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2)

비유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36 views
Notes
Transcript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말씀하신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특히 복음서에 예수님의 비유가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사복음서 사이에 중복되어 나타나는 비유들도 많은데, 오늘 본문의 비유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고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비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들을 읽고 듣고 해석할 때 주의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의 관점에서 이 비유를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이지만,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를 살아가던 유대인인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들의 문화를 알고서 비유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 비유를 읽고 들으면서 우리 문화의 기준에 맞추어서 해석해서는 비유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문화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는 지금 우리 시대처럼 개인주의적인 모습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오래 전 모습과 비슷하게 마을 중심의 사회를 이루고 살아갔습니다. 물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아갔는데, 대부분의 일반 가정집은 크지 않고 소박한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당시 한 가정에게 닥친 일은 그 마을 전체에게 닥친 일과 같이 여겨졌습니다. 한 가정에서 결혼식을 치르면 이 결혼식은 마을 전체의 결혼식과 같았고, 장례를 치른다 하더라도 마을 전체가 장례를 치르는 그런 문화가 예수님 당시의 문화였습니다. 이런 큰일들 뿐 아니라 한 가정에 방문객이 찾아오면 그 방문객은 마을 전체의 방문객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렇기에 이웃 마을이나 타지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은 마을 전체가 같이 환대해야 할 책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문화였기에 만약 한 가정에 손님이 찾아와서 환대를 받지 못하면, 그것은 마을 전체의 체면이 손상되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 마을에서 어느 한 가정이 손님을 환대하기 위해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그 이웃이 최선을 다해서 도움을 주는 것은 마을의 불문율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만약 귀찮아서 핑계를 대며 도움을 거절하면, 그는 마을 전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부끄러움과 창피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대 유대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오늘 본문의 비유를 보면 비유의 내용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비유에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마을에 A와 B라는 이웃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밤중에 A의 집에 친구 C가 예기치 않게 찾아왔습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전화를 할 수도 없었고,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여행 중이던 C는 A에게 자신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미리 전하지 못한 채 갑작스레 방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왕 찾아올 상황이라면 저녁 시간이나 이른 시간에 찾아오면 좋았을 텐데 C가 밤중에 찾아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낮이 아니라 밤중에 여행을 하는 경우가 많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잘 아시는 동방의 박사들이 예 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밤에 찾아온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여행자들을 위한 숙소나 식당이 발달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행자는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식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A의 집을 찾아온 C는 배가 매우 고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 A의 집에 미리 준비해 둔 떡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번역된 떡이라는 단어는 빵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인데 당시 문화를 생각해 보았을 때, 떡보다는 빵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은 번역입니다. 하여튼 이 A의 집에 준비해둔 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보통 집들은 항상 빵이 있었는데, 친구가 찾아온 그 날 밤에 빵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A는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찾아온 C를 대접하기 위해 이웃 B의 집을 찾아가 빵을 빌리고자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농촌 마을에서는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빵을 만들었었는데 아마 A가 찾아간 B는 그 날 빵을 만드는 당번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B의 집에 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A는 B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며 빵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B를 찾아가 부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히 B가 빵을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앞서 설명 드린 당대의 문화를 생각해 볼 때 B가 거절하는 경우는 상상할 수 없는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비유를 우리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 상황에서 이상한 사람은 누가 되는 것입니까? 일 단 밤중에 찾아와 무례를 행한 C도 잘못이고, 밤중에 잠든 자들을 깨우는 A도 몰상식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당시 문화적 상황에서 A에게 찾아온 친구 C는 A의 손님이기도 했지만, B의 손님도 되었고 마을 전체의 손님과도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A의 요구는 몰상식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것이었고, 존중 되어야 하는 요청이었습니다. 단순히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이 비유를 듣는 제자들에게 A의 요청은 정 당한 것이었고, 도리어 B가 비판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7절에 나타난 B의 반응은 실제로 B가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반응이 일어날 수 있냐며 “너희 중에 이런 일을 하는 자가 있겠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니요”라는 대답을 이끌어 내시기 위해서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없노라 하겠느냐”고 질문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A, B, C라는 사람의 행동을 살펴보긴 했지만, 사실 이 비유의 중심 주제는 A의 행동이 정당한 것인지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B의 행동에 대한 예측도 아니라 11장 1절에 나타난 것처럼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중심 주제를 ‘기도’라고 볼 때 그 핵심이 ‘기도하는 인간의 자세’인지, 아니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인지에 대해 확인이 필요합니다. 8절의 말씀에 근거하여서 우리는 이 비유의 핵심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에서 B라는 사람은 벗의 간청함을 인하여서 A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원어적으로 번역이 조금 잘못된 것인데, 사실 “간청함을 인하여”라는 이 말은 “수치를 피하기 위해서” 혹은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처럼 B라는 사람이 A의 끈질긴 요청 때문에 빵을 준다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체면에 손상을 입지 않기 위해서라도 빵을 줄 수 있었다고 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 가져야 하는 자세는 우리가 계속 간청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에 마지못해서 끌려 올 수밖에 없는 그런 분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는 먼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은혜로우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원천이 우리의 기도하는 자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자는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런 사실은 이 비유의 전후 문맥을 보시면 보다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비유의 앞에는 주기도문이 등장 합니다. 이 주기도문의 강조점은 그 시작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신뢰하는 자에게 주기도문의 모든 기도의 내용이 허락되는 것입니다. 또한 비유 뒤에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등장합니다. 이 가르침 역시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의 응답이 확 실히 있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반드시 우리에게 응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아버지도 자식의 요구에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으로 인하여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에게 귀 기울이고 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자비로운 성품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 역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의 은혜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죄인임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가진 생명과 가정, 직업, 재산, 재능 등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함에 있어서 우리의 기도 대상인 하나님께 어떤 믿음의 자세로 기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은 우 리의 기도에 대해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신실하시고 은혜로우신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비유에 이어 예수님은 우리가 악할지라도 자녀가 요구하는 그 요청에 좋은 것을 주지 해가 되는 것을 주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주지도, 알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떠시겠습니까? 우리가 좋은 것을 달라고 기도할 때,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라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죄로 물든 육신의 부모도 자녀의 요구에 대해 좋은 것을 주는데,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이 더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주의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만약 자녀가 해로운 것을 달라고 요청하면 그것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까? 아마 한분도 그런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자녀를 미워해서 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자녀가 간청하고 간청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해로운 것이라면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역시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 내용 가운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 삶에 불필요한 것들, 나의 삶에 악영향을 끼칠 것들에 대한 기도들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들이라면 얼마든지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전혀 상관없이 나의 유익을 위한 기도는 결코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던 중 인터넷에서 짧은 글을 하나 보았습니다. 페이스북이라는 SNS에 작은 백합이라는 기독교 페이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서윤이라는 아이를 둔 엄마가 올린 글을 보았는데 이 분이 올린 글을 잠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루는 글쓴이인 엄마가 자녀에게 간식으로 바나나를 먹이려고 준비했다고 합니다. 바나나를 먹이려고 하니 이전에 바나나 끝부분에는 농약 성분이 많다고 들어서 끝부분을 잘라서 아이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이가 갑자기 막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 우냐며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 이유가 참 당혹스럽습니다. 왜 바나나를 다 주지 않고 조금만 주느냐면서 계속해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엄마는 아이에게 왜 바나나 끝부분을 잘라서 주었는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을 받았다는 그 사실에 사로잡혀서 엄마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계속 울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엄마는 아이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보였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좋지 않은 것은 빼고, 좋은 것만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알지 못한 채, 적게 주는 것에 사로잡혀 실망하며 떼쓰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 나에게 최고의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제껏 기도하며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스스로의 모습을 아이의 모습을 보며 되돌아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서윤이라는 아이가 바나나의 일부를 받아서 기분이 나빠 울며 떼쓰던 것처럼, 우리도 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냐고 따지며 때로는 화를 낸 적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들, 우리가 볼 때 좋아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해가 될 것들은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기에 들어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 비록 우리 눈에는 끝이 잘린 바나나와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해가 되지 않는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의 필요를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주위의 이웃들과 교회를 위한 기도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필요를 지금 당장, 즉각적으로 이루어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 하나님의 때에, 가장 좋은 방법, 하나님의 방법으로 가장 선하게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속에서 분명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리고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나의 필요가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기도함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