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속에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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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찬송

364장 /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기도

성경봉독

Jeremiah 15:15–21 NKRV
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서론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힘든 순간, 위기의 순간이 언제일까?
아마 마음이 무너질 때인 것 같다.
스스로의 자존감이 무너지고, 더 나아가 자신에게 자괴감마저 들 때인 것 같다.
의욕을 가지고 하던 일들이 나의 뜻대로 되지 않고,
나는 좋은 의도로 일을 했는데 반대로 사람들은 오해하고 자신을 비난할 때,
내가 이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쓸모없는 존재처럼 여겨질 때,
이럴 때 우리는 크게 낙심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내가 왜 태어났을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는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될 예레미야의 모습이 그러하다.
예레미야는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대화, 즉 기도 속에
깊은 절망과 낙심 속에서 자기 마음의 밑바닥까지 다 하나님께 드러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예레미야는
다시 일어나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궁금해진다.
이 궁금증을 안고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자.
1-9절 말씀이다.

본론

1-9절

Jeremiah 15:1–9 NKRV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에 흩으리라 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위해 울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냐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7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8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파멸시킬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갑자기 닥치게 하였으며 9 일곱을 낳은 여인에게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아직도 대낮에 그의 해가 떨어져서 그에게 수치와 근심을 당하게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들의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
14장에서 애절한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었다.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자신의 죄로 여기며 하나님께 회개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죄악을 고백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우리와 세운 언약을 기억해서라도,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렘 14:11).
그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멸하겠다고 말씀하셨다(렘 14:12).
하나님은 오늘 이어지는 말씀에서 더욱 강력하게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1절에서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리라’라고 이야기하신다.
모세가 누구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지도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과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선지자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근간을 세운 인물이다.
사무엘이 누구인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이다.
사울을 세우고 다윗을 세워 이스라엘 왕조의 기초를 세운 선지자이다.
모세와 사무엘 모두 하나님이세우신 위대한 선지자이자 지도자이다.
예레미야의 입장에서는 감히 어깨를 견줄 수 없는 대선배들이다.
심지어 모세는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교제를 나눈 인물이다.
그런 모세와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간구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을 향한 징계와 심판은 결정되었다고 말씀하신다.
6절에서는 이제 더이상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다고까지 표현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언과 대답을 들은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안타까움을 넘어서서,
자신을 향해 큰 실망감과 좌절감을 맛보았던 것 같다.
또한 하나님의 이러한 결정이 곧 자신의 무능력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지금 예레미야는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있는 상황이다.
심판과 회개의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면서,
그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말을 듣기는 커녕,
비난과 저주의 말을 듣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 드린 간구마저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 같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지 조금이나마 이해될 듯 싶기도 하다.
예레미야는 10절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하며 자신이 처한 현실을 비관한다.

10절

Jeremiah 15:10 NKRV
10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 중 하나가 ‘생일 축하합니다’라는 노래다.
오늘 7월 29일이 생일인 우리교회 성도님의 숫자가 38명이다.
생일 축하드린다.
이 땅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축복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며 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은
생일을 맞은 당사자뿐 아니라 그 생일을 축하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된다.
그런데 학창시절에 가끔 짖꿎은 친구들이 이 노래 가사를 개사해서 부르기도 한다.
‘왜 태어났니'라고 부른다.
장난이라고는 하지만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때때로 이런 자괴감이 불쑥 찾아올 때가 있다.
내가 왜 태어났을까?
내가 무슨 쓸모가 있는가?
이런 생각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우리 인생에 기쁘고 행복한 날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능력도 없어 보이고 별 쓸모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순간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나는 왜 태어났는가? 하는 생각이 쑥 내 마음에 들어오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세상 사람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욥이 그러했다.
사탄의 시험으로 사랑하는 자녀를 잃어버리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몸까지 상하게 됐을 때
욥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며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다(욥 3:1-26).
엘리야도 그러했다.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겠다는 그 소리를 듣고 난 뒤,
모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광야로 들어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지금 내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그만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왕상 19:1-4).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예레미야도 그런 상황이다.
지금 예레미야는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비관하고 있다.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를 향해 원망하고 있다.
왜 부모님이 나를 낳아서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냐고 항변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재앙을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신과 다투고 자신에게 싸움을 걸어온다고 말한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다'
이 말은 자기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만한 어떤 일도 하지 않았 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다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고 예레미야는 한탄한다.
이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마음을 위로하시며 그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말씀해 주신다.
11절 말씀이다.

11절

Jeremiah 15:11 NKRV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강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사람들에 예레미야를 통해 복을 받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지금은 예레미야를 저주하고 미워하는 원수들이 장차 재앙과 환난을 당하게 될 때,
예레미야에게 찾아와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간구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어떤 재앙과 환난의 때인가?
12-14절 말씀이다.

12-14절

Jeremiah 15:12–14 NKRV
12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 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14 네 원수와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라
여기서 ‘북방의 철과 놋'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유다를 침공해 올 바벨론 제국을 상징한다.
그리고 ‘너'는 예레미야가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바벨론은 유다의 모든 재산과 보물을 탈취하며 노략해 갈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유다 땅에 사람들도 붙잡아 포로로 끌고 갈 것이다.
그래서 가보지 못한 땅, 알지 못하는 땅에 가서 나그네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이 진노 가운데 유다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여전히 예레미야는 상한 마음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의 닫힌 마음이 그의 귀도 닫아버린 것 같다.
더욱 더 자신의 상태를 비관하며 한탄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하는데까지 나아가고 만다.
15-18절 말씀이다.

15-18절

Jeremiah 15:15–18 NKRV
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15절 하반절에서 예레미야는 무엇이라 말하는가?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다시 말해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수모가 하나님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에게 보복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 마음에서 ‘은혜'가 사라질 때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가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보다 내가 한 일을 자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지금 예레미야의 모습이 그러하다.
16절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고 이야기한다.
지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고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17절에는
자신이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도 않았고 즐거워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기뻐한다'는 것은 농담하다, 비웃다, 조롱하다, 경멸하다는 뜻으로
16절에 나오는 ‘기쁨'과는 다른 의미의 단어이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비웃고 멸시하면서,
쾌락과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과 가까이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지냈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들을 향한 분노를 채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18절에서 예레미야는
왜 자신에게 고통이 계속 주어지고, 상처는 왜 낫지 않냐고 하나님께 따져 묻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이 고통을 없애주고, 상처도 낫게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말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면서 예레미야는 자신을 향한 한탄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말을 다음과 같이 끝내 버린다.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하나님이 물이 많은 시내 같아서 찾아갔는데,
막상 가보니 다 말라버려서 물을 얻을 수 없는 그런 존재 같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자신이 속은 것 같다는 말이다.
명색이 선지자인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향해 너무나도 쓴 말을 해 버렸다.
지금 그가 처한 상황이 십분 이해된다 하더라도
예레미야는 뱉지 말아야 할 말을 뱉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어쩌면 예레미야 자신도 이렇게 말하면서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렇게 무례한 예레미야를 향해
혼내시거나 야단치지 않으신다.
너가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냐고 따져 묻지도 않으신다.
그럼 너도 이제 선지자 그만두라고,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없는 줄 아냐고 말씀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다 이해하고 알고 계셨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자기 속에 있는
모든 원통함과 쓴뿌리를 다 토해 낼 때까지 기다리신 것처럼 보인다.
이제 하나님은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낙심과 절망 속에 주저앉아 있는 예레미야를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그가 다시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다.
19-21절 말씀이다.

19-21절

Jeremiah 15:19–21 NKRV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말씀하신다.
지금 그의 마음이 향해 가고 있는 그 방향이 잘못된 것임을 에둘러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의 사명을 원망하고, 자신의 인생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
그 원망의 끝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다시 돌아오라고 말씀한다.
내가 다시 너를 이끌어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내 앞에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헛된 것’을 버리라고 말씀한다.
지금까지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 말한 것들이 ‘헛된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남을 향해 원망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열매없는 ‘헛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귀한 것'을 말하라고 말씀하신다.
‘귀한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그러할 때 예레미야를 자신의 입으로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이스라엘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공격에도 끄떡없도록 그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함께 하며 그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말씀을 맺는다.

결론

오늘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이 어떠한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만 이어지는 본문을 살펴보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오래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묵묵히 받고만 있는다.
그리고 17장 중반부에 가서야 예레미야가 다시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그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 하나님을 겸손히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예레미야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귀한 것을 말하며 하나님의 입이 되었다.
무너진 마음이 다시 세워지고 견고한 놋 성벽이 되어 담대히 세상 앞에 서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 속에 다시 회복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넉넉한 가슴으로 예레미야의 그 탄식과 원망을 다 받아주셨다.
다 품어주셨다.
그 품 안에서 예레미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시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우리 되기 원한다.
나의 마음의 모든 무거운 짐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원한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회복되고 다시 일어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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