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탐꾼에 의한 반란

광야의 반란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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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교회의 어른 중 한 분인 한상동 목사님이 겪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마산교회의 김두석이라는 성도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그는 여학교의 선생이었습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고민이 되는데 어떻게 해결할 방침이 없을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은 즉시 마산으로 내려가 상황을 들었는데 문제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받은 월급으로 늙은 어머니와 홀로 있는 오빠, 이 세 식구가 하루하루 생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학교 선생으로 있을 수 없으니 3인의 생활은 어려워질 것이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신사참배를 하려니 신앙 양심상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상동 목사님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공중의 나는 새도 먹이시는 주님께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모든 생활을 주님께 맡기면 학교 선생직을 사면하더라도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는 신앙이 있다면 사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한상동 목사님이 말하자 늙은 어머니가 “나는 이대로 주려서 죽더라도 신사참배하고 받은 월급으로 먹고 살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김두석 선생도 쾌활하게 “선생 일 보는 것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후 김두석 선생은 2년의 옥중 생활을 보내게 되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은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에게 도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느냐 믿음이 없느냐는 그 사람이 성도인지 성도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 중의 하나가 됩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여 주신 일들과 또 말씀대로 우리 에게 행하실 것을 정말로 믿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이런 믿음이 없 다면 과연 그 사람이 성도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의 삶의 모습은 정말로 극과 극의 결과를 불러오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고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될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째, 믿음이 없으면 불신하게 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에 대해 살펴보면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본문의 이야기에서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라는 지역에 진을 쳤습니다. 이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38년간의 광야생활의 시작점이 되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정탐꾼을 보내는 것은 마치 적을 공격하기 전에 유리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임무는 비밀스럽게 가서 첩보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즘의 전쟁과 같이 정보를 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고, 군사력에 따라서 그 결과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탐꾼의 임무는 말대로 그 땅을 정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고 경험한 것을 숨김없이 신실하게 보고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고 믿음의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싸우시는 분은 이스라엘이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전쟁에 믿음으로 참여만 하면 되었습니다. 즉 믿음이 없으면 승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하나님께서 백성들로 하여금 정탐하게 하신 의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미리 확인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3장 2절 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전쟁의 결과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17절 말씀은 모세가 정탐꾼들에게 가야할 길을 제시하는데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갈 것을 말합니다. ‘산지’라는 말은 팔레스타인의 중부 고원지대를 일컫는 말인데, 이스라엘이 차지할 땅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갈렙의 유명한 기도인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그 산지가 바로 오늘 본문의 산지인데,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될 지역이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사람들이 산지에 살았던 이유는 팔레스타인 지역이 석회지역이라서 비가 땅으로 잘 스며들지 않는데 저지대에 살면 집에 물에 잠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산지에 살았었고, 산지에 있으면 적군의 공격을 막기에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벧엘과 같은 중심 지역은 모두 이 산지에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은 40일 동안 그 땅을 돌면서 정탐했습니다. 대략 경상도 정도 되는 가나안 땅을 살펴보는데 40 일이 걸렸다는 것은 이들이 가나안 땅을 전체적으로 다 둘러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헤브론 근처에 있는 에스골 골짜기에서 석류와 무화과와 포도송이를 가져왔습니다.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메고 왔다고 말하는 것에서 가나안 땅의 포도가 너무 커서 그냥 들고 올수 없어서 이렇게 했다고 하는 해석이 있는데, 이것은 포도의 원래 상태와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차타고 당장 달려와서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딴 뒤에도 시간이 제법 흘러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열매를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정탐을 마치고 온 정탐꾼들의 보고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났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가나안 땅에 대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정인 면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약속의 말씀을 따라서 그곳이 풍요로운 땅인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 땅의 산물을 가져왔습니다.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정말로 풍요로운 땅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매우 기뻤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짧은 순간에 들뜬 마음으로 환호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최고의 관심사인 땅의 상태에 대해 풍요롭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열매를 통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8절과 29절의 보고는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이 좋기는 하지만 그곳 거민들은 강하고 그 성읍들은 요새화 되어 있었고, 그곳의 거주자는 ‘아낙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아낙 자손은 고대의 유명한 거인족이며 용사였던 네피림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자들인데, 당대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던 족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낙 자손뿐만 아니라 아말렉, 헷, 여부스, 아모리와 같은 가나안 부족들이 있다고 말하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며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있지는 않지만 30절에서 ‘갈렙이 백성들을 조용하게 했다’라는 부분에서 백성들이 동요 하여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합니다. 30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백성들은 이 말을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 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강한 백성과 견고한 성읍을 가진 가나안을 정복할만한 병력이나 전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갈렙과 다른 정탐꾼들의 반응이 달랐던 것은 사고방식이 아니라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이 없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지 않고 넘을 수 없어 보이는 현실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들은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대로 믿어야 했습니다. 열 명 의 정탐꾼들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내었습니다. 32절의 말처럼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했습니다. 약속의 땅에 대한 이런 평가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틀렸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이 모두 헛된 일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재앙으로 그 강하던 애굽을 완전히 제압 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한 자들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가나안은 애굽의 세력권 안에 있던 작고 초라한 나라였던 것을 볼 때 정말로 이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모두 망각한, 비현실적인 그런 평가를 한 것입니다.
오래 전 한 유명한 글로벌 브랜드 신발 회사에서 세일즈맨을 아프리카의 한 나라로 보냈습니다. 얼마 후 세일즈맨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그는 “여기서는 신발을 팔지 못합니다. 아무도 신발을 신지 않습니다. 모 두 맨발로 다녀서 신발을 팔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 했습니다. 그러자 회사는 또 한명의 세일즈맨을 그 나 라로 보냈습니다. 얼마 후 이 두번째 세일즈맨이 본사로 연락을 했습니다. “당장 10만 박스를 보내주십시 오. 아무도 신발을 신고 있지 않으니 모두 다 신발을 신기면 됩니다. 수요가 정말 엄청납니다”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서 아무도 신발을 신지 않는다는 같은 상황을 두 세일즈맨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시선을 가지고 그 상황을 보았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정탐꾼의 상황도 이와 같습니다. 분명히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 땅의 거주민은 너무나도 강했습니다. 많은 요새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열 명의 정탐꾼과 두 명의 정탐꾼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었습니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강한 적 앞에서 열 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에 대한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불신에 가득차서 그 땅을 악평하며 그 땅으로 가면 다 죽을 것이라는 식의 말을 쏟아 부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프리카에 먼저 갔던 세일즈맨과 같은, 가나안땅에 갔던 열 명의 정탐꾼과 같은 시선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신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하나님을 불신하게 됩니다. 우리 의 경험을 되돌아 볼 때, 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습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신실하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그 상황을 이끄시며 인도하시며 또한 모든 것들을 해결해 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것이 주어지게 됩니까?

둘째,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설득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온 회 중은 밤새도록 통곡하고서 일제히 모세와 아론을 향해 원망을 말을 내뱉었습니다. 14장 2절과 3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겠다고 약속한 땅에 대해 자신들은 칼에 죽고 아내와 아이들이 잡혀가게 되는 그런 죽음과 파멸의 땅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니 이런 땅에 가서 처참한 상황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애굽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않고 있으니 지금 눈 앞에 놓여진 상황이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 이런 상황에 처하지 말고 차라리 한 지도자를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하여서 이스라엘의 반란이 극에 달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흐름을 역행하고자 했습니다.
상황이 극에 달하자 여호수아와 갈렙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옷을 찢었 는데 이는 극한의 슬픔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인 것을 다시 말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 땅 거주민이 강한 것은 분명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들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기뻐하기만 하신다면 그들에게 그 땅을 주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백성들이 해야 할 것은 9절에 나오는 것처럼 ‘여호와를 거역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그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 땅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의 백성들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9절에서만 2번이나 반복하며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 이유는 9절 하반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에 그들은 다른 무엇도, 어느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10절 말씀은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반란의 상황이 정말로 극치에 달했을 그 때에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도저히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냥 보고 계실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세에
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진노 가운데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삶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이적을 마음에 두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염병으로 이스라엘을 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런 심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구원자를 경멸한 이스라엘의 태도는 이런 심판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심판하시면 애굽 사람들과 가나안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평가하겠냐며 심판을 거두실 것을 간청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모세의 이런 말은 고대 근동사회 의 문화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신과 백성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신이 강하면 백성 도 강하고, 백성이 약하면 신이 약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말하며 하나님의 약속과 자비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주의 권능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18절에서 모세는 “여호와는 노 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4장 6절과 7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말씀 그대로,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한 모세의 기도는 용서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없이 하나님을 멸시한 자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한 자들이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용서라는 것은 죄가 대충 넘어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용서를 받았지만 아 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죄 용서에 대한 개념은 다윗을 통해서 보다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에는 다윗의 죄악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충직한 신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아를 전장에서 죽게 하는 살인죄도 저질렀습니다. 이후 나단 선지자의 책망으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회개하였고 그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지은 죄의 결과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낳은 첫 아이를 죽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죄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었지만, 죄의 결과로 아이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 용서가 바로 다윗의 죄 용서와 같았습니다. 죄 용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었지만 그들의 죄의 결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죄의 결과에 대해 예외 조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껏 행 하신 일들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도 않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굳건히 믿었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 을 허락받았습니다. 함께 간 그 어느 정탐꾼들도, 계속해서 불만을 가졌던 기성세대들 모두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없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여기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 누가 물어보면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할텐데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내 삶에서 어려운 일이 닥쳐올 때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정말로 우리 안에 살아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굳건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 대구청구교회 모든 성도님들 가운데는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분명히 있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삶이길 소망합니다. 생사가 걸린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신사참배하지 않았던 김두석 성도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말로만 믿는다 하지 않고 우리의 삶의 모습이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행동이 되어서 하나님을 참되고 바르게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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