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행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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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교회의 모습들을 보면 ‘순종’이라는 단어가 점점 잊혀져가고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의 관심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에 있다기 보다는, 현세의 삶 가운데 누리는 복과 형통함에 치우쳐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삶의 모습 가운데 참된 성도 의 모습, 주인을 모시는 종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요즘 한국 교회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을 향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 질책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우고 그 위에 집을 든든히 짓는 자와 같고,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흙 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기초도 없이 흙 위에 집을 짓는 자들은 입으로는 주님을 따르며 찾고 있지만, 예수님을 향해 “주 여 주여”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 실상은 주님을 따르는 자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성도의 삶이 어떤 삶이라고 말씀하시는지 확인해 보시고, 스스로의 삶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에서 행하신 사역 가운데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7-49절에는 예수님의 평지설교의 내용이 담겨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그 설교의 결론 부분인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어떤 자인지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평지 설교를 마무리하고 계십니다. 46절을 보시면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라고 제자들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조금 더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앞에 “왜”라는 말이 붙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왜 너희는 나를 주여 주여라고 부르면서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않느냐?”면서 그들을 질책하심과 동시에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주여”라는 단어는 원어로 ‘퀴리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주, 주인, 통치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사용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깐 예수님을 단순히 유대인 랍비와 같은 개념으로 선생님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주인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삶은 말만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면 제자들은 어떤 자가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하는 ‘종’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일반적인 종 의 모습은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만 하는,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하는 그런 자였습니다. 그런 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그 삶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그런 이상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것 같으면 차라리 다른 유대 인들처럼 예수님을 ‘선생님’이나 ‘랍비’라고 부르며 가르침을 따르면 되었을 텐데,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 그 삶은 주인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그런 불의한 종의 모습으로, 마치 예수님께 사기를 치는 것과 같이 제자들이 살아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듣고 난 뒤의 반응을 통해 성도의 모습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요동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본문 47절과 48절에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의 모습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모든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는 집을 짓는데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는 사람과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 건물을 짓는 모습을 처음부터 보신 적이 한 번쯤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저는 군대에서 5층 정도 되는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 바로 건물의 골조를 올리고 층을 쌓아올리지 않습니다.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 하는 첫 작업은 바로 건물의 기초를 놓는 것입니다. 지어지는 건물의 크기가 크다보니 땅을 파서 거기에 콘크리트를 한 가득 부어서 건물의 기초를 놓습니다. 건물 을 짓는 모습을 보시면 위에 기둥을 세우고 건물의 형태를 잡는 것만큼 오랜 시간을 들여서 기초를 만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것처럼 반석 위에 건물의 기초를 두기 위해서 콘크리트를 부 어 반석 역할 할 것을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반석이 없이 건물을 짓는다면 아마 건물을 조그만 충격에도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최근에 포항 근처에서 지진들이 잦게 일어났었는데, 만약 건물들의 기초를 반석에 두지 않았다면 아마 포항의 건물들이 모두 무너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건물을 짓는 데는 기초가 중요합니다. 반석이라는 그 기초 위에 건물을 지어야 말씀처럼 홍수가 몰아쳐 건물을 덮친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집을 세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말씀 순종이라는 반석 위에 우리의 신앙을 쌓지 않으면 우리는 사탄의 시험에 금방 넘어져 버리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모든 자들은 홍수가 나서 물살이 그 집을 덮친다 할지라도, 그 삶 가운데 어떤 시련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말씀의 기초에 든든히 세워져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브람과 그의 아버지 데라의 가족들은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라는 지역에 살다가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우르를 떠나 하란에 거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족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버지의 집을 떠나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였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땅으로 간다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아브라함 당대에도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께 복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창세기 22장에 이르러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자 그의 하나 뿐인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백 살이 되어서야 허락받은 그 귀한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왔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리아 땅으로 가는 길은 그렇게 가깝지 않았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길을 떠났을 때 가졌던 마음이 많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3일 길을 가는 동안 그 마음이 녹아내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을 것입니다. 아마 3일 길 내내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과 불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불꽃 튀기며 싸우는 그런 시험의 길이었을 것입니다. 3일 길을 걸어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모리아 땅을 보고 그 곳에서 정 말로 자신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할 때에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셔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 하는 줄”을 알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좋은 예라고 생각됩니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참 생뚱맞아 보이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은 순종했고, 결국 그는 이후에 그 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의 시험도 통과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믿음이라는 집을 지을 때 그 기초를 잘 놓아서 이삭을 바치라는 그 홍수 같은 말씀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둘째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무너진다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49절은 “그러나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 없이 땅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물살이 그 집에 부딪치니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고, 그 집의 망가짐이 컸다”라고 말합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집이 무너질 때 물에 의해서 조금씩 무너진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진 모 습을 생생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망가짐’이 컸다라고 말해서, 그 집이 무너져서 파괴됨 이 매우 심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49절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을 무시함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왜냐하면 비유에서 나타나듯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게 된 결과는 심각하고 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24-25절에 같은 내용이 등장하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를 “어리석은 사람”이 라고 표현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은 대표적인 어리석은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호수아서를 보시면 아간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가서 여리고 성을 함락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성에서 나온 모든 전리품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유다 지파의 아간이라는 사람이 전리품들을 보고 그 욕심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고 물건을 취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아간 한 사람에게만 진노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 손 전체에게 진노하셔서 여리고 성보다 더 작은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이후에 아간이 자신이 노략한 물건 전체를 다시 하나님 앞에 돌려 드린 뒤에야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은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행해야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마치 자신을 속이는 자 와 같다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고, 교회에 와서 말씀도 열심히 듣고, 기도도 열심히 한다는 등의 자기 만족으로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자녀가 없지만 여기 계신 분들 대부분은 자녀가 있으실 텐데, 자녀가 성장하면서 때때로 조언할 일 들이 생길 것입니다. 그 때에 자녀에게 조언을 하는데 자녀가 여러분 앞에서는 말을 잘 듣는 것처럼 앉아 있고, 마치 동의하듯이 고개도 끄덕이는 그런 반응을 보였지만, 정작 그 조언의 내용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조언을 잘 들은 자의 반응이겠습니까. 아무리 앞에서 잘 듣고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삶 가운데 변화가 없고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보면 믿음이 없는 자라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있자니 “행위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또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행동이 필수적이라는 행위 구원이 아닙니다.
대학원에서 역사서에 대한 강의를 듣던 중 박우택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구원 받는 데는 행위의 조건이 붙지 않는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 로서 나타나야 하는 삶의 열매와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과연 그 사람이 구원받은 자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구원 받은 자는 말씀을 들으면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반응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이 말이 구원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 성도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환생을 믿는데 다음 생에 더 좋은 존재로 환생하기 위해서는 이생에서 덕을 잘 쌓아 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톨릭은 우리가 이 땅에서 지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며, 미처 죄를 다 용서 받지 못하면 연옥에 가서 살면서 지은 죄를 다 해결해야 비로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개념 때문에 종교개혁시대에 연옥에 있는 자들이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다면서 면죄부를 팔았었습니다. 하여튼 세상의 많은 종교, 아니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는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구원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에베소서 2장 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이며 그것은 우리의 행위로 인함이 아닌 온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무시하고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내 판단대로 살아간다면 과연 그 사람이 구원받은 자인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가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도우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평지 설교의 마지막에 위치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따르던 무리에게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평지 설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제자라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론인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참된 성도, 참된 제자의 모습은 비록 우리의 행동이 구원과 상관은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여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스스로의 모습을 많이 되돌아보았습니다. 나는 얼마나 행동하고 있는가. 때때로 어려운 일들이 닥쳐올 때 하염없이 무너졌던 그런 모습들이 떠오르니, 아직도 기초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내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 말씀에 순종해야지, 이 말씀은 나중에 순종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종다운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예,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라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런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받지 않는 것 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으로써,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나가는, 순종하기 위해 처절히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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