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겸손은 힘들어

잠언  •  Sermon  •  Submitted
0 ratings
· 66 views
Notes
Transcript
중고등부 설교
일시 : 2021.06.06
본문 : 잠언 3장 34절
제목 : 겸손, 겸손은 힘들어
설교자 : 윤영준 목사
주제: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
“겸손”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겸손을 비굴한 것으로 여깁니다.
아무때나 다른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고, 굽신거리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겸손”의 시대는 아니다라는 말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맞는 말 같죠.
살다가보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PR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뽐내여 평가를 받아야 하는 순간들도 있기때문입니다.
만약 5분 면접을 보게 되었는데, 5분 안에 면접관에게 나를 어필하지 못한다면 어떤가요?
가수에게 무대에서 3분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 시간동안 노래를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어떤가요?
그래서 소프라노 조수미씨는 최고의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대에 올라갈 때마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요. “나는 최고다. 나는 최고다. 나는 최고다.”
그리고 가수 비와이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세상 앞에서 당당하자”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겸손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겸손을 무조건 남들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할 수 있는대도 못한다고 빼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분야에서 게으르지 않게 최선을 다하고, 능력을 발휘하도록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결국 성경에서의 겸손이 무엇이냐면,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되,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이야기 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적용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짓이 아닌 정직해야 되요.” “남을 이해하고 용서해야되요”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금새 머리 속으로 다른 사람을 찾아낸다.
‘아니,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목사님이 어떻게 아셨지??
아~ 이 이야기를 내 짝궁이 들었어야 되는데…
아~ 이 이야기를 우리 부모님이, 내 동생이 들었어야 했는데…’
생각한 사람 있다? 없다?
저도 결혼 초기땐 몇번 이런 일로 싸운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예배를 드리고 오는 길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야기하는거죠.
“오늘 말씀 잘 들었지?”
마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내 모습은 보지 못하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리는 거죠.
지금 우리 안에 있는 갈등은 내가 아니라 너 때문이야…
너만 잘하면 돼…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파이트 하는거죠.
그런데 성경 말씀은 누구를 위해서 써있는 것인가요?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이 자리의 누구에게 말씀하고 있는 건가요?
고개를 돌릴 필요없습니다. 바로 나에요. 나.
내 옆의 사람도 아니고, 집에 계신 부모님도 아니고, 내가 진짜로 싫어하는 그 친구도 아니고, 바로 지금 이순간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 남에게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자신을 자세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 내 안에 슬며시 찾아 들어온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6장은 하나님께서 미원하시는 것 6-7가지에 대해 말합니다.
16-19절입니다.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다.
교만한 눈과 거짓말하는 혀와 무죄한 사람을 피 흘리게 하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꾸미는 마음과 악한 일을 저지르려고 치닫는 발과,
거짓으로 증거하는 사람과, 친구 사이를 이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교만한 눈입니다.”
교만은 눈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교만이 내 안에 들어오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그 사람대로 보지 않는거죠. 그 친구를, 부모님을, 형제자매들을,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흠과 단점들을 쉽게 찾아내어, 아래로 보고, 자신의 흠에는 관대하여 특별하다고 여긴다는 것이죠. 그리고 교만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의 뜻과 말대로 안되면, 상대방에게 화를 냅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맞추어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나만 옳고 너희는 다 틀렸다고 여깁니다.
물론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들을 다 깔아뭉개고 나 홀로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교만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요즘 이런 말을 많이 쓰죠.
“OO가 OO했다” “Bts가 Bts했네”리고 하면, 당연히 Bts가 당연히 또 1등했구나…
“사탄이 사탄했네 사탄했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교만입니다. 사탄의 출발점이 바로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4장 11-12절은 말해요.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나의 보좌를 저 높은 하나님의 별들 위에 두고 신들의 회의장이 있는 저 북극산에 자리잡으리라.나는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
원래 하나님의 천사였던 사탄이 자신을 어떻게 여겼나요?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서 자신이 가장 특별한 존재로 여겼다.
그리고 피조물을 뛰어넘어서 하나님과도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던 것이죠. 이처럼 교만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괴합니다.
또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인물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다 하실만큼 신실한 인물이였다.
그러나 왕으로 직위하고나서는 그의 마음에 자신의 부하의 아내를 탐하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결국 그의 부하를 전장에 나가 죽게 하였고, 졸지에 과부가 된 그 여인을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었죠.
그리고 며칠 후.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을 찾아와서 상의할 것처럼 말합니다.
“왕이시여, 어느 마을에 아주 큰 부자가 있는데 그가 어떤 이유에 의해서 가난한 사람의 하나 밖에 없는 양을 빼앗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대노했죠. “아니, 저저저저 쳐죽일 놈이 있나!!!”
그 사람이 눈 앞에 있다면, 칼을 뽑아서내리칠만큼 화를 내었다.
그 때, 나단이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그 쳐죽일 사람이 바로 다윗 왕이십니다.”
다시 돌아가서 다윗은 왜 범죄를 저질렀던 것일까요?
그의 마음 가운데 교만이 숨어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이제 왕이 되자, 서서히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분리시켜서 생각했던 것이죠.
저들보다 나는 특별한 존재라고 여긴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점차 기준을 다르게 적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탐욕은 비난받을 만하지만, 자신의 욕심은 충분히 정당할 수 있어.
왜? 나는 특별한 존재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기준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용했지만,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점차 하나님의 말씀과는 동떨어졌으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알지 못한채 결국 하나님이 보시기에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처럼 교만은 사탄이 놓은 교묘한 영적인 덫입니다.
이 교만의 덫이 얼마나 교묘하냐면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세상 사람들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다니는사람들도 걸려들 정도로 교모하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만화를 하나 볼까요? 한 청소년이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육신의 정욕을 무찌릅니다. 그리고 재물의 유혹을 걷어찹니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잠하게 합니다.
얼마나 용맹한 청소년인가요? 저는 여러분이 이런 용사와도 같은 청소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마지막 컷에서 반전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 나는 너희들과는 달라” / 교묘한 영적인 교만의 덫에 빠지게 된 것이죠.
며칠전, 한참 떠들석하게 한 뉴스가 있었죠.
식당에서 두 여성 손님이 식사를 하고, 식당 주인에게 갑질을 한 사건입니다.
식당주인과 손님이 한 전화 통화를 들어보면 가관도 아닙니다.
통화하는 내내 손님은 반말을 사용하고, ‘너’ ‘너’ 하면서 상대방을 끝까지 무시하는 말들을 서슴없이 합니다. 반전은 반말을 하면서 갑질을 하던 그 여자 손님이 어느 교회의 여자 목사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목사님이 다른 사람에게 친절히 대해야 하는 것을 몰라서일까요?
말씀을 몰라서 였기 때문일까요?
지난 주 저희가 나누었던, “잔인한 말, 가시가 돋힌 말은 마음에 상처를 주는것이다”를 몰라서일까요? 아닙니다. 그 말씀들을 다 알고 있지만,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특권의식에 젖어 다른 사람들을 낮게 보았기 때문이죠.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청소년 친구들,
우리는 어떠할까요? 교만으로부터 안전할까요?
내가 교회를 다니며 듣는 말씀들이 모두 상대방을 향하여 있다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이미 목이 뻣뻣해져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내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겸손한 사람은 끊임없이 말씀을 비추어보는 일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이 내가 아닌 저 친구, 우리 부모님, 학교에 있는 그 친구가 들어야 되는 것이 아닌 오늘 내가 들어야 하는 말씀임을 알고, 그 말씀 안에서 거울처럼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는 겁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며 자신의 모습을 수정해가는 것입니다. 마치 친구들이 계속 / 시간만 나면 거울을 들여다보고, 화장을 고치는 것처럼 말이에요. 단시간에 되는 일이 아니다. 장시간, 우리가 죽는 날까지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이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존귀히 여기시고, 높여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 교만은 은밀한 덫입니다.
이 교만을 어디서 끊어낼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입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나니”
누가복음 14장 11절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만 끊어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만 끊어낼 수 있습니다.
호랑이 앞에서 작은 강아지가 아무리 짖어대지만, 호랑이는 눈하나 깜빡하지 않는것처럼,
사탄이 아무리 자신이 대단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눈하나 깜빡이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은 거대하시고 위대하신 분이시죠.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를 발견한다면,
그 분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내가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도울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때, 그리고 예수님은 그 피값으로 나뿐만이 아니라 내 친구도, 부모님도, 내가 그토록 싫어하고 무시하는 친구들도 건져내셨다는 것을 깨달을때, 우리 안에서 참된 겸손이 흘러나오는 것이죠.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는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을때, 예수님의 보혈 안에 있을 때만 특별한 존재이구나…”
“그리고 다른 이들도 하나님의 형상인 특별한 존재이구나”
하나님을 향한 시선,
나를 향한 시선,
내 옆에 있는 친구를 향한 시선,
다른 이들을 향한 시선이 달라지죠.
교만한 눈이 겸손의 시선으로 바뀝니다.
지금 이순간 주님은 나를 바라보며, 나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 눈을 맞추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길 힘쓰는 우리 모두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