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막#3] 번제단과 예수 그리스도

출애굽기, 성막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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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19 수요기도회
찬송 91 , 269, 254
기도 박찬선 권사
본문 출27:1-8 (구p.122)
제목 번제단과 예수 그리스도
1. 번제단의 서론
본문은 성막의 울타리를 따라서 유일한 성막의 문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첫 번째로 마주하는 ‘단’에 대한 규례이다. 이 단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올려드리기에 이 단을 번제단이라고도 부른다. 한글 성경에서 ‘제단’ 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동물을 죽이다, 짐승을 잡다, 희생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자바흐’에서 유래하였다. 즉 그 이름에 걸맞게 이 곳에서는 예배자를 대신하여 짐승들이 죽임을 당하고 희생을 당하는 곳이었다. 목을 쳐서 피를 다 흘려낸 제물은 그 피는 후에 제단의 뿔에 발라지고 제단 사면에 뿌려진다. 그리고 제물은 반으로 쪼개어 열어둔 채로 내장들을 씻고 손질하며, 살점들에 일일이 칼집을 넣음으로 제단 위에서 잘 타오를 수 있도록 한다. 그야말로 가장 해괴하고 끔찍하며 잔혹하고 두려울만한 광경이다.
모든 예배자는 번제단을 마주하며 그곳에서 보게되는 처참한 광경을 통해 세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 죄의 결과, 죄의 대가, 죄의 값은 눈 앞에 보여지는 처참한 광경처럼 비참한 죽음과 심판, 저주 밖에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하는데, 성경은 죄의 삯이 사망이라고 말씀한다. 즉,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나의 죽음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셋째는, 내가 그 머리에 안수하여 번제단에서 죽여 드리는 이 짐승을 하나님께서는 예배자의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 받으셔서 그 피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다. 특별히 나중에 번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죽은 짐승의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이유는 이 짐승의 죽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제물로 드려진 짐승이 예배자의 죄를 뒤집어 쓴 채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받아 죽은 그 비참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번제단은 어떻게 만드는가? 1절을 보면 조각목으로 만들되 2절에 그것을 놋으로 싸서 만들며 그 사면에 뿔을 하나씩 달고, 내부 가운데에는 제물을 태울 수 있도록 그물망을 두며, 4절을 보면 그 그물망 상단 양편으로 2개씩 놋 고리를 두었고, 6-7절을 보면 번제단을 들고 움직이기 용이하도록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놋으로 감싼 뒤에 그물망의 놋 고리에 채를 끼울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번제단에서 사용할 부속품도 만들게 하셨는데, 3절을 보면 내다 번제단에서 나온 재를 긁어모아 재통에 담을 수 있는 부삽, 번제단에 올릴 고기를 담거나 흘러내리는 희생 짐승의 피를 받아둘 대야, 번제단 위로 고기를 올릴 때 쓸 고기 갈고리, 번제단의 불씨를 성소 안 향단에 분향할 수 있도록 불 옮기는 그릇, 번제단에서 희생제물을 태우고 나서 남는 재를 담아두었다가 성막 바깥 재 버리는 장소에 버릴 수 있도록 재를 모아두는 통, 이 모든 것들을 다 놋으로 만들라고 하셨다.
번제단의 크기는 어떠한가? 1절 말씀을 보면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 높이는 삼 규빗이다. 오늘날 단위로 환산하면 고작 가로 세로2.2미터에 높이 1.3미터 밖에 되지 않는, 당시 크고 웅장하던 이방신전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한 크기였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당시, 이집트의 카르나크 신전이 있었는데 이 신전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고대 이집트 신전들 중 가장 오래 되고 가장 거대하다고 알려져있다. 이 신전은 가로 540미터, 세로 600미터로서 신전 안에 배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수로도 있고, 돌기둥들로 만든 돌숲까지 조성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거대신전에 놓인 제단은 또 얼마나 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이 외에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세워졌던 얼마나 많은 거대 신전들이 있었던가. 사람들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신을 숭배하기 위한 신전들도 이처럼 화려하고 웅장하며 거대하거늘, 그들에 비하면 진정한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제단은 너무나 보잘 것이 없다.
그럼에도 이 제단이 다른 어느 이방 신전의 제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인데, 첫째는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제단이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께서 보이신 디자인대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둘째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제사가 드려지는 곳이 바로 이 번제단에서 이루어진다는 점과, 마지막으로는 모든 성막의 기구들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듯이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제단 역시도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 세번째 이유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또한 사도 요한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말씀한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번제단을 살펴보면서, 특별히 이 세 번째 이유에 집중해서 생각해 볼 것이다.
2. 번제단의 위치
1) 성막 뜰의 문과 성소로 들어가는 입구 사이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번제단이 어디에 놓였는가 하는 부분이다. 이 놋제단은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를 따라가다가 동편에서 만나게 되는 성막의 유일한 문(뜰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면, 이제 정면에 텐트식 성소가 보이게 되는데, 본문의 번제단은 뜰의 문과 성소 사이인 바깥뜰에 위치해 있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려는 자들은 온전한 번제물을 이 놋 제단으로 가지고 와야 했다. 그리고 이 제단에서 드릴 고기를 만들기 위해 짐승을 잡아 깨끗하게 손질하게 된다. 물론 번제단이 성소 안에 두지 않은 것은 화재의 위험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기에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데, 성소에 임재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그리고 가장 우선적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야 하기 때문이다. 사죄의 은총을 받아야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성소의 진설병을 통해 상징적으로 베풀어지는 언약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제단은 대속으로 죽음을 당하는 장소였다. 거기서 죽은 동물의 피를 제단 바닥에 뿌렸고, 그 몸은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졌다. 제단은 죽음의 장소였다. 성막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이 번제단을 만나게 되고, 번제단 앞에서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앞서 번제단을 마주할 때 깨닫는 세 가지를 말씀드렸다. 짐승이 번제단 앞에서 비참하게 죽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비참함이 이와 같다는 것이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죽음이 요구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는 희생제물의 대속적 죽음을 통하여 우리 죄를 용서해주심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번제단에서 흘려진 짐승의 피를 전유하지 않고, 거기서 드리는 제물을 나를 위해 드려진 대속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번제단의 기능과 의미와 역할을 건너뛰고 곧장 성소로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번제단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자 동시에 장벽이기도 했다. 누구든 번제단의 의미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구하는 자들에게 번제단은 길이 되지만, 이 의미를 거부하며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번제단은 그들의 길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2) 구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 세워진 십자가
온통 피로 범벅이 되고, 여기 저기 짐승의 울부짖는 비명소리, 어디를 둘러보아도 피비린내 가득한 번제단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과는 도무지 거리가 멀어보인다. 그런데 그 잔혹한 광경의 번제단은 우리의 구원자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 비참한 광경은 2천년 전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던 작은 언덕, 비참한 모습으로 나무 위에 달리신 그 분께로 우리를 인도한다. 비참함과 죽음, 저주와 심판을 상징하던 번제단은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한 저주와 심판, 버림받고 외면당함, 손가락질, 모욕, 비참함의 대명사와도 같은 그 참혹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한다.
마치 번제단이 번제단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자 동시에 장벽이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려 하는 죄인들의 발걸음을 일단 멈추게 한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흘려지는 피를 바라보며 저 피가 하나님 앞에서 내 죄의 비참함과 저주요 심판임을 기억해야 하고, 그 죽음이 본래 내가 받아야 했던 것임을 깨닫게 하며, 나 대신 흘려진 대속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겸손히,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 흘려진 피를 의지하지 않고는, 거기서 드려진 희생제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3. 번제단의 모양
1) “네 방향”을 향한 뿔
이러한 사실은 번제단의 모양에서도 발견하게 되는데 제단의 네 모서리에 놋쇠로 만든 네 개의 뿔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레4장을 보면 번제단에서 속죄제를 드릴 때 짐승을 잡아 불로 태우기 전에 짐승의 피를 번제단의 뿔에 바른 후에 태우게 된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하필 번제단의 사면에 다른 것도 아닌 뿔을 만들어 달았을까? 이왕이면 누구라도 연상하기 쉽게 십자가 모양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누구라도 제단의 뿔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어진다는 것을 쉽게 이해했을텐데 말이다. 그런데 뿔을 달게 하신 것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 뿔이 가진 의미 때문이었다.
당시 가축을 기르던 이스라엘은 양이나 염소, 소가 서로 힘겨루는 장면들을 종종 목격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양이나 염소가 서열을 정리하거나 힘겨루기를 할 때 뿔의 크기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가축들에게 있어서 뿔은 강한 힘, 강한 능력의 상징이었다. 뿔이 클수록, 모양이 잘 빠질수록, 단단할수록 강한 힘을 가졌음을 의미했다.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뿔은 곧 강함이었고, 능력이었으며, 권세를 상징했다. 성경에서도 고대 이스라엘이 가졌던 의미들을 사용하셔서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암3:14의 말씀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벧엘의 제단의 뿔들을 꺾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제단의 뿔들’은 마찬가지로 힘과 권세를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벧엘 제단의 뿔들을 꺾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상숭배자들의 거짓된 신들을 하나님의 힘과 권세로 짓밟으시겠다는 의미이다. 즉, 뿔은 힘, 권능, 권세를 상징한다.
그리고 제단에 달린 뿔은 총 4개로서, 4개는 사면 곧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그 뿔이 사면을 향해있다는 것은 온 천하에 가장 강한 힘과 권세와 능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과 같았다. 온 천하에 하나님처럼 강하고 능하신 분이 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신4:39에서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라고 이스라엘을 권면하였고,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라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뿔을 찬송하였으며, 사도 요한 역시도 환상 가운데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라고 찬송하는 장면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뿔이 상징하는 바 모든 존귀와 영광과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충만하시다. 이 사실을 믿으시는가? 할렐루야.
2) 구원의 뿔이신 예수 그리스도(눅1:68-69)
그리고 제단에 달린 네 개의 뿔 역시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말씀을 함께 찾아보자. 눅1:68-69이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기를,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구원의 뿔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속량하실 분이다. 마1:21의 말씀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성경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구원의 뿔’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말씀 한 구절을 더 찾아보자. 계5:6이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여기서 사도 요한이 본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런데 그분에게 일곱 개의 뿔이 있다고 말씀한다. 뿔은 힘과 권세와 능력을 상징하는데 그것이 우리 주님께 일곱 개, 아주 완벽하게, 차고 넘치도록 있다고 말씀하신다. 구원의 뿔이신 예수님께서 일곱 뿔을 가지고 계신다. 권세와 능력으로 충만하시다. 그래서 모든 주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기에 충분하다.
번제단 사면에 뿌려진 피, 그리고 번제단 네 개의 뿔에 발라진 피, 온통 피투성이인 참혹하고 참담한 장면 앞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다른 무언가를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눈 앞에서 처참하게 흘려진 그 피를 힘입어 나아간다. 그 피가 나의 죄를 대신하는 것임을, 내 대속의 피임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다른 무언가를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시대와 장소와 혈통과 민족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을 위해 흘려진 그 피를 힘입어 나아간다. 흘리신 보혈이 내 대속의 피임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간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이 사실을 믿으시는가? 할렐루야.
말씀의 결론을 맺으려 한다. 성도 여러분, 성막에서 제단이 놓여 있는 위치를 기억하라. 이 제단은 성막의 기구들 중 가장 컸으며, 제사장이 성막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들어올 때에 가장 먼저 마주하던 기구였다. 이는 번제단의 의미와 역할의 중요성을 가리킨다. 이 번제단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출발점에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비참함을 깨달아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죽음이 요구된다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그리고 희생제물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믿고 고백해야 했다.
이스라엘이 번제단에서 흘려진 피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처럼, 이제는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그 새롭고 산 길이 열렸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아멘! 오직 그분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에게 그 이상의 탁월한 길도 없고, 폐하여지지도 않을 영원한 길이 열렸다.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보혈의 능력은 무한하셔서 주를 의지하는 자는 어떠한 죄도 그 피흘림 앞에 용서함을 받는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신 삼위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자. 우릴 위하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성부하나님, 택하신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 성자하나님, 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시고 완성하실 성령하나님 아니신가? 삼위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늘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올려드리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란다.
특별히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을 허락하셨다. 그 복음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고,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가장 귀하고도 복된 소식이다. 막16:15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라고 하셨다. 우리의 입술로, 우리의 언행으로, 우리의 삶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귀한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든 성도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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