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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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지은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용서를 잘 받아 주시는 편이십니까, 아니면 잘 용서해 주지 않으시는 편이십니까? 저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모습은 다른 사람이 구하는 용서에 대해 그대로 그 용서를 받아주기 보다는 그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서 때로는 용서를 쉽게 받아주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인간의 용서와는 대조되는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질문에 비유로 답을 주시면 서 교훈하시는 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라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 하라고 말씀하시며, 비유를 통해 베드로에게 교훈을 주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 하면서 다른 사람을 7번 용서하면 되겠냐고 물었을 때 사실 ‘예수님, 이정도면 충분히 용서하는 예수님 제자다운 모습이지요?’ 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 랍비들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는 3번까지는 용서해 주고, 4번은 절대로 용서하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 문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이 질문을 하며 사실 7번도 당시 가르침보다 훨씬 많이 용서해 주는 것이었으니, 예수님께 칭찬을 받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4번도 많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4번도 아니고 7번도 아니고, 7번을 70번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과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7번을 70번 용서한 490번까지만 용서해 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 아닙니다 .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490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끝까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에게 충격적인 가르침을 주신 예수님은 그와 관련된 비유 하나를 그에게 말씀 하시며 천국, 즉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임금과 종에 대한 이야기가 첫 번째 로 등장하고, 종과 그의 동료에 대한 이야기가 두 번째로, 마지막에는 다시 임금과 종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한 번쯤 교회에 다니시면서 이 비유에 대해 설교를 들으시고, 또 성경 을 읽으시면서 접해보셨겠지만, 오늘 다시 천천히 살펴보며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무엇을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기 원하시는지 알아가기 원합니다.
먼저 첫 번째 장면은 23-27절입니다. 여기서는 한 임금과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진 한 종 사이에 있었던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임금이 결산할 때가 다가오자 종 들을 불러 결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만 달란트 빚진 자를 데려왔는데 그가 갚을 것이 없자,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갚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확인하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달란트라는 개념에 대 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제가 담당하는 초등부에서 아이들에게 달란트를 나눠주고 달란 트 잔치를 통해 사먹고 싶은 것을 사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는 그런 프로그램에서의 달란트 정도로 생각하십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달란트는 어떤 물질의 무게나 화폐의 단위로 사용되는 개념이었습니다. 보통 한 달란트는 약 6,000 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습니다. 잘 아시다 시피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올해 들어서 최저임금이 올 라 제가 계산해보니 하루 8시간 정도 일하면 6만원을 벌 수 있습니다. 이 금액을 기준으로 만 달란트라는 돈을 계산해 보니 현재 화폐 가치로 약 3조 6천억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나왔습니다. 이 비유를 들은 베드로는 만 달란트라는 것을 들었을 때 상상하기도 힘든 엄청난 금액임 을 직감적으로 알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달란트라는 개념이 쉽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큰 금액인지 체감하기 위해서 설명해 보았습니다.
종이 어떤 이유로 이런 엄청난 금액을 빚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종이 임금에게 만 달란트라는 빚을 졌고, 임금이 하고 있는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팔아 빚을 갚으라’는 요구는 부당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요구라는 것입니다. 또한 임금이 특이한 것이 아니라 당시 문화가 빚을 갚지 못한 자에게 이런 방식으로 빚을 갚도록 했기에 임금의 요구는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임금의 요구에 종은 자신의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당 시 노예의 가격이 보통 500~2,000 데나리온에 거래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종은 자신과 가족 을 모두 팔고 재산을 다 판다 할지라도 엄청난 빚을 갚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종은 임금 앞에 엎드려 자신이 어떻게든 빚을 다 갚겠으니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임금의 자비를 구하며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그러자 임금은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단순히 종의 불쌍함을 인하여 그냥 탕감하여 줍니다. 종이 임금에게 바라는 것은 빚을 탕감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이 구한 것은 단지 빚을 갚을 수 있는 기간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은 기간을 늘려 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빚 자체를 모두 탕감해 주겠다는 놀라운 은혜를 선포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임금의 선포에 어떤 단서나 조건이 붙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빚을 갚지 않아도 되니 평생 자신의 종으로서 열심히 살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디 가서 남들이 하기 꺼리는 그런 일들을 감당하고 오라 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종의 간청함에 그의 불쌍함을 보고 그냥 엄청난 빚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장면이 아주 아름답고 은혜롭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비유가 끝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제일 좋아하는 ‘해피 엔딩’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끝나면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가지고 있지만 그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너 무 좋은 결론으로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요즘 막장 드라마 가 많지 않습니까? 드라마를 보시다 보면 스토리가 아름답게 흘러가다가 갑자기 음악이 바뀌고 불화가 시작되는 그런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본문 28-30절이 바로 그 장면입니다.
두 번째 장면에서는 앞서 임금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아무 조건 없이 탕감 받은 한 종과 그 종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사이에 있었던 일이 등장합니다. 임금의 예상치 못한 은혜로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종은 나가자마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 납니다. 임금에게 용서를 받은 직후에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만났으니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 면 자신도 그 동료의 빚을 탕감해 주는 자비를 베풀어야하지 않겠습니까? 백 데나리온은 육백 만 원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결코 작지 않은 금액이지만 자신이 임금에게 탕감 받은 금액은 만 달란트였습니다. 3조 6 천억이었습니다. 60만 배가 나는 금액을 자신은 아무런 대가도 없고, 조건도 없이 탕감 받고 나오자마자 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금액은 빚진 자신의 동료의 간구를 무시하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는 그런 행동을 보입니다.
그는 임금에게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을 빚진 자였지만 임금의 은혜와 자비로 아무런 조건도 대가도 없이 그 빚을 탕감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너무나도 작은 권리 에 대해서는 한걸음의 후퇴도 하지 않는 악랄한 모습을 자신의 동료에게 보이고 있습니다. 백 데나리온을 빚진 그의 동료도 자신과 같이 빚을 갚겠으니 참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자 신이 조금 전에 임금에게 했던 그 모습을 순간 잊어버리고 임금이 자신에게 베푼 것과 같은 은혜를 베풀지 않고 동료를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첫 번째 장면이 참으로 아름답고 은혜롭게 마무리 된 것과는 너무 다르게 안타까운 상황 가운데 두 번째 장면이 이렇게 마무리되었 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장면은 31-34절에 나타납니다. 이 장면에서는 다시 임금과 빚을 탕감 받은 종이 등장합니다. 자신은 임금으로부터 만 달란트라는 상상하지 못할 엄청난 빚을 탕감 받았 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60만분의 일 밖에 되지 않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의 간청을 무시 하고 그를 감옥에 가두는 종의 모습을 동료들이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주변에서 지켜보았다 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종이 악하게 보이고, 종의 동료가 딱하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동료들은 주인에게 가서 자신들이 본 것을 다 고발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참 당 황스럽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 자신은 종이 간청해서 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조건 없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종은 그 은혜를 주위에 흘려보내기 는커녕 비교할 수 없이 작은 빚을 진 그의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고 감옥에 가두기까지 한 것 입니다 . 그래서 주인은 종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 의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 말을 마치고 주인은 종이 한 것처럼 종을 감옥에 가두어 빚을 다 갚도록 넘기는 것으로 비유의 마지막 장면이 막을 내립니다.
세 번째 장면과 첫 번째 장면을 보시면 등장인물도 같고 상황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는 이제는 종에 대한 임금의 일방적인 공의의 선포와 처벌만이 주어지고, 더 이상 종이 변명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자비의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전에는 종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비를 구하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자신이 받은 은혜를 모르고 불의한 자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지 말해줍니다. 사실상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웃이 우리에게 지은 죄는 백 데나리온에 지나지 않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라는 갚을 수 없는 빚, 그 죄를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 받았는데, 어떻게 백 데나리온의 작은 것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이웃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임금이 종 을 다시 불러 감옥에 가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 대한 용서를 취소하시고 다시 그 죄 에 대한 값을 물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인간과 달리 완전하셔서 자신의 행동과 판단에 대해 결코 후회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임금의 행동이 당연합니다. 자신은 용서해 주었는데 그 용서를 잊고 다른 자 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은 종이 불의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유에서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사람도 아닌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이런 모습을 보이셨냐는 그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종이 용서하지 않을 것을 다 아셨을 텐데 왜 그 종을 용서해주는 실수를 범하셨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한번 결정하신 일을, 마치 인간과 같이 용서해 준 일까지 취소하시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행동에 따라 손바 닥 뒤집듯이 쉽게 달라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용서를 신뢰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 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읽다보면 이런 문제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이 때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말씀 자체를 잘 보고 말씀에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흔히 쉽게 잊어버리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본문의 대부분이 비유가 되다 보니 본문을 읽고 나면 앞뒤 내용은 다 빼버리고 비유의 이야기 자체만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유 자체도 중요 하지만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과 비유 끝에 하신 말씀을 같이 잘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 23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비유에 앞서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라고 하셨고, 비유를 마치시고 35절에서는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구절의 말씀을 통해 오늘 본문의 비유가 단순한 용서에 관한 교훈을 주시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천국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임금이 종에게 보여준 공의로운 요구와 자비, 자비를 거둔 것, 종에 대한 심판 등의 모습이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가 보여주는 사랑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인격적인 변화가 포함되는 진정한 용서입니다. 비유에 나타난 종처럼 용서 받기 이전의 삶과 용서 받은 후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동일하다는 것은, 그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고자 했지만 우리가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가 인간적인 용서의 방식으로 본문에 접근하면 하나님을 변덕을 부리시는 이상한 분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인격의 변화까지 불러오는 천국의 용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왜 하나님이 변덕을 부리시고 이상하게 행동하시지?’라는 오류에 빠지지 않고,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한 선교사님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의 집사님이 직장전도훈련을 열 심히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직장에 다니다보면 회식자리에서 술을 권하는 일이 자주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그 집사님에게도 회식 자리에서 술 권유가 자주 들어왔지만 그리스도인의 양 심 때문에 그 권유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 그러던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계속 술을 거부하자 집사님의 상사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집사님의 뺨을 때렸다고 합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있고,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뺨을 맞으니 얼마나 수치스러웠겠습니까. 집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회사도 무단결근을 해가며 분을 삭히고자 했지만 잘 되지 않자 사표를 내기 전에 산으로 기도를 하러 올라갔다고 합니다. 뺨을 맞았던 당시의 상황과 화난 마음들, 억울한 마음들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중 이런 마음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고 합니다. “너는 겨우 뺨 한 대를 맞은 것을 가지고 그렇게 분하고 억울해 하느냐?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천대받으며 너를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과 멸시를 생각하니 자신이 뺨을 맞은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직장에 다시 나갔는데 자신이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져있었다고 합니다. 뺨을 때린 상급자가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전에 그가 처리했던 일들이 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집사님의 뺨을 때린 사건도 문제가 되어서 징계를 받게 된 상황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자 집사님은 상급자를 두둔하며 그분의 구명을 위해서 힘썼습니다. 피해자인 집사님께서 그렇게 열심을 가지고 상급자를 도와주자 회사의 징계도 거두어졌다고 합니다. 그 결과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집사님의 뺨을 때렸던 그 상급자가 세상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용서에 감동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지금은 직장선교회의 리더로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이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게 되니 그 인격이 변화되어 자신의 상급자를 용서하고 그를 구제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집사님의 모습과 달리 본문 속의 종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의 모습 안에 종의 모습이 많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종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가 너무나도 큰데, 그 사실은 온데간데없이 잊어버리고 살아왔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시면서까지 용서하신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은 다 잊어버리고,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기 에는 억울하고 또 그렇게 용서하고 싶지도 않은 ‘악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제 모습 을 발견했습니다.
사랑하는 청구교회 성도 여러분, 저의 이런 모습과 같이 성도 여러분의 모습 속에도 혹시 이런 모습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비유의 악한 종은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가 임금에게 받았던 용서가 거두어지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은 오늘 우리에게 악한 종의 모습을 벗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 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계속해서 용서 받기 이전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을 우리가 거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합당한 모습은 하나님의 용서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용서를 닮아 다른 사람을 동일하게 아무런 대가 없이 용서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조지 허버트 목사님은 용서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부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용서의 다리를 놓아주셨는데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 것은 그 다리를 거절하고 다리를 부수는 일인 것입니다. 아직까지 우리의 모습 가운데 비유 속의 종의 모습이 있다 면 다 벗어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다짐하시고 노력하시는 성도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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