노인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우리가 그와 관계하리라 하니
그 성읍, 다시 말해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 사람들 중에 ‘불량배들'이
그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문을 쾅쾅 두들기면서 험악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리고는 그 노인에게
그 집에 들어온 나그네된 레위 사람을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사람과 관계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나오는 ‘불량배'는
쓸모 없는 자, 가치 없는 자, 악한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정욕과 욕망을 따라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불량배들은
나그네된 이 레위 사람이 자신의 성읍에 들어왔을 때에는 외면하다가
떼를 지어 와서는
그 남자를 성적 대상으로 삼아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보호받아야 할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품어주기는 커녕
자신들의 힘을 무기로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율법과 질서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악한 행위이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버젓이
이스라엘 땅에서, 베냐민 지파 땅에서 벌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22절 말씀을 읽어보면
성경 어디선가 읽어본 듯한 느낌이 든다.
맞다.
어디에서 읽어보았는가?
바로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 땅에 있을 때 당한 일과 너무나 비슷하다.
그 때에도 롯의 집에 들어온 두 천사를
소돔 사람들이 다 모여 롯의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며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라고 이야기했다.
지금 성경은 이 사사기 19장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창세기 19장의 내용이 연상되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기브아 사람들의 행위가
아브라함 시절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했던 소돔 사람들의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23-24절 말씀을 보자.
Judges 19:23–24 NKRV
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이같은 악행을 저지르지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어왔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 하나
창세기 19장에서는
롯이 천사들을 보호하고자
천사들 대신 자신의 두 딸을 소돔 사람들에게 내어놓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여기 사사기 19장에 나오는 노인도 창세기와 비슷하게
자기 집에 들어온 레위 사람을 보호하고자
2명의 여인을 대신 내놓겠다고 이야기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여기서는 노인에게는 한 명의 딸 밖에 없었기에
레위 사람의 첩까지 2명을 대신 내어놓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는 말은
‘너희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라'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노인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우리가 노인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딜레마처럼 보이는 문제이다.
분명 기브아의 불량배들의 행태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에도 비난받아 마땅한 강력범죄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으로 볼 때는 더더욱 패륜적인 범죄행위이다.
이러한 악에 맞서서
자신의 집에 찾아온 나그네를 어떻게든 지키고 보호하고자
자신의 딸까지 내어놓으려는 이 노인의 행동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노인의 말과 행동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가 나그네를 대접하고 그를 보호하고자 한 것은
분명 하나님 말씀에도 부합하고, 사랑과 긍휼의 마음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도
악을 막기 위해 다른 악을 행하거나 용인하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큰 악을 막기 위해서는 작은 악을 허용해도 된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악을 악으로 맞서지 말고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말씀하신다.
분명 이 노인이 자기의 처녀 딸과 레위 사람의 첩을 내놓으려고 하면서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너희 눈에 좋은 대로 행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또다른 악행을 용인하겠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자신의 딸과 레위 사람의 첩을 희생양 삼아
자신과 그 레위 사람의 안위를 도모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인 것이다.
만약 이것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 것일 뿐'
하나님의 방법을 따른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아무튼 노인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나그네인 이 레위 사람을 보호하고 지키고자 나름대로의 대안을 제시했지만
흥분한 불량배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 레위 사람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분명 기브아 온 마을이 이 일로 시끄러웠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는지 밖에 나와 상황을 살피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기브아의 어떤 사람도
그들을 향해 ‘악한 일’이라고 ‘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악을 보면서 다들 침묵하고 있었다.
그 또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이러한 상황에 반전이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롯의 집에 들어갔던 천사들이
문 밖에 있던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 그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고,
롯의 가족을 구출해 낸 것이다.
그러나 여기 사사기 19장에서는
창세기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상황을 보다 못한 레위 사람이
직접 자신의 첩을 붙잡아서 문 밖으로 끌어낸 것이다.
노인의 말을 이 레위 사람은 직접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자신을 요구하는 불량배들에게 자기 대신 자신의 첩을 대신 내준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레위 사람이 이 첩을 향해 가졌던 마음도
결국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가졌던 마음이었음을 보게 된다.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맞이한 것도,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그 여인을 다시 찾으러 처갓집에 간 것도,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사랑이었던 것이다.
막상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는 자기의 몸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첩을 희생시킨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밤새도록 끔찍한 일을 당한 그 여인은 결국 죽고 만다.
25-30절 말씀이다.
Judges 19:25–30 NKRV
25 무리가 듣지 아니하므로 그 사람이 자기 첩을 붙잡아 그들에게 밖으로 끌어내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 26 동틀 때에 여인이 자기의 주인이 있는 그 사람의 집 문에 이르러 엎드러져 밝기까지 거기 엎드러져 있더라 27 그의 주인이 일찍이 일어나 집 문을 열고 떠나고자 하더니 그 여인이 집 문에 엎드러져 있고 그의 두 손이 문지방에 있는 것을 보고 28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 하나 아무 대답이 없는지라 이에 그의 시체를 나귀에 싣고 행하여 자기 곳에 돌아가서 29 그 집에 이르러서는 칼을 가지고 자기 첩의 시체를 거두어 그 마디를 찍어 열두 덩이에 나누고 그것을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이 일을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
26-27절의 말씀을 읽어보면,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기의 남편을 향해 구원을 손길을 요청하는 그 여인의 모습과,
꽉 닥힌 문 안에서 침묵하고 있는 레위 사람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레위 사람은 자신을 대신해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는 자신의 여인을 향해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있을 뿐이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레위 사람은 다시 길을 떠나고자 한다.
문 앞에 엎드려 있는 자신의 여인을 발견하고 같이 떠나자고 말하지만,
그녀는 이미 죽어 있었다.
이에 레위 사람은 그녀의 시체를 나귀에 실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칼로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고발하게 된다.
분명 여인의 시체는 잔인한 범죄의 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그 시체를 직접 보게 된다면
그저 말로 듣는 것보다도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레위 사람의 모습도
결국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죽은 자의 시신도 예를 갖추어 존엄하게 다루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이 레위 사람은 자기를 대신해 죽은 자기의 첩의 시체를 훼손하면서까지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전하고자 하였다.
그녀를 위해 장례도 제대로 치루지 않은 것이다.
이제 한 레위 사람과 기브아의 불량배들로 인해 일어난 이 사건은
한 개인과 한 성읍의 범위를 넘어서서
겆잡을 수 없이
한 지파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로 확대되고 만다.
앞으로 이어지는 사사기 20장과 마지막 장인 21장은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결론

우리가 오늘 함께 살펴본 사사기 19장의 내용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잔인하고 가장 끔찍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마지막 30절에서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올라온 날부터 오늘까지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고 보지도 못한 일"이 분명하다.
그런데 너무 안타까운 사실은
요즘 우리 시대에
이와 비슷한 끔찍한 이야기를 너무나도 자주 뉴스를 통해 접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그리고 하나님을 왕으로 삼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삶의 결국이 어떠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레위 사람도,
그 레위 사람의 첩도,
그 첩의 아버지도,
기브아에 사는 노인도,
기브아의 불량배들도,
모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갔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시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행복해 보였는가?
결코 아니다.
그 결과는 고통과 파괴와 죽음만을 낳고 말았다.
사람들은 스스로 왕이 되어, 주인이 되어 살아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결국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삶일 뿐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 행복을 지금 우리는 맛보고 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또 한가지 감사한 것은
우리의 주인이시며 남편되시는 예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과 생명을 내어 주신 분이다.
그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신랑되시며 우리의 왕이시다.
그 은혜를 깊이 누리며 감사하는 우리 모두 되길 축복한다.

(헌금봉헌)

다함께 찬송 50장 부르시며
준비하신 헌금 드리겠습니다.

(헌금기도 및 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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